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자료실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6. 노론, 주자학 당론 삼아 반대파 제거

작성자류현우|작성시간26.06.19|조회수25 목록 댓글 0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6. 노론, 주자학 당론 삼아 반대파 제거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6. 노론, 주자학 당론 삼아 반대파 제거

 윤휴, 주희 모욕 이유로 사형당해…

학문과 사상의 자유 압살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시사저널 승인 2015.05.07(목) 18:21|1333호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도통(道統)’이란 말이 나온다. 도통이란 유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에게 붙이는 칭호다. 조선 후기에는 주자학을 완성한 주희(朱熹), 즉 주자에 대한 헌사로 사용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서 주자(朱子·주희)를 낸 것은 사실 만세(萬世)의 도통을 위해서였다(송시열, ‘한여석[韓汝碩〕에게 답함’, <송자대전>)”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주자학이란 주희가 공자나 맹자의 말을 해석한 것을 뜻하는데, 송시열 등에 의해 유일사상으로 떠받들어졌다. 백호 윤휴가 사형당한 이유 중 하나도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북벌론과 신분제 완화를 주장하던 청남(淸南) 영수 윤휴는 <중용(中庸)>에 대해 주희와 달리 해석했다는 이유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윤휴가 사형당한 후 송시열이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윤휴의 죄 중에서 주희를 모욕한 죄가 가장 크다고 비판한 것이 윤휴의 사상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말해준다.

 

집권당인 노론은 주자학을 당론으로 삼았고, 이렇게 주자학은 조선에서 유일사상으로 격상되었다. 소론 계열의 박세당(朴世堂·1629~1703년)이 <사변록(思辨錄)>에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상서> 등의 경전을 주희와 달리 해석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 것도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임금도 주자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대였으니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선 후기 일부 선비들은 유일사상인 주자학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사진은 KBS 사극 <징비록>의 한 장면. ⓒ KBS 제공

이익, 주자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다

 

노론이 득세하던 조선 후기에는 주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주희의 시각만이 아니라 공자와 맹자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자 했던 인물이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년)이다. 이익은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못했지만 남인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는 스승으로 여겨졌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년)이 <박학(博學)>이란 시에서 ‘학문 넓으신 성호 선생님/나는 백세의 스승으로 따르려네(博學星湖老/吾從百世師)’라고 읊고,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1758~1816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둘째 형님께 답합니다〔答仲氏〕’)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정약용은 살아생전 이익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묘지명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이익을 사숙(私淑)했다고 말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이익의 종손)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었는데, 그를 보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정약용, ‘자찬묘지명’).”

 

정약용이 이익을 이렇게 높게 평가한 이유가 있었다. 정약용은 ‘섬촌의 이 선생 옛집을 지나며〔過剡村李先生舊宅〕’라는 시에서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정현을 헤아렸다”고 읊었다. 이익이 주희의 시각을 뛰어넘어 공자·맹자의 시각으로 직접 세계를 보았다는 평가였다.

 

물론 정약용도 이인섭(李寅燮)이 편지에서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병통은 정주(程朱:정자와 주자)를 독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자 자신도 주자를 천지사시(天地四時)처럼 높인다고 변명한 적이 있는 것처럼 주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약용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주희의 이론을 여러 번 반박했던 것처럼 주희의 사상을 금과옥조로 떠받들지는 않았다. 정약용이 주희를 상대적인 인물로 볼 수 있었던 데는 성호 이익의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익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이익의 탄생지가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던 평안도 벽동군이라는 점부터 이를 말해준다. 백호 윤휴와 같은 당파였던 이하진은 숙종 6년(1680년) 정권이 서인으로 넘어가면서 벽동군으로 유배를 가서 이듬해 이익을 낳았다. 이하진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인 숙종 8년(1682년) 유배지에서 55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숙종실록>이 ‘이때에 이르러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성호 이익이 부친은 물론 백호 윤휴도 억울하게 사형당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익은 자형(兄)인 조하주(曺夏疇)에 대한 제문(祭文)에서 “세상의 영화를 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서 마치 더러운 물건을 보는 듯 배척했으며, 두텁고도 굳은 심성을 굳게 지켜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셨다”고 칭찬했다.

 

조하주는 숙종 2년(1676년) 백호 윤휴가 사회 개혁과 북벌에 소극적이던 탁남(濁南) 영수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을 비판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자 사학(四學) 유생을 대표해서 윤휴를 다시 부르라는 상소를 올려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익이 조하주에 대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셨다’고 칭찬했다는 것은 윤휴를 다시 부른 행위를 옹호한 것이었다. 이익도 그 시대의 다른 학자들과는 다른 학문세계를 구축했고 그의 이런 사상은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주자학에 대해서 직접 비판하는 학문은 양명학(陽明學)이었다. 명나라의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1472~1528년?)이 제창한 양명학은 일찍이 조선 중기에 조선에 들어왔지만 퇴계 이황(李滉)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다. 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황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몬 데다 노론이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떠받든 상황과 맞물리면서 양명학은 금기가 되었다.

 

주자학 뛰어넘어 세상 본질 고민한 정제두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란 단어까지 생겨났다.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이다. 하곡 정제두(鄭齊斗·1649~1736년)도 당초에는 그런 인물이었다. 정제두는 24세 때 대과(大科)에 떨어지자 더 이상의 과거 응시를 포기했다.

 

그는 진정한 학문에 매진하면서 양명학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양명학자라고 시인하지는 못하고 외주내양의 자세를 취했다. 그 사이 문명이 높아가자, 32세 때인 숙종 6년(1680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임명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정제두가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으로 나가게 된 계기는 지난했던 가족사와 자신의 잦은 와병이었다. 정제두는 5세 때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주던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다. 백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데다 종손마저 어려서, 정제두가 초상과 장례를 주관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7세 때 맞이한 부인 윤씨를 23세 때 잃고 어린 아들도 잃었다. 그 자신도 자주 병석에 누웠다.

 

이런 상황에서 인생과 세상의 본질을 고민하다 보니 주희의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두는 34세 때 병이 깊어지면서 뒷일을 아우에게 맡기는 글을 쓰고 박세채(朴世采)에게 유언 비슷한 편지를 남기는데 이 편지에서 비로소 양명학자임을 밝힌다. “제가 여러 해 동안 분발하면서 생각해두었던 것들을 선생님께 모두 보여드리고 바른 길을 구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생각해보건대 천리(天理)가 곧 성(性)이라고 하지만 심성(心性)의 뜻에 대해서는 아마도 왕문성(王文成·왕양명)의 학설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박세채에게 올리려던 글’).”

 

이 이야기는 주자학에서 ‘성즉리(性卽理)’, 곧 성(性)이 리(理)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고 ‘심즉리(心卽理)’, 곧 심(心)이 리(理)라는 양명학의 핵심 이론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정제두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편지를 쓴 것인데, 예상과 달리 병석에서 일어나면서 파란이 일어났다. 양명학자라고 고백한 그에게 수많은 시비가 일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난은 양명학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양명학은 이단이라는 주자학의 결론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정제두는 숙종 13년(1687년)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지난달 민언휘(閔彦暉·민이승)와 더불어 수일 동안 고양(高陽)에서 만나 서로 토론한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언휘는 양지(良知)의 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양명학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이단으로 몰았다.

 

정제두는 ‘민성제에게 답하는 글’에서 “책 끝에 주륙(誅戮)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는데… 죽이고 욕보이는 것은 학문을 권장하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항변했다. 정제두는 민언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너와 나의 구별을 될수록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라고도 말했다.

 

그 시대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몰던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정제두는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자의 싸움은 오직 그 의리를 위한 것이지 자기의 사욕 때문은 아닙니다. 공론(公論)의 결정은 옳고 그름에 달린 것이지 세력의 강하고 약한 것으로 정할 것이 아닙니다”라고도 말했다.

주자학을 극복하려 했던 성호 이익. ⓒ 연합뉴스

그는 결국 61세 때인 숙종 35년(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는데, 그의 <연보(年譜)>는 이해 장손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해서 선조들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적고 있으나, 이때는 노론 일당 독재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그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 강화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 후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일부 인사들이 그를 따라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숨 쉬는 작은 공간이 되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조선 후기 내내 이단으로 몰렸던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양명학자들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반면 주자학이 당론이던 노론에서는 당수 이완용을 중심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대열에 집단으로 나섰다.

 

기존 틀 깨야 새로운 사상 나온다

 

지금 21세기 백주대낮의 대한민국도 조선 후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직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학제(學制)가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고,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 즉 총독부사관이 주류 학문으로 행세하는 상황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정치이론이 학문의 외피를 입고 하나뿐인 정설로서 인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사회에서 기존 사고의 틀을 깨는 어젠다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한국이 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학제와 학문의 틀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현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상이 용인되는지는 한국 사회의 성숙도와 수준에 달려 있겠지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