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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정도지역의 한국기독교 초기 선교 유적지 일대

작성자이순자|작성시간09.07.15|조회수391 목록 댓글 0

서울의 정도지역의 한국기독교 초기 선교 유적지 일대
  2007/11/22 11:47
화평      조회 162  추천 0
 

서울의 정도지역의 한국기독교 초기 선교 유적지 일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Ⅲ.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


위치 :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 소재.

기독교대한감리회 중구 용산지방 소속교회.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10월 9일 최초의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아펜젤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885년 배재학당에서 근대 교육을 실시한 아펜젤러는 그 2년 후에 한국인들의 예배만을 위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배재학당 동쪽에 1887년 9월에 대지를 매입하고 그 안에 있던 한옥집을 개조하여 임시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예배당을 처음에는 벧엘예배당이라고 불렀으며, 1897년 정동문화재예배당을 건축할 때까지 10년 동안 이곳에서 예배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처음 벧엘예배당과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의 위치가 같을까? 최근 <기독교사상> 1997년 6월호의 이덕주 목사의 “‘근대화의 요람’ 정동 이야기(5)”에 의하면 벧엘예배당의 처음 위치가 정동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벧엘 예배당의 처음 위치


아펜젤러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감리교회를 시작한 것은 1887년 10월 9일이다. 언더우드가 정동 자기 집 사랑방에서 장로교회를 시작한 지 열흘 만이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시작한지 1년만에 학생 개종자를 얻어 1887년 7월 24일, 박중상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온 최성균(崔成均)을 매서인으로 채용하였다. 아펜젤러는 ‘서울 남쪽’에 집 하나를 마련하여 매서인의 살림집 겸 개종한 학생들의 성경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이 집을 벧엘 예배당(Bethel Chapel)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첫 예배에 대해 아펜젤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10월 9일 주일, 성경사업을 위해 산 집 벧엘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지난 주 만주 봉천에서 온 로스 목사가 한국인 교인 두 사람을 데리고 이곳을 방문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자기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한 한국인이라고 추천해서 두 번째 매서인으로 채용하였다. 그날 예배에는 한국인 네 명이 참석했는데, 매서인 두 명과 강씨, 그리고 최씨 부인이다. 최씨 부인은 구도자로 진리를 믿고 있다. 우리는 사방 8피트되는 방에 한국식으로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내가 영어로 개회기도를 하고, 함께 마가복음 1장을 읽은 후 강씨가 마감 기도를 하였다.”(H. G. Appenzeller's Diary, 11th, Oct., 1887)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인 10월 16일, 매서인 최성균의 아내로 추정되는 최씨 부인이 벧엘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바로 한국 최초 개신교 여성 세례교인이다. 그리고 다시 한 주일 후 10월 23일,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인 6명이 감리교 예문에 따른 첫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다 보니 다섯 평도 안되는 조그만 방에 열 명이 넘는 교인이 앉기도 힘었거니와 남녀가 한 방에 모이는 것이 외부에 시비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12월 초, 처음 집 옆에 크기가 배 되는 방(8*16피트)을 구입해서 방 가운데 휘장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새 벧엘 예배당’에서 거행된 그 해 성탄절 예배 때 아펜젤러는 처음으로 통역없이 한국말로 설교하였다.

이처럼 한국 감리교회 예배와 성례가 시작된 곳이자 정동제일교회의 요람이 된 ‘벧엘예배당’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벧엘 예배당이 설립된 10년 후인 1897년 12월 26일,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이 봉헌될 때 아펜젤러가 읽은 ‘교회 약사’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유랑민처럼 이러저리 옮겨 다녔습니다. 10년전 벧엘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집은 지금 스크랜튼 대부인 소유인 달성 주택 뒷문에서 돌을 던져 닿을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1888년 내가 지방에 나간 사이에 포교금지령이 내려 벧엘은 폐쇄되었고 지금은 한국 사람 소유가 되었습니다.”(The First Methodist Episcopal Church, Seoul, Korea, read at the dedication Dec., 26, 1897," H. G. Appenzeller's Diary)


벧엘 예배당의 위치는 “스크랜튼 대부인 소유인 달성 주택 뒷문에서 돌을 던져 닿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97년 당시 스크랜튼 대부인이 살던 달성 주택은 남대문 상동 부근이었다. 1893년 앋르이 “민중이 있는 곳을 찾아서” 병원을 남대문 상동으로 옮기자, 대부인도 이화학당을 젊은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1894년 봄 상동으로 집을 옮겼다. 상동에는 이미 1889년에 사서 맥길(W. B. McGill)이 병원을 하던 집이 있었다. 남대문 길 남쪽, 지금 상동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남창동 1번지 일대다. 그러나 1893년 휴가를 다녀온 스크랜튼 가족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은 남대문 길 북쪽에 있던 ‘달성위궁’(達城尉宮) 자리(지금의 남대문로 3가 한국은행 본점 일대)였다. 본래 이곳에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이 살던 집이 있어 송현궁(松峴宮)이라 했다가 후에 저경궁(儲慶宮)이라 했다. 따라서 스크랜튼 대부인이 구입하여 주택 겸 교회로 사용하게 된 ‘달성위궁’은 저경궁의 다른 이름이거나 저경궁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상동교회의 처음 이름이 ‘달성회당’이었다).

따라서 벧엘 예배당이 스크랜튼 대부인의 ‘달성 주택’에서 “돌을 던저 닿을 곳”(길게 보아야 30미터)에 있었다면, 그곳은 아무리 넓게 보아도 남창동-북창동-소공동 범주를 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상동에서 직선 거리고 1,000미터 이상 떨어진 정동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양주삼 목사도 “故 아펜젤라 牧師의 略歷”이란 글에서 “그 해(1887년) 九月에는 南大門 안 近處에 祈禱處를 設立하였는데 그것이 長成하야 貞洞第一 禮拜堂이 되었으며” (<감리회보> 1935. 4.10, 30쪽)라고 하여 벧엘 예배당의 위치가 “남대문 안 근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벧엘 예배당이 있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의 봉헌


1887년 10월 9일 남대문 ‘달성 주택’ 부근에서 시작된 벧엘 예배당 집회는 1888년 5월 정부에서 내린 포교금지령과 뒤이어 일어난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다. 1888년 가을부터 남자들은 정동의 아펜젤러와 존스의 집에서, 여자들은 스크랜튼 대부인 사택에서 따로 은밀하게 예배를 재개하였으나, 이 예배에는 선교사들과 배재와 이화학당 학생들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후 1889년 12월 선교사들은 정동구역회를 조직하면서 주일예배를 재개하되 ① 남자와 여자가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② 가급적 찬송은 부르지 말고 ③ 찬송을 할 경우엔 가사만 읽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자집회는 배재학당과 시병원, 여자집회는 이화학당과 보구여관에서 각각 드려지기 시작하였다.

1892년에는 매주일 두 곳에서 모이는 집회인원이 200명을 넘게 되었다. 이에 집회장소의 마련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893년에 시병원이 상동으로 옮겨간 후 빈 건물을 사용하게는 되었으나 100명 이상이 한꺼번에 모이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1894년 12월 정동의 남녀 교인들이 정식으로 “남녀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 교인들도 헌금하였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이 학생의 신분이었으므로 기대할만한 헌금이 모금되지는 않았지만 그 건축 의욕만은 대단하였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인 이귀동은 자기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아서 헌금을 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8천 달러가 넘는 건축비는 대부분 아펜젤러가 미국에서 모금해 왔다.


아펜젤러는 예배당을 서양식으로 짓기로 하고 미감리회 교회확장국(Board of Church Extension)에서 발간한 1894년판 《교회설계 도안집》에 나오는 “25번 도안”을 골랐다. 미국 북동부에서 유행하던 전형적인 조지아 고딕 양식이었다. 미국에서 설계도안이 들어오고 건축에 조예가 있던 맥길이 원산에서 올라와 감독을 맡았으며, 건축 실무는 심의섭(沈宜燮)이 맡았다.

1895년 8월 7일, 옛 시병원 건물들이 헐렸고, 9월 9일 정초식에는 법무대신 서광범이 와서 축사를 하였다. 건축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1896년 지붕을 덮었고, 1897년 가을에 건물 골격을 갖추어 그해 10월 3일부터 새 예배당 안에서 주일예배를 드렸고, 12월 26일 봉헌예배를 드렸다.

이로써 비록 가운데 휘장을 치기는 했으나(휘장은 1910년대 중반에 철거), 남녀가 ‘한 지붕 아래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주일이면 북쪽 문으로는 이화학당 학생들과 여성들이, 남쪽 문으로는 배재학당 학생들과 남성들이 줄을 지어 들어와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는 줄지어 나갔다. 당시 이 정동예배당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자유공간이었으며, 1898년 완성된 명동성당과 함께 서울의 명소가 되어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봉헌 당시 건물 규모를 보면, 신랑(身廊, nave)의 길이가 23미터, 넓이가 13미터에 양쪽 익랑(翼廊, transept)의 길이가 10미터, 넓이가 5미터로 합하면 1백평 규모였다. 신랑과 익랑이 교차하는 십자가 중심에 성찬용 제단을 설치한 것, 제단 뒤쪽으로 후진(後陣)과 후진랑을 둔 것, 교회 입구의 사각형 종탑을 설치한 것이 비록 변형된 형태지만 고딕 건물의 특징인 ‘삼랑식’(三廊式) 고딕양식을 취하고 있다. 부채꼴 아치형 창문을 사면에 내고 후진과 후진랑, 종탑과 동쪽 벽면 위쪽에 원형 장미창(薔薇窓, rose window)을 내 빛을 최대한 수용한 것도 ‘빛의 예술’로 불리는 고딕 건축의 특성을 보여준다.



정동 예배당은 이처럼 외형은 전통 고딕 양식을 취하면서도 내부 구조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중세 고딕양식의 특징인 높고 화려한 부채꼴 둥근 천장 장식(groin vault)이 없고, 아치형 기둥으로 구분되는 측랑(側廊, aisle)도 생략되었다. 따라서 의자도 없던 초기 예배당의 내부는 확 트인 강당 같았다. 후진 중앙에 강대상을 두고 그 아래 절제된 형태로 성찬 제단을 설치한 것에서 18세기 영국 비국교도들의 설교 중심의 예배당 양식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정동예배당은 외부적으로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고딕풍을 취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개혁교회 예배당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신앙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문화재 예배당은 1897년 완공 당시 모습과 많이 다르다. 우선 라틴 십자가 형태를 취하였던 건물 모양이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1916년에 예배당 북쪽 벽을 보수하면서 왼쪽 익랑 벽까지 넓혀 북쪽이 일자형이 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접어들어 교인 수가 1천 명 수준으로 늘자, 1926년에 남쪽 벽도 오른쪽 익랑 벽까지 넓혀 역시 일자형이 되었고 동쪽으로도 10자 늘여 증축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쳐 80여 평을 증축할 때, 양쪽 익랑이 없어져 ‘고딕건물’의 특징인 ‘삼랑식’ 형태가 사라진 것이다.


내부구조도 많이 변하여 우선 1918년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史)가 미국에 가서 강연하고 모금하여 구입해 온 거대한 타원형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면서 후진 중앙 부분을 완전히 가리게 되었다(이 오르간은 6․25 전쟁 때 파괴됨). 제단 부분도 확장하여 성찬대 영역을 넓혔고 중앙 강단도 높였다. 그리고 양쪽 벽면을 넓히면서 지붕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나무기둥들을 세운 것이 결과적으로 고전적 고딕양식에서 보이는 측랑처럼 되었다. 그러나보니 바깥 지붕의 모양도 삼각형이던 것이 고깔모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1977년에 사적 제 256호로 지정된 이 문화재 예배당에서 첫 예배당 당시의 유물은 강대상 뿐이다. 강단 오른쪽에 있는 이 강대상은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감리교 계통 가츠이(活水)여학교 설립자 러셀(E. Russell)이 기증한 것으로 강대 의자 세 개(한 개만 남아 교회 도서실에 보관되어 있음)와 함께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반육면체로 된 강대상에는 현란한 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전면에 한문으로 “專務傳道”와 “信望愛”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예배당 동쪽 벽면에는 쌍둥이 대리석판이 부착되어 있다. 같은 크기에 같은 모양인 이 돌판들은 1935년 4월 20일 부활절에 한국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왼쪽 것은 50년 전(1885년) 부활주일에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를 기념한 것이고, 오른쪽 것은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를 담임했던 ‘한국인 최초 신학자’ 최병헌(崔炳憲) 목사를 기념한 것이다.

이 돌판을 제막한 같은 날, 예배당 남쪽 뜨락에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사각으로 된 hgkrkddka 받침돌을 2단으로 쌓은 것은 한국 전통 탑의 기단 양식을 보여주나, 그 위에 세워진 검은 사각 비석은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과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 첨탑의 축소 모형이다. “한국감리교 선교 약사”가 국한문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비석 전면의 에서체 한문 글씨는 한말 법무 주사를 지낸 당대 서예대가 김돈희(金敦熙)가 썼고, 우측 영문 글씨는 주일학교 운동가 한석원(韓錫源) 목사가 썼다.

정동 문화재 예배당은 외부 어디에도 십자가 장식이 없어 동남쪽 모서리의 종탑마저 없었다면, 비숍의 표현처럼 영락없이 ‘궁색한’ 공장 건물과 같다. 종탑에 걸려 있던 종은 1902년 성서 번역차 목포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해 순직한 아펜젤러를 기념하여 미국에서 제작해 들여온 것인데, 이 예배당을 건축한 심의섭이 당시로서는 거금인 1백 원을 ‘종값’으로 내놓아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용케도 보존되다가 지금은 1979년에 완공된 ‘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당’ 현관에 안치되어 있다.


시병원(施病院)


감리교 선교사로 서울에 처음 온 사람은 1884년 6월 말에 들어온 매클레이였다. 그는 정동의 미국 공사관에 붙은 임시 거처레 보름동안 머물면서, 한국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 허가를 얻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공사에게 자신이 머물렀던 집의 구입 주선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 집은 그 해 9월에 들어온 장로교 선교사인 알렌의 소유로 넘어갔고, 그곳을 중심으로 장로교 선교부가 조성되었다.

1885년 아펜젤러에 이어 5월 3일 스크랜튼(W. B. Scraton)이 단독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의사였던 그는 알렌의 정동 집에 머물면서 광혜원(제중원)에 나가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독자적인 주택과 선교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미국 공사의 지원을 받아 구입한 집은 길 건너편 ‘서쪽’ 성벽 언덕 아래 있는 한옥이었다. 조선 말기 판서 벼슬을 했던 권명국의 소유였다가, 역시 판서 벼슬을 한 민지상이 살던 집으로 넓은 마당과 사랑채와 헛간이 달린 독립 가옥 두 채였는데, 1,800여 평에 달했다. 6월 28일에 일본에 남아 있던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의 어머니(M. F. Scraton)와 아내 등이 들어와 이 집에 짐을 풀었다. 성벽과 붙은 서쪽 집엔 아펜젤러 가족이, 그 아패 동쪽 집엔 스크랜튼 가족이 각각 자리잡았다. 이로써 ‘덕수궁 길 서쪽’ 언덕에 감리교 선교부지가 마련되었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바로 이곳을 기점으로 성벽에 막힌 서쪽을 제외한 동․남․북 세 방향으로 터를 넓혀가며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스크랜튼은 서울에 들어와 처음 6주 동안은 알렌을 돕다가 9월부터 정동 집 사랑채에서 환자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동쪽으로 붙은 집을 사서 내부수리를 한 후 정식으로 병원 문을 연 것이 1886년 6월 15일이다. 이 병원에서 치료한 첫 환자는 풍토병에 걸려 서대분 성벽 아래 버려졌던 여인이었다. 3주일을 정성껏 간호하여 회복한 여인은 그 후 ‘페티’(Pattie)란 세례명을 얻었고 이후 10년 동안 더 살며 선교사 집 일을 도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네 살바기 ‘별단이’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간호사가 되어 정동에 있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일하였다. 이처럼 스크랜튼의 병원은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었다.

병원 정문에는 한문과 한글로 쓴 방이 붙어 있었다.


“남녀노소 아모나 아모 병에 걸렸든지 아모 날이나 열점종에 빈 병을 갖고 미국 의사를 찾아오시오.”


스크랜튼은 환자들이 갖고 온 빈 병에 약을 담아주어, 그의 병원은 약을 나누어 주는 곳으로 통했다. 그래서 ‘시약소’(施藥所)로 불리었다. 스크랜튼의 한국 이름도 ‘시란돈’(施蘭敦)이었다. 나라에서는 1887년 스크랜튼의 병원에 ‘시병원’(施病院)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 보냈다.

그후 처음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스크랜튼은 1892년부터 병원을 남대문 안 상동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하였다. 당시 스크랜튼이 병원을 옮기려고 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1893년 선교보고에서 병원을 옮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병원이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많은 사람이 찾아올 수 있게 붐비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남대문 상동에 있는 병원이야말로 그 위치며, 주변의 교통량이며, 상주 인구수를 감안할 때 참으로 바람직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민중이 있는 곳인 반면에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주거지역입니다.”(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93)


첫째는 정동은 당시 외국인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그곳에 출입하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이 있는 곳으로”, 이것이 병원을 정동에서 상동으로 옮긴 이유였다. 스크랜튼에게 ‘민중 선교사’란 칭호를 붙이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바로 남대문 시장거리에서 ‘숯장수 전덕기’(全德基)를 만나게 된 것이다. 둘째는 그는 처음부터 서울에 ‘선한 사마리아의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과 같은 병원과 환자 수용소를 겸한 병원을 원했다. 그리고 셋째는 그가 경영하고 있던 시병원(정동병원)은 원래 한옥을 개조하여 시작한 병원인지라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어차피 새로 큰 병원을 세울 바에는 딴 곳에 병원을 지을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동에 처음 자리잡았던 스크랜튼과 그의 병원은 10년만에 자리를 옮겨 남대문의 상동병원과 통합하였다(1900년 상동병원은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예산 감축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어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과 다시 통합이 되면서 폐지되었고 그 자리에 상동교회의 붉은 벽돌 예배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병원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바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예배당인 정동교회 문화재 예배당이 들어섰던 것이다.


◈ 참고자료: 이덕주, “‘근대화의 요람’ 정동 이야기(3)(5)”, <기독교 사상> 1997년 4월호, 6월호 ; 《기독교대백과사전》





Ⅳ. 알렉 사택 터 (증명전 터)


위치 : 서울시 중구 정동 1-11 소재.

일본에서 활동을 하던 매클레이(M. S. Maclay)는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해 보라는 본국 선교부의 지시를 받고 1884년 6월 24일 서울에 들어왔다. 미국 공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였고, 7월 3일에 “학교와 병원 사업에 한해” 사업을 허락한다는 국왕의 허락을 받고 돌아갔다. 당시 매클레이는 보름 동안 서울에 머물렀는데 처음 며칠은 푸트 공사 사택에 머물다가 나중에 공사관측 주선으로 한옥을 빌려 지냈다. 공사관과 붙어 있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매클레이는 푸트에게 장차 감리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용할 수 있도록 매입을 부탁하고 돌아갔다.

그후 같은 해 9월 24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알렌(H. N. Allen)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미국 공사관측은 매클레이가 부탁해 매매가 끝난 공사관 옆집을 알렌에게 제공하였다. 넓은 마당에 방이 여럿 딸린 큰 규모의 기와집이 선교사의 사택이 되었다. 그러나 알렌은 언더우드와 헤론 등 뒤따라 들어온 다른 동료 선교사들과 잦은 의견 충돌을 일으키다가, 결국 1887년 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2년 후, 알렌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신분으로 정동에 귀환하였고, 1897년에는 미국 공사까지 되었다. 알렌이 살던 이 집에는 1886년에 들어온 간호사 앨러스(A. Ellers, 후에 벙커 부인)를 비롯하여 호튼(L. H. Horton, 후에 언더우드 부인), 헤이든(M. Hayden, 후에 기포드 부인), 도티(S. A. Doty, 후에 밀러 부인) 등 독신 여선교사들이 살았는데, 바로 이 집에서 오늘의 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정동여학당’이 시작되었다.

1887년 6월 앨러스가 제중원에서 다섯 살짜리 고아 ‘정네’를 집으로 데려와 가르친 것으로 시작된 정동여학당은 1895년 10월 서울의 동쪽 연지동에 새 교사를 마련하고 옮겨 갔다. 그리고 그 집을 덕수궁에서 사들여 헐고, 중명전을 건립한 것이다.


중명전(重明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53호. 조선 말기의 2층 건물.

1900년에 당시 경운궁(慶運宮)에 딸린 접견소 겸 연회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리나라에서 궁중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는 최초의 것 가운데 하나.

단순한 2층 벽돌집이지만 1층의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가 꾸며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이 자리는 경운궁 안 평성문(平成門) 밖인데 1906년에 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기도 하였고, 을사 5조약이 여기에서 조인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이 건물은 외국인에게 임대되어서 경성구락부(Seoul Union)가 되어 1960년대까지 외국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쓰여 왔다. 그러는 동안 1925년의 화재로 인하여 벽면만 남았던 것을 복구하였으므로 애초의 원형과는 현재 다소 달라졌다. 최근에까지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李方子)의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그 뒤 팔려 지금은 재일교포 실업인 경한주식회사 소유 임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 참고자료 : 이덕주, “‘근대화의 요람’ 정동 이야기(2)”, <기독교 사상> 1997년 3월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Ⅴ. 교육․문서선교의 요람, 언더우드 사택 터


위치 : 서울시 중구 정동 13-1번지 일대.

1885년 4월 5일에 내한한 언더우드의 사택은 알렌의 집과 붙은 곳이다. 지금의 정동 13-1번지 일대에 있던 900평이 넘는 넓은 집이었다. 큰 기와집 세 채가 딸린 저택으로 조선시대 정승을 지냈다는 ‘강노’(姜老)의 집이었다. 바로 이곳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1886년 7월 18일 국내 첫 개신교 세례가 노춘경에게 베풀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1886년 5월 16일, 고아 한 명으로 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경신학교의 시작이다.

이외에도 이곳은 여러 면에서 한국기독교사에 의미가 있는 곳이다.

1887년 2월 7일, 이곳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모여 성서 한글번역을 위한 ‘성서번역 상임위원회’를 조직함으로 오늘의 대한성서공회의 출발이 되었다. 1889년 6월 25일에는 선교사들이 모여 초교파적인 문서 출판기관으로 한국성서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오늘의 대한기독교서회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1889년 12월부터 두 달간 지방에서 올라온 토착 전도인들을 대상으로 ‘신학반’을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 장로교 신학교육의 출발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 사랑방에서 1887년 9월 27일 밤, 장로교회 최초의 ‘조직교회’가

지번

넓이

소유주(괄호 안은 매입 연도)

비고

1-11

820평

알렌(1884)→덕수궁(1897이전)→이방자(1969)→경한실업주식회사(1976)

정동여학당 터, 현 중명전(현재 서울센터 정동빌딩)

13-1

934평

언더우드(1885)→국가(1902)→미감리회여선교부(1910년 이전)→이화학원(1971)

새문안교회 터, 현재 예원여중 운동장

1-9

3,977평 일부

헤론(1885)→빈톤(1891)→덕수궁(1902)→이왕직(1937)→미국대사관(1959)

현재 미국대사관영내

29

1,184평

기포드(1888)→손탁(1896)→이화학당(1920)

손탁호텔 및 프라이홀 터, 현재 공터

30

237평

언더우드(1890년이전)→덕수궁(1897)→이왕직(1911)→이화학당(1920)

예수교학당 터, 현재 공터

31

591평

언더우드(1890년이전)→덕수궁(1897)→이화학당(1913)

예수교학당 및 시종원 터, 현재 심슨 홀

1-45

1,433평일부

마펫(1890)→덕수궁(1897)→이왕직(1911)→유하학원(1957)→이화학원(1961)

현재 예원여중 교사


창설되었으니 한국 장로 교회의 모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기독교의 초기 역사가 시작된 이곳 언더우드의 정동 주택은 정부쪽에서 매도할 것을 요구해 3년 협상 끝에 1902년 덕수궁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들어서 ‘이왕직’ 소유가 되었다가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에서 구입하여 서양식 건물을 짓고 독신 여선교사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Gray House'로 불린 이 집은 해방 후에도 계속 사용되다가 1977년 예우너여중 운동장으로 변하였다.

언더우드보다 두 달 늦게 들어온 헤론도 언더우드 집 뒤쪽으로 공사관과 담을 같이 쓰는 한옥을 마련했다. 지금의 정동 1-9일대인데, 집 뒤쪽 언덕으로 넓은 과수원이 있었다. 헤론은 1890년 7월 이곳에서 별세하였고, 1891년 4월에 들어온 빈튼(C. C. Vinton)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이 집도 1902년 덕수궁 소유로 넘어갔다가 해방 후 1959년에 미국 대사관 측에서 사들여 지금은 맘놓고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1890년 1월에 들오온 마펫(S. A. Moffett)도 언더우드의 집 북쪽으로 러시아공사관 사이에 있는 집 한채를 마련하였다. 지금의 정동 1-45번지 일대이다. 그러나 그는 3년만에 평양 개척 선교사로 임명받아 평양으로 떠났고, 그가 살던 집은 덕수궁에서 사들여 황화사(皇華舍)가 설치되었다. 해방 후 1953년에 이화학당에서 이 땅을 사들여 1963년에 5층짜리 건물을 짓고 예원중학교 교사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 정동지역 장로교 선교부지의 변화

(이 덕주, “근대화의 요람 정동이야기(2)”, <기독교 사상> 1997년 3월호, p. 264)


◈ 참고자료 : 이덕주, “‘근대화의 요람’ 정동 이야기(2)”, <기독교 사상> 1997년 3월호       ; 《기독교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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