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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학사 인물 103인(121)/大山 李象靖(下)

작성자류현우|작성시간26.06.09|조회수16 목록 댓글 0

조선유학사 인물 103인(121)/大山 李象靖(下)

 

大山 李象靖은 退溪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만큼 이(理)가 기(氣)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철저하게 폈다. 특히 그의 저서「退陶書節要」와「溪門諸子錄」등은 그가 退溪계열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율곡과 퇴계가 이론적으로 갈라진 것은 다 아는바 대로「四端 ․ 七情」에 대한 理와 氣의 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다. 李象靖은 41세 때 이 문제에 대해「四端 七情說」을 집필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 글은 퇴계와 율곡 이후의 대립되는 두 개의 설을 정리하고 동시에 자신의 학문적인 관심이 退溪系에 있음을 밝혔다.

退溪와 栗谷에 있어서 4단 7정의 해석 차이는 四端에 대한 退溪의 해석인「理發」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데 있었다. 퇴계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氣에 비해 理가 가치상으로는 물론 작위상(作爲上)으로도 우월함을 밝혀야 했다. 李象靖의 스승 密庵 李栽는 氣의 제약적인 관계없이 理가 작위(作爲)함을 주장했다. 李象靖은 거기에 더욱 이론적인 무장을 이룬 사람이다. 그의 이론서로서 대표적인「理氣彙編」에 의하면「이는 공하지만 기는 사하고, 이는 무형하지만 기는 유형하고, 이는 불선함이 없지만 기는 악에 흐르기 쉽다.」고 했다. 그러므로 4단 7정과 같이 감(感)해서 발(發)하게 될 때에는 이와 기는「主」와「賓」으로 구별할 수 있으므로 결국「이발」이 가능하다는 것.

尹絲淳교수(고려대)는「원래 이우위설(理優位說)이란 理를 氣의 유행 및 생성의 소이연(所以然) 내지 주재자(主宰者)로 보는 데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어떻게 理가 氣보다 앞서기의 所以然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하는 이른바 <理先有>의 설명이 주리학자(主理學者)들의 가장 큰 문제라고 밝혔다.

李象靖은 理非先有說(理氣無先後說)에도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理先有도 말할 수 있다는 신축성 있는 이론을 폈다. 理非先有說이 타당한 것은 이는 형이상자(形而上者)로서 氣의 존재처를 얻지 못하고 혼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理先有도 타당한 것은「太極이 動하여 陽을 生한다.」고 할 경우, 이 말은 陽을 生하는 측면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그 관점을 바꿔 생각하면 陽이 生하기 이전에 필히 陰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太極은 陰을 타고서 陽을 生하는 근본이 되었을 것이며 太極의 理가 氣에 선행한다는 先有說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尹絲淳교수에 의하면 李象靖은 太極(理)의 動靜에 관한 경우에도 일단 理無動靜說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理有動靜說도 시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理無動靜說을 시인하는 것은 현상계에서 실제로 動靜하는 것은 形以下의 氣이기 때문이다. 즉 理가 動靜한다고 하더라도 그 理의 동정은 사실상 氣를 탐(탑승함)으로써 氣의 動靜에 따라 動靜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동시에 理有動靜說을 시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氣에 탑승한 理의 본체는 무작위(無作爲)하여 자약하지만 실은「氣를 主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면서 李象靖은 理가 氣를 주재한다는 점에서 마침내「理가 活物」임을 주장하여 스스로 운용의 묘를 발휘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논리전개는 퍽 어렵고 까다로워 보통사람들로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든다. 어쨌든 그의 이러한 理氣說은「그후 19세기의 성리학의 대가인 定齋 柳致明을 위시한 寒洲 李震相, 면후 郭鍾錫 등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주리설(主理說)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尹絲淳씨는 말하고 동시에 경기의 李恒老는 물론 호남의 奇正鎭의 유리설(唯理說) 형성에 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동시에 주리설(主理說)은 程朱계열의 성리학에 있어서 정통에 위치했던 이론인 만큼 李象靖의 理氣說은 영남계통의 퇴계학파를 형성하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이론을 심화하는 데에 공이 많았다고 평가되어 있다.

李象靖이 살았던 18세기 당시에는 程朱學을 거의 교조적(敎條的)으로 신봉하면서 그 학문 이론을 바탕으로 예학(禮學)의 풍토를 조성하여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던 때였다. 그러므로 유학자들은 당시 전근대적인 모순점들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그 개혁보다는 기존질서에의 안주 속에서 특히 예학적인 명분인 예송(禮訟)에 의한 집권에 관심을 쏟았다. 이에 비해 근본적인 개혁에 몰두한 학자들은 소수의 陽明學者들과 反程朱的인 實學(후기 실학)者들과 이른바 비정통파 유학자들이었다. 尹絲淳교수는 그러므로 주기적(主氣的) 율곡계통이건 주리적(主理的) 퇴계계통이건 程朱계통학자들의 학문이 지향한 이상적인 지표는 모두 程朱說에 입각한 예학(禮學)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李象靖의 理氣說이 지닌 현실적 의의도 이 같은 18세기 程朱學의 학문적 지표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李象靖이 말하는 이의 의미는 사실적인 소이연(所以然)의 의미보다는 가치적인 소당연(所當然)의 의미의 비중이 컸다. 그런 면에서 그의 학문적인 삶은 정통적인 유교이념을 신봉하여 흔들림이 없는 유가적인 삼엄한 삶의 표본으로 곧잘 떠오르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이러한 면모 때문에 실학과 양명학 등 당시 새롭게 부상되던 새로운 흐름과 대비되어 정통적인 이념의 전개를 보여준 이론가로 중요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새롭게 떠오르는(실학과 같은) 가치관 앞에서 종래의 정통적인 유학을 지키면서 동시에 栗谷계통에 맞서 退溪계통의 영남학파의 이념을 이론화하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性理學에서 그가 중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벼슬보다는 강학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런 만큼 그의 문하에서는 많은 인재가 쏟아졌다.

그의 문인록에 올라온 이름만도 2백 73명에 이를 정도이다.

한편 그의 아우 小山 李光靖(1714-1789) 역시 학자로 유명했다. 李光靖은 생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고 계속해서 敎官 ․ 別提의 벼슬에 이르렀다.

李象靖의 후손은 60가구가 서울(20여호)과 부산(5호 정도) 등지에 살고 있으며 그의 향리인 安東군 望湖동에는 현재 4가구 정도가 남아있다. 종가는 李麟遠씨(57)가 지키고 있다.

 

* 참고문헌 =「嶺南人物考」「大山先生年譜」「大山 李象靖의 理氣觀(尹絲淳)」

* 고침 = 128회의 글 중「密庵은 아들인 葛庵」을「密庵은 아버지 葛庵」으로, 柳致用은 柳致明으로 바로잡습니다. <李夏錫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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