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山先生 이야기
柳 賢 佑
안동(安東)은 학자의 배출에 있어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지역 유림들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칭하고 스스로 추로의 선비라 일컬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이들은 동족(同族)끼리 문호를 이루고 각각 조상의 지위와 명예를 자랑삼으며 세거(世居)해 왔다.
안동의 수많은 명문벌족 중에서도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靑溪)가문이 단연 돋보인다. 퇴계학(退溪學)은 크게 서애(西厓)학맥과 학봉(鶴峯)학맥으로 나뉘어 경쟁하며 발전했다. 퇴계학의 한 축인 학봉학맥은 김성일(金誠一)에게서 경당 장흥효(張興孝)-갈암 이현일(李玄逸)-밀암 이재(李裁)-대산 이상정(李象靖)-손재 남한조(南漢朝)-정재 류치명(柳致明)을 거치며 찬란히 꽃피웠고 그 맥이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 전해졌다.
퇴계로부터 이어진 도학(道學)의 맥을 전수받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 ~1899)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11대 종손(宗孫)이다. 그는 19세기 지식인으로 시대적 변화에 대한 많은 고민을 안고 학문에 몰두했다. 西山에 대한 세인(世人)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초략)당시 영남유림을 대표할만한 거유가 金興洛 ․ 張福樞 ․ 李震相 세 사람이라고 한다.이 세 사람은 어느 분이 더하고 덜하다는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하다. 실례되는 일이겠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도덕‧군자적 측면에서는 張福樞가 한 수 위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李震相이 가장 돋보이며, 위명과 법도 면에서는 金興洛이 단연 최고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과 학식을 가진 선비라 할지라도 金興洛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선비로 떳떳하게 행세를 못했을 정도로 영남학파에서 그의 위치는 대단했다.(후략)』(매일신문 영남학맥<150> 중에서)
이렇듯 영남학파에서 西山의 위상은 시대를 풍미했다. 명성이 높은 만큼 그와 관련된 일화도 많이 전해온다. 筆者는 19세기 영남유림의 종장(宗匠)인 西山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학자로서의 西山은 이미 정평이 났다. 그러나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家長)으로서, 가문을 이끄는 종손(宗孫)으로서의 西山은 어떤 모습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Ⅰ]
어느 날 모선비가 검제종택(金溪宗宅)에서 하루를 묵었다.
새벽닭이 울 즈음 선비는 대문 밖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대문 밖에서는 가문의 주손(冑孫)인 서산과 밋젓(멸치젓)장수와 흥정이 붙었다. 영남의 대학자가 새벽에 상인과 흥정이 붙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내륙인 안동에서는 해산물을 맛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음식에 맛을 내기는 밋젓이 최고다. 그러나 구한말은 모두 가난하여 밋젓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로부터 의성김씨 청계가문의 경제력은 이름이 났다. 안동지방에서 부자로 유명한 검제종택엔 큰 장사치가 종종 들리곤 했다. 영덕의 밋젓장수는 검제마을 부잣집 하나만 보고 가랫재와 황장재 고개를 넘어 300리 길을 왔다.
그러나 정작 서산은 밋젓을 보자마자 안 산다며 몸을 돌이킨다.
"나리. 왜 그러십니까?"
"밋젓이 상했네. 그건 먹지도 못하는 물건이야."
"아닙니다요. 아주 자알 익었습니다요."
"일 없네. 다른데 가서 팔게."
"그러지 마시고 한 단지에 100냥 받아야 하는데 80냥만 주십쇼."
"안 사네."
"그럼 70냥만 주십쇼. 밑지는 겁니다요."
"안 사네. 다른데 가서 알아보게."
밋젓장수도 큰 손해 보면서 팔수는 없었다. 내렸던 짐을 다시 꾸리는데,
"짐도 무거울 텐데. 60냥에 주고 가게."
그는 생각했다. 온 거리도 만만찮았지만 다시 그 짐을 지고 되돌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까마득했다. 결국 밋젓장수는 60냥을 손에 쥐고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조금 있으니 산과 토지를 경작하는 산지기가 엽전을 몇 자루 지고 왔다.
“어르신. 도지(賭地) 가져 왔니더.”
그러자 서산은
"어이. 수고했네. 그곳 마루에 올려놓고, 한 자루는 도로 가져가게."
하며 선뜻 거금을 그에게 쥐어줬다. 사내는 싱글벙글하며 돈 한 자루를 지고 돌아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선비가 서산에게 물었다.
"밋젓장수는 야박하게 하면서, 산지기한테는 어찌 그리도 후하게 대하시오?"
“치산(治産)일세. 우리 땅이 군데군데 좀 많지 않은가. 저 사람이 산을 관리하고 선조의 묘소도 관리해 주고 있네. 열성적으로 돌봐주니 돌아가신 할배들이 후손한테 음덕을 내려 주시잖나. 이보다 더 고마운 게 어디 있겠노. 밋젓장수한테는 좀 미안키는 하지. 그러나 재산이 조금 있다고 흥청망청하면 안 되네. 항상 없을 때를 생각해서 아끼고 절약해야 되네.”
*박약회 대구지부/ 유학과 현대 기고글 2017년 18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