[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0. 인조 정권, ‘숭명반청’ 사대주의 빠져 정묘·병자호란 불러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0. 인조 정권, ‘숭명반청’ 사대주의 빠져 정묘·병자호란 불러
중원 정세 오판했다 삼전도 굴욕 당하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시사저널 승인 2015.03.26(목) 21:20|1327호
광해군 10년(1618년) 윤4월27일, 명나라 요계(遼?·베이징과 만주) 총독인 왕가수(汪可受)가 조선 임금 광해군에게 보낸 글이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 왔다. 왕가수가 ‘전에 왕(광해군)의 나라에서 왜노(倭奴)의 변란을 겪자 본조(本朝·명)에서 즉각 10만 군사를 파견하여 쓸어버렸다’면서 조·명(朝·明)동맹 차원에서 후금(後金·청)과 싸울 군대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왕가수는 “(조선에서) 수만 군사를 일으켜 노추(奴酋·누르하치)를 협공하면 반드시 이길 것인데, 이는 왕이 본조에 보답하는 길이자 무궁한 복을 잇는 길이다”라며 적극 참전을 권유했다. 임진왜란 때 명이 군사를 파견해주었으니 그 대가로 조선도 파병하라는 것이었다.
‘명 파병’ 거부한 광해군 결정에 조정 발칵
선조는 임란 직후 명나라에 대해 ‘재조의 은혜(再造之恩)’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임란 때 명나라가 망할 뻔한 조선을 재건해준 은혜라는 뜻이다. 선조가 이런 표현까지 쓴 것은, 전쟁 초부터 도망가기 바빴던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이 되살아난 것은 명나라 군사 덕분이지 류성룡 같은 문신들과 이순신 같은 장수들이 열심히 싸운 덕분은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조선 파병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임란 전부터 명나라를 칠 테니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여러 차례 요구했다. 조선이 무너지면 명나라로 일본의 전선이 이동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명나라는 자국을 전쟁터로 만드는 것보다는 조선을 전쟁터로 묶어두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 파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왕 선조를 필두로 일부 사대주의 벼슬아치들이 명을 천조(天朝)라며 떠받들자, 명나라의 태도는 임란 전과 아주 달라졌다.
명나라는 심지어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개입하려 들었다. 명의 사신들도 임란 전에는 최소한 대국의 체통을 지킨다고 국왕이 주는 선물도 사양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임란 후에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선조 35년(1602년) 명의 황태자 책봉을 알리러 온 고천준(顧天埈)이었다. <선조실록>은 고천준에 대해 “의주에서 서울까지 수천 리 동안 이리같이 탐욕스럽고 산골짜기 같은 무한한 욕심으로 마음껏 약탈하면서 인삼·은·보물을 남김없이 가져가 조선 전역이 병화(兵火)를 겪은 것 같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윤국형은 <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고천준의 약탈 행위에 대해 “말하면 입만 더러워진다(言之?口)”고 비판할 정도였다.
고천준이 사신으로 왔을 때는 훗날 청 태조가 되는 누르하치가 여진족 건주위(建州衛)를 통일하고 해서여진(海西女眞)까지 대부분 통일하는 등 북방에 전혀 다른 정세가 형성되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광해군 8년(1616년), 누르하치는 스스로를 영명칸(英明汗·영명한 황제)이라 칭하면서 금(金)나라의 재건을 뜻하는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연호로 천명(天命)을 선포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명의 왕가수가 부랴부랴 광해군에게 군사 파견을 요청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이것이 중원의 패권을 둘러싼 청(후금)과 명 사이의 충돌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이 중원의 패자가 되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가담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중원 패권 전쟁에서 이긴 쪽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광해군은 그해 5월1일 전교를 내려 군사 파견은 거부하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놓고 기각(?角·앞뒤로 적을 견제함)처럼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라는 전략을 제시했다. 중원 패권 싸움에서 조선은 한 발짝 떨어져 관망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후금은 조선이 외교적으로는 친명 노선을 견지해도 군사만 파병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 대상으로 삼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므로 광해군의 결정은 조선을 전화에서 벗어나게 하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 전략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친명 사대주의자들인 서인(西人)은 말할 것도 없고 집권 대북(大北)의 실세였던 이이첨과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까지 조명군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다. 불과 5개월 전인 광해군 10년(1618년) 정월, 집권당 대북과 야당인 서인·남인(南人)은 인목대비 폐위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폐모(廢母)라는 소모적 정쟁에는 목숨 걸고 싸우던 당파들이었지만 국익에 반할뿐더러 자칫 조선을 전화의 위기로 몰고 갈 조명군 파견에는 모든 당파가 찬성했다. 대제학 이이첨은 승문원 관원을 통해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이자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재조(再造)의 은혜로 오늘에 이른 것이니 추호라도 황제의 힘에 보답할 길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광해군일기> 10년 5월5일)라고 조명군 파병을 주장했다.
명나라는 지는 해, 청나라는 뜨는 해
여야 모두에게 고립된 광해군으로서는 더 이상 파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은 광해군 11년(1619년) 2월, 1만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명나라 군사들과 합류한 강홍립이 ‘명군 진영에 나가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광해군에게 보고한 것처럼 명나라는 이미 청나라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군은 3월2일 심하의 첫 전투에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으나, 3월4일 후금의 주력 부대를 만나 패배한 후 포위당하고 말았다. 함께 종군했던 이민환(李民?)의 <책중일록(柵中日錄)>에 따르면, 후금에서는 “우리가 명과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러 왔느냐”라고 비판하면서도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고 전한다.
더 이상 싸울 방도가 없었던 강홍립은 3월5일 흥경(興京)으로 들어가 후금 국왕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후 억류되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그러자 군량 수송 임무는 등한시했던 평안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가족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그 가족들을 주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홍립의 가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이런 주장에 대해 광해군은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광해군일기> 11년 4월8일)라고 일갈했다. 억류된 강홍립은 청나라에 광해군이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하는 한편 광해군에게도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비밀 장계를 종이 노끈 등에 써서 몰래 보내왔다. 광해군과 강홍립의 견해가 일치한 결과 조선은 전쟁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년),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인조)이 친명 사대주의자들인 서인들과 손잡고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조·명(朝·明)동맹이란 이념에 사로잡힌 서인들은 광해군의 국익 우선 외교정책을 상국(上國) 명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탄하면서 후금과 관계를 단절했고, 그 결과는 인조 5년(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나타났다. 이때 인조가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라고 묻자 병조판서 이정구가 “모릅니다”라고 답변했다. 인조는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숭명반청(崇明反淸)이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의 현실이었다.
그나마 정묘호란은 강홍립의 주선으로 형제 관계를 맺는 선에서 끝을 맺고 청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물러갔다. 강홍립은 그해 7월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에도 서인들은 계속 청나라와 결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의 주전(主戰) 소식을 들은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는 “황제께서는 여러 왕자들과 매번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라고 늘 웃으신다”(<인조실록> 14년 9월10일)라고 조롱할 정도로 조선 사대부들의 숭명 노선은 현실 정세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조선이 계속 숭명반청 정책을 고수하며 결전의 의지를 드러내자 청나라는 인조 14년(1636년) 12월 재차 남하했고,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군신 관계를 맺어야 했다. 광해군의 국익 우선 외교를 조·명(朝·明)동맹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며 쿠데타를 일으킨 사대주의자들이 자초한 국난이었다.
사드, 이념 잣대 아닌 국익 개념으로 봐야
미국의 사드 배치 문제로 정국이 혼란스럽다. 특히 중국의 반대가 심하다. 탐지 거리가 북한 전역에 달하는 500~600㎞를 넘어 2000㎞에 이르는 사드를 남한에 배치하겠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중국은 의심하고 있다. 400년 전, 후금이 산해관을 돌파해 명나라로 들어가기 전에 조선을 먼저 침공한 것처럼 중국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최악의 경우 한국이 먼저 타깃이 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이 아니라 중국의 미사일을 겨냥한 것이라면, 한국이 아니라 괌이나 하와이 같은 미국 영토에 배치하는 것이 맞다. 게다가 한국군의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겨냥한 사드가 한국에 배치될 경우, 지금의 중국은 과거 후금이 인조 정권을 바라봤던 시각과 비슷한 시각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국익이 아니라 이념이 잣대가 되어 우리 국토가 초토화되는 비극이 재연될 일말의 가능성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북핵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는 데 더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주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광해군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의 길을 걸을 것인지, 역사에서 오늘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