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유학사 인물 103인(120)/大山 李象靖(上)
安東에서 大邱가는 쪽으로 국도를 따라 8km쯤 지나면 眉川이라는 냇물이 나온다. 이 냇물을 막아 유원지를 만든 곳이 高山유원지이다. 大山 李象靖을 모신 高山書院은 이 유원지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이 서원은 李象靖의 사후 3년에 사람의 발론(發論)으로 건립이 추진되어 1789년에 완공되었다. 이 사원의 옆에는 高山精舍라고 현판을 붙인 3칸짜리 작은 건물이 붙어있다. 원래 高山精舍는 서원의 동남편에 있었으나 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정사는 李象靖이 52세 때(1762)지어 수시로 제자와 강론하고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大山 李象靖(1710-1781)은「退溪의 嫡傳」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대학자이다. 그는 密庵 李栽의 외손이다. 특히 외조부인 密庵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密庵은 아들인 葛庵 李玄逸과 함께 退溪계의 주리적(主理的) 영남학파의 형성에 선봉의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李象靖의 학문은 이들 李栽 李玄逸 부자의 영향을 받아 닦여져 退溪學을 잇게 된다. 李象靖은 주리적(主理的) 이기설(理氣說)의 규명에 주력했다.
그의 이기설은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기설은 19세기 性理學의 대가인 定齋 柳致明을 비롯하여 寒洲 李震相, 면후 郭鍾錫 등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주리설(主理說)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경기의 華西 李恒老와 호남의 蘆沙 奇正鎭의 유리설(唯理說) 형성에 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尹絲淳교수(고려대)는「그의 이기설은 영남계의 퇴계학파를 기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이론을 심화하는데 공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李象靖이 주장하는 이(理)는 사실적인 소이연(所以然)의 의미보다는 소당연(所當然)의 의미를 짙게 띤다. 이점은 18세기 한국 성리학의 한 특색이다. 그의 이(理)는 스스로 운용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활물(活物)」임이 역설되어 이(理)가 기(氣)에 비해 가치상으로는 물론 작위상(作爲上)으로도 우월함을 애써 논증했다. 이의 우월성 주장은 退溪계의 학자들이 크게 주력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이기설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적인 이론을 심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대산 李象靖은 高山書院에서 大邱쪽으로 다시 8km쯤 떨어진 安東군 一直면 蘇湖리(현 望湖동)에서 태어났다. 관향은 韓山으로 고려조의 대학자 牧隱 李穡의 15세손이다.
또한 柳西厓의 외손자인 李弘祚의 현손이기도 하다. 그는 李泰和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景文이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종가로 되어있으나 원래 큰 건물이었던 게 많이 헐렸다. 종가에는 지금도 선조의 태실 유지로 그가 태어난 방을 지키고 있다. 그가 태어난 방은 한 방에서 4명의 급제자를 낸 방으로 유명하다. 大山과 그의 아들과 현손 및 외손자 등이 모두 그 방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는 14세에 외조부 李栽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25세 때에 소과와 대과에 급제, 그 이듬해부터 벼슬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10개월 만에 직책을 내던지고 훌훌히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하여 大石山 아래에 大山書堂을 세우고 강학과 저술 그리고 후진 교도(敎導)에 전념했다.
大山書院은 그의 집(현 종가) 바로 옆에 있었으나 후에 마을 뒷산 기슭으로 옮겼다. 그가 大山書堂을 열자 경향각처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소위 호문삼로(湖門三老)로 일컬어지는 李宗洙 ․ 柳長源 ․ 金宗德을 비롯하여 柳道源 鄭宗魯 金굉 金熙周 李野淳 李顯靖 李師靖 등 수백명의 이름난 선비들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大山書堂을 중심으로 한 그의 학덕과 인품이 알려지자 대궐에서는 그에게 계속 벼슬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거의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술과 강론에만 몰두했다.
승문원 정자(正字) 延日縣監 사헌부 감찰 康翊현감,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등을 잇달아 제수했으나 대개 사임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혹은 부임해도 수개월 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초야에 묻혀 도학보국(道學報國)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힘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년에 이르기 까지 그는「敬齋箴集說」「制養錄」「理氣彙編」「屛銘發揮」「朱子語節要」「退陶書節要」「四禮通變攷」등의 주요 저술을 펴냈다. 이와 함께「理氣動靜說」「理氣先後說」「心無出入說」「心動靜圖」등 성리학설에 관한 단편적인 저작도 상당히 펴냈다.
그의 만년인 70세가 되었을 때 正祖는 그에게 병조참지(參知)를 제수했다. 이에 그는 역시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은 다시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는 사임하기를 거듭 6차례나 반복하는 유명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전말을 보면 정조 4년 9월에 병조참의 벼슬을 내리자 10월에 이를 사직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예조참의 벼슬을 내렸다.
정조 5년 1월에 예조참의 직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은 그에게 다시 형조참의 직을 내려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했다. 그해 3월 그는 부임차 서울행을 단행했으나 忠州까지 가다가는 그곳에서 다시 사작상소하고 귀가해 버린다. 그해 5월에는 독촉에 못 이겨 豊基까지 갔으나 다시 형조참의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귀가했다. 이때 그는 71세의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음달(6월)에 3번째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유명한 九條疏로 그의 경국지리(經國之理)를 밝힌 것이다. 왕은 이에 그에게 비답을 내려 9조소를 항상 좌우의 명(銘)으로 하여 보고 살피는 도움이 되게 하겠다고 속히 부임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건강의 악화로 그는 8월에 네 번째로 형조참의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결국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1781년 71세로 타계했다. 그의 사후 1년만에 문집 52권 27책이 발간되며 그 이듬해「敬齋箴集說」이 간행된다. 그의 저서는 문집 52권 27책(全書 68권)외에「續集」5권「實記」10권과 문인록 3권 등이 있다.
* 참고문헌 =「嶺南人物考」「大山先生年譜」「大山 李象靖의 理氣觀
* 도움말 =李亨馥(安東군 망호동). <李夏錫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