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유학사 인물 103인(127)/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Ⅱ]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 혹은 이택재)라는 재실을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여택재는 그 뒤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말년에는정주학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의 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1785년(정조 9)에『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는 곧 현실세계의 명분론적(名分論的)인 위계질서의 옹호이며, 이러한 사상은 일체의 반성리학적인 사상이 담긴 도교나 불교, 심지어는 양명학까지도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사상은 당시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독주의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안정복은 생전 노론 천하인 1790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사후인 1801년에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관료로서 현달(顯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직생활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듯하다.
부친의 평생 처사 생활로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하였다.
안정복은 18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변화기에 살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적인 측면의 고양과 서구문물 가운데,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익을 만나기 전인 1746년까지는 자신의 학문적인 경지를 스스로 형성해 갔던 일개 선비에 불과하였다. 스스로 학문 연마과정에서 이룩한 『임관정요』와 『하학지남』은 안정복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는 뒷날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로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관정요』는 후대 정약용(丁若鏞)의『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학지남』은 주자의 『소학』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고 밝히면서 기초학문인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간접적으로 반박하였다. 1744년에 접한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안정복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현실의 개혁문제에 대해 관심을 경주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1746년 이익을 방문해 문인이 되면서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 이익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특히 안정복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진 사람은 인천에 살던 윤동규와 충청도에 거주했던 이익의 조카인 이병휴 및 경기 안산의 이익의 자인 이맹휴(李孟休), 그리고 이인섭(李寅燮) · 이구환(李九煥)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경기 남부와 충청도에 거주했고, 전통적으로는 퇴계학통을 이었다. 이들은 영남 남인들과도 교류를 유지했는데,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익의 문인이 된 뒤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역사학에 대한 시각, 그리고 서구사상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1715년경에 쓴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이 때 접하여 보고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리학을 논할 때는 이익의 견해를 바탕으로 정이· 정호 · 주희· 이황의 계제적인 이론의 근원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였다.
한편,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東史綱目凡例)』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역사서인 『동사강목』은 유형원→이익→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안정복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이다. 따라서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면서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시대로 접어들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의 쇠퇴를 드러내면서 사상적인 갈등을 보였다. 이에 이단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참여를 통해 행동으로도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 권철신 등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그 이단성을 경계하였다.
이어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리의 이단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경계시켰다. 따라서 안정복의 역사상의 위치는 성리학의 전통이 내재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대외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안정복은 이 시기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近畿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보다는 학문적·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안정복의 학문적인 성과는 많은 저술로 나타났다.
안정복의 저술은 20여 편이 전하며, 『잡동산이(雜同散異)』나 『사론(史論)』 등은 일정한 형식을 갖춰 정리된 저술은 아니지만, 안정복의 경학관이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