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7. “나라 무사하다면 어찌 몸 하나를 아끼겠는가”
[자신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만 걱정했던 정승 이경석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시사저널 2015.05.15(금) 11:51|1334호
전주 이씨를 종성(宗姓·왕실의 성)이라고 한다. 허균(許筠)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서 종성으로 정승이 된 사람으로 이원익(李元翼)과 이헌국(李憲國)을 꼽으면서 “두 사람 모두 원훈(元勳)이자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허균 사후 정승에 올랐던 종성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년)이다. 임진왜란 와중인 선조 28년(1595년)에 태어나 현종 12년(167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인조반정(1623년)과 정묘(1627년)·병자호란(1636년) 등의 국난을 두루 겪은 것이다.
‘검덕’ ‘불편부당’ ‘무무출’을 덕목으로 삼아
이경석의 문집인 <백헌집(白軒集)>의 ‘연보(年譜)’에 따르면, 그는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 손이다.
그는 인생에 많은 파란을 겪었는데, 첫 시련은 인목대비 폐위 문제였다. 광해군과 집권 세력 ‘대북(大北)’은 대비 폐모라는 이념 문제를 국정의 전면에 배치하면서 국정 장악 동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대비 폐모 문제는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모든 유생에게도 선택을 강요했다. 만 스물두 살 때인 광해군 9년(1617년) 증광별시(增廣別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이경석은 이듬해 폐비론에 반대해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지워지는 삭적(削籍)을 당했다.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된 것이었다.
쿠데타에 지나지 않은 인조반정이 사대부의 지지를 받았던 데는 광해군이 폐모라는 이념 문제로 피해자를 너무 많이 만든 것에 따른 자업자득 측면이 있었다. 이경석도 5년 후인 광해군 15년(1623년) 인조반정 직후 열린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다. 그 후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다가 서른한 살 때인 인조 4년(1626년)에는 요직인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올랐다. 이경석은 평소 ‘검덕(儉德)’ ‘불편부당(不偏不黨)’ ‘무무출(無出)’을 덕목으로 삼았는데, 무무출은 후실(後室·첩)을 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니 축첩이 일반화된 사대부 사회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이경석의 운명은 인조 정권이 외교를 이념화하면서 다시 격랑에 휩쓸려 들어갔다. 인조 정권은 쿠데타 이후 ‘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를 반대한다’는 숭명반청(崇明反淸) 기치를 높이 들었는데, 이 때문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한 것이었다.
인조 14년 봄 청(淸)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은 황제를 자칭하고 마부대(馬夫大)를 사신으로 보내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했다. 척화론자, 즉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이 마부대를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전쟁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9년 전인 인조 5년(1627년)의 정묘호란 때 불과 석 달을 못 버티고 항복했던 조선이었다. 마부대가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에게 “한(汗·청나라 황제)께서,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라고 말하면서 웃는다”고 조롱할 정도로 척화는 비현실적이었다.
이때 대사헌 이경석은 “척화 일사(一事)가 어찌 정대하고 명쾌하지 않겠는가마는…사세를 돌아보지 않고 강적(强敵)에게 분을 돋우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이경석 행장>)라면서 협상하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창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上國)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인조는 향명대의(向明大義)를 위해 후금과 화(和)를 끊는다고 선전(宣戰)의 교서를 내렸고, 그해 12월 청 태종은 여진군 7만, 몽고군 3만 등 도합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蒙塵)하려 했으나 청나라가 김포까지 장악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한겨울의 남한산성은 농성 장소가 아니었다. 명나라는 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고, 의병도 거의 봉기하지 않았다. 인조는 이듬해(1637년) 1월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구)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항복해야 했다. 그 자리가 수항단(受降壇)으로, 청나라는 여기에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다. 이것이 삼전도비(三田渡碑)인데, 누가 비문을 짓느냐가 문제였다.
사민(士民)들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하기도
국왕이 항복한 이상 비문 찬술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이 지어야 했으나 마침 궐위였다. 그래서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비문을 짓게 했는데, <인조실록>에 따르면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이 글을 썼다”고 전한다. 인조가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에 보내자 청에 항복한 명(明)나라 학사 범문정(范文程)은 이경석의 글을 일부 개찬(改竄·글의 일부 구절을 고침)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이때 이경석을 불러,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이다”라면서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끝내 오(吳)나라를 꺾고 복수한 사실을 말하면서 개찬을 부탁했다.
이경석은 비문의 일부를 개찬하고는 공부를 가르쳐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회오했다. ‘수치스러운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라는 시는 비문을 찬술해야 했던 그의 고통을 잘 말해준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비문의 찬술자라고 비판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경석은 이후 청나라에 구금되는 수모까지 당한다.
그 후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처럼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던 이경석은 인조 23년(1645년) 이조판서로 임용되었다. 이경석은 이때 송시열·송준길 등 사림을 대거 등용해 사림의 주인(主人)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훗날 송시열과의 시비에 휘말리면서 큰 곤욕을 치른다. 인조 23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효종 즉위년에 드디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효종 1년(1650년) 전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의 힘으로 다시 집권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경석은 다시 위기에 빠졌다.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조선으로 왔는데, 이때 이경석은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썼다. 사간원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만을 생각하는 그의 의리를 백성들이 존경하고 있다”면서 이경석에게만 죄를 떠넘긴 다른 재상들을 추고하라고 청했을 정도다. 이경석은 ‘대국을 속인 죄’로 극형에 처해질 뻔했지만 효종의 구명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다시 유폐되었다.
이경석은 ‘영원히 서용(敍用·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년 만에 석방되었는데,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후 이경석은 광주(廣州) 등지에 은거하면서 국왕의 자문에 응했는데, 효종 6년(1655년)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의 한양 거주를 질책함에 따라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같은 명예직을 맡아 녹봉만 겨우 받았는데, 그에 대한 청나라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현종은 재위 9년(1668년) 궤장(杖)과 잔치를 내렸다. 종성 정승인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 일흔세 살 때의 일이었다.
반대파였던 서인들도 이경석의 일생 칭찬
이듬해 현종은 온양 행궁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아 한양을 맡게 했는데, 이때 행궁에 있는 현종에게 올린 상소로 인해 뜻밖에도 송시열과 시비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경석은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현종실록>10년 4월3일)라는 상소를 올렸다. 근처에 있으면서 임금을 문안하지 않는 신하들이 있다고 비판했는데, 직산에 있던 송시열이 이를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발끈한 송시열은 이경석을 송나라의 손적(孫)에 빗대 비난했다. 송나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금의 비위를 맞추는 글을 써준 대가로 ‘오랫동안 편하게 살았다(壽而康)’고 주희(朱熹)가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이경석이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은 것에 대한 야유였다. 그러나 반청 인사로 몰려 죽음 문턱까지 여러 번 갔다 온 이경석을 청나라로부터 곤욕을 치른 적이 없는 송시열이 공격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이경석은 2년 후인 현종 12년(1671년)에 사망했는데,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래 관리에게도 겸공(謙恭)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 9월23일)라는 졸기가 그의 일생을 대변한다.
현재 대한민국에 필요한 총리가 바로 이경석 같은 인물이다. 종성 이경석이 왕조와 명운을 같이하면서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진 것처럼 정권과 명운을 같이하면서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지는 총리가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이 부리기 편한 총리란 그간 여러 차례 목도한 것처럼 장삼이사(張三李四)만도 못한 도덕성에 개인의 출세만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인물들일 것이다. 송시열의 당이었던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도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고 칭찬할 정도의 인물을 찾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임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없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