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삶의 이야기들

전북 김제 모악산과 금산사 탐방

작성자벽초(朴魯鶴)|작성시간18.09.05|조회수308 목록 댓글 1

              모악산과 금산사를 찾아서


                                                                                     碧草 /朴魯鶴


 

 20 여년전 모악산을 올라본 이후로 참 긴 세월이 흘러버렸다.

 다시 한 번 그 모악산과 금산사를 찾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나를 찾아온 까닭은 「태조

왕건」이라는 사극 다르마에서  아들 신검과 적이 되어야 했던 견훤왕의 생애가 가슴을

쓰리게 했으며  문경시 가은읍 금하굴을 탐방하고나서부터 견훤이라는 인물은 바로

문경출신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관심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에는 그저 무심하게 금산사를 스쳐지나기만 했지만 역사탐방을 하다보니 새롭게

금산사를 탐방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않을 필자의 삶을 생각하면  이웃 산악회에 참가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몇 번이고 다녀온 산을 또 가야한다는 것은  아직도 탐구하

고싶은 곳이 너무나 많은 나로서는 어쩜 시간 낭비일 것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018년 9월 2일 8시경에 집을 나선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쉬어가기는 했지만 근 3시간 만에야 금산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모악산부터 오르기 시작하니 11시 반경이다.

 


◈모악산(금산(金山), 母岳山)

 높이 794m이다.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선각산·국사봉 등이 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이라고 했다.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다.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계류는 구이 저수

지에 흘러든 뒤 삼천천을 이루어 전주시로 흐른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두월천·원평

천은 동진강에 흘러들며, 김제 벽골제의 수원이 된다.

모악산 정상  방송 중계탑이 있는 곳이다.

모악산에 오르는 중도에 있는 6각정 모악정이다.

8각정은 자주 보는데 6각정은 본적이 있었던가?



  20여년 전에는 송학사쪽에서 올라 금산사로 하산을 했는데 오늘은  승용차로 인해

금산사 원점회귀산행을 한 것이다.

방송공사에서만 사용하고 일반인들은 활용할 수 없는 케이블카 승강장 건물앞에 피어

있는 노란 상사화 - 다 타버린줄 알았던 그리움이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야 잠을 깨는가?


등산로 주변에 곧게 자란 편백나무 숲길 - 무더운 날씨였지만 그야말로 산소공급을 충분

히 마시고 산행할 수 있어 얼음골에 온 기분이었지.


◈ 금산사


수도에 정진하시다 열반하시고 남겨진 사리탑, 그리고 마멸된 비문을 살펴보자니

세월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미륵전인데 건물 양식이 매우 예술적이다. 법주사의 팔상전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건축

양식인 듯하다.


 1971년 12월 이 산과 주변지역 일대를 포함한 총면적 42.22㎢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

다. 서쪽 기슭에 금산사가 있으며, 그 경내에는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노주(보물

제22호)·석련대(보물 제23호)·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보물 제28호)·대장전(보물 제827

호)·석등(보물 제828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또한 금산사의 출입구이기도 한 홍예석문은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절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귀신사에는 대적광전(보물 제8

26호)·3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그밖에 대원사·심원암·수왕사

등도 자리하고 있다.

지명이름이 금산이라 주변에는 금광이 있었으리라는 지명유래적인 해석이 가능한 곳이다.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는 백제시대(600년)에 창건한 절로, 766년에 이 지방 출신의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크게 중창하여 대(大)가람이 되었다. 920년경에는 후백제왕 견훤(甄萱,

 재위 900∼935)의 원찰이 되었고, 주변에 금성(芩城, 혹은 금산산성)을 쌓아 성문의 일

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커다란 나무 물고기가 보이시나요?  이것을 목어라고 하는데 불가에서는 물속 세계를

상징한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이 목어를 자세히 살펴보았답니다.


 기록에는 이자개는 원래 이씨였다고 하니 그의 아들 견훤의 성도 이씨였으나 견씨로

바꾼 것이라는 말이되는 것이다.

견훤은 전주 견씨의 시조이고 그의 부친인 아자개는 항간견씨의 시조이니 황간견씨나

전주 견씨는 동일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후백제왕 견훤릉



 후백제의 왕 견훤(?~936)의 능으로 전한다 견훤은 상주 가은면(尙州 加恩麵) (현재 문경시 가은읍) 사람의 아자개 의 아들이라 한다.


서기 900년 완산(현재 완주군 전주시 지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을 세워 한때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아들 신검과 내분으로

인해 서기 936년후백제 는 고려에 멸망하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서 수일 후에 황산불사(黃山佛寺)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은진   조에는  견훤 의 묘는 은진 현 의  남쪽12 리에

 떨어진 풍계촌(風界村)에 있는데 속칭 왕묘 왕촌 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종시

유언으로  완산이  그립다 하여 이곳에 무덤을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 맑은 날에는  멀리

전주 모악산이 보이기도 한다.  무덤은 약 10m  높이5m  크기 규모 인데 1970년 견씨

문중에서 후백제왕 견훤릉(後百濟王 甄萱陵) 이라 비를 세웠다 .



◈ 견훤에 관한 다음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견훤

견훤의 생애는 극과 극을 달린, 비극의 파노라마

견훤을 기리는 영산제가 오늘날에도 열린다. 그의 무덤이 있는 충남 논산시가 주관하는 행사이다. [삼국사기] 견훤전에서는, “황산 절간에서 세상을 떠나니 9월 8일이었다.”라고 적었는데,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즈음하여 행해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산 절간’이 연산면의 개태사이고, 완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견훤의 유언에 따라 연무읍에 무덤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 견훤은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살아 있는 백제의 마지막 영웅이다. 그런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니 먼저 두 가지 에피소드가 앞을 막는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강보에 싸여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고, 어머니는 밥을 나르러 갔었다. 아기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과연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해지고 특이했으며, 기개가 호방하고 범상치 않았다.” - [삼국사기]에서

한마디로 견훤은 호랑이가 젖을 먹여 키운 아이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정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왕께서 연로하셔서 군국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섭정하게 되었다고, 여러 장수가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때 노래 하나가 유행했다.
가엾은 완산 아이가/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 [삼국유사]에서

아들 신검과 갈등 끝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장면이다. 호랑이가 키운 아이는 어느덧 가엾은 완산 아이가 되어 눈물짓는다. 그 사이가 너무 멀어 보이는 만큼 견훤의 생애는 극과 극을 달려온 비극의 파노라마였다.


견훤의 탄생을 설명한 [삼국유사]의 한 부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sy_002r_0010_0220_0010)


후백제를 세운 견훤,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였다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항하여 후백제를 세웠지만, 뜻밖에 그의 평생 라이벌은 신라가 아닌 고려 태조, 왕건


신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포석정이다.
<출처 : Kokiri at ko.wikipedia.com>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견훤이었다. 892년, 신라 진성여왕효공왕

왕건이 후발 주자로 나섰다. 918년, 철원에서 궁예대야성경순


견훤의 기세는 다하였고, 결국 금산산 불당에 유폐되어

견훤은 929년 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왕건이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견훤의 기세는 여기가 끝이었다. 점차 힘을 키운 왕건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932년, 견훤의 신하 공직(龔直)이 왕건에게 항복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견훤이 그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다 불로 지져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렸지만, 물이 새는 조직을 강화하려는 이 극단적인 조치는 도리어 부하들에게 공포심만 조장하였을 뿐이었다. 그 이후 견훤 밑을 떠나는 부하 장수는 줄줄이 나왔다.

견훤의 결정적인 패착은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물려주려 한 데 있었다. 금강보다 위인 신검∙양검∙용검이 이를 알고 이찬 능환(能奐)과 함께 모의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가엾은 완산 아이라는 노래가 불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라이벌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고, 아들을 적이라 부르는 신세가 되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석 달 동안 갇혀 있었다. 6월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절에서 도망친 견훤은 왕건을 찾았다. 지난날의 라이벌에게 생애의 마지막을 의탁하러 간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라 하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견훤은 왕건에게 반역한 자식을 죽인다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노라 말하였다. 지난날의 적에게 의탁하여 이윽고 제 아들을 적이라 부르는 신세가 된 견훤. 그것으로 권력의 비정함을 설명하자면 좋은 소재가 되겠으나, 한 사람의 생애로 보자면 지극히 비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왕건은 신검이 남에게 협박을 받아 분수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하면서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울화병으로 등창이 생겼다. 견훤의 사망 원인은 그것이었다. 비참의 극치이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위리안치 되었던, 김제의 금산사.



편지로 싸운 왕건과의 일전

사실 견훤의 생애가 포악과 비참으로 그려진 데는 고려시대에 와서 정리된 역사의 기록이 다분히 왕건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차피 패자는 역사의 역적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견훤은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시대의 영웅으로 왕건과 패권을 다툰 그의 생애는 꿋꿋하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왕건과 편지로 일합을 겨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족하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한갓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계략으로 넘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략하고 있소. 그러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했소. 초겨울에는 도두 색상(索湘)이 성산 싸움에서 손이 묶였고, 이달에는 좌장군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햇볕에 쬐었소. 죽이고 얻은 것이 많으며 쫓아가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음을 보아, 강약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승패도 알 수가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 [삼국사기]에서

한마디로 기고만장한 글이다. 자신의 쇠털 하나 뽑아가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를 넘보느냐고 깔본다. ‘해골을 햇볕에 쬐였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그 살기에 흠칫 몸서리가 쳐지기도 한다. 결론은 분명하다. 이제 곧 북쪽을 평정하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그 말끝에, ‘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비유가 재미있다. 장수다운 기개가 넘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왕건 또한 이에 질 수 없었다. 비록 싸움에서 밀리고 있지만, 여기서마저 물러설 수 없었고, 여러모로 분위기는 자기 쪽으로 유리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던 터였다. 왕건의 답장 가운데 한 구절을 보자.

“그대가 처음에는 상대를 가볍게 여기고 버마재비가 수레바퀴에 버티려는 것 같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깨닫고 물러서는데,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 같았소. 두 손을 모으며 사과하고 하늘을 가리켜, ‘오늘부터 영원토록 화친하겠소. 만약 맹세를 어기면 귀신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라고 맹세했소. (중략) 그런데 맹세한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흉포한 군사가 다시 일어날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했겠소. (중략) 나의 원한은 신라의 왕이 돌아가시자 극에 달했소. 나는 해를 돌이킨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달려갔으며, 개와 말 같은 충성을 펼쳐 다시 군사를 일으킨 지 두 해가 되었소. 육지에서 싸울 때엔 우레같이 내닫고 번개같이 빨랐으며, 바다에서 싸울 때엔 범같이 치고 용같이 뛰어올랐기에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했고 일어서면 헛됨이 없었소. (중략)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 [삼국사기]에서

왕건이 보낸 답장은 훨씬 부드러우면서 자신의 의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의리에 맞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신라 왕이 지지해 준 것처럼, 명분은 이미 결정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사실 견훤이나 왕건이나 진중의 문장가의 손을 빌려 썼지만, 그들의 성정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글이다. 항우 같은 패기의 견훤이라면, 유방 같은 온유돈후함의 왕건이다. 끝내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겼지만, 두 사람은 10세기 경 우리 역사를 풍요롭게 한 개성으로 가득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려 태조 왕선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 [삼국사기]옥산서원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sg_050_0030_0280)


편파적인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는 견훤의 다른 면을 전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왕건과 비교하면, 견훤에 대한 고려시대의 평가는 일방적이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견훤에게 붙여 색다른 그의 모습을 부각시켜 놓고 있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후백제와 견훤’ 조를 만들어 견훤의 생애를 썼는데, 내용의 대부분은 [삼국사기]를 인용했으나, 완산 아이 노래와 함께 그의 탄생담을 따로 덧붙였다. 두 에피소드가 모두 견훤이라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적실하다. 전형적인 야래자(夜來者) 설화의 형태를 띤 이 탄생담은 영웅의 기구한 일생을 알리는 서막과 같다. 유학자의 시각으로 본 패역한 반역의 무리와 다른 견훤의 생애가 거기에 있다


이 광주 북촌이라는 지명의 설화는 문경시 가은읍 금하굴의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다.

언젠가 필자가 가은읍 금하굴을 탐방한 사진이다.


삼국사기 열전 견훤전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출생지라고 전하는 갈전 아차마을의 부유한 가정에  과년한 외동딸이 있었다.
밤이 되면 미소년이 나타나 처녀와 동침을 하기를 수개월.
처녀는 배가 부르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부모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부모는 딸에게 미소년이 오거든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어 매라고 일러놓고는
다음날 실오리를 따라가니 금하굴로 들어간지라 굴 속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

몸에 실이 감기어 있었다.
10개월이 되어 처녀가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가 후에 견훤이라고 전한다.
그 후 굴에서 금빛을 발하고 풍악소리가 들려 금하굴이라 불렀다.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설화라고 해두기로 한다.


  견훤이 넷째아들인 금강을 후계자로 지목하자 장남 신검을 비롯한 세아들이 반발해
아버지인 견훤을 권좌에서 내쫒고 금산사로 유폐시킨 내용을 담고있으며 이후 견훤이
고려로 탈출하는 과정까지를 그려낸 드라마 「왕건」의 장면이 아직도  가슴에 짠하다.

 견훤의 부인은 상원부인과 남원부인이 있었고 아들은 모두 8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넷째아들 금강은 상원부인의 소생이라 하는데 이름의 돌림자가 세 분의 형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으니 어쩌면 남원부인의 소생인지도 모를 일이고  맏이인 신검을 태자로
삼지않고 넷째인 금강을 편애한 부정이 부른 화가 아닌지는 모르겠다.


 수많은 산을 올라본 사람으로 모악산은 그리 매력적인 산은 아니지만 정상에서 바라다

뵈는 풍경은 너무도 아름답다.



멀리 전주시가지가 바라보인다.


내륙지방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만경평야의 드넓은 들판, 한줄기 스쳐지나는 바람노래,

살아았기에 나는 이렇게 산을 오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농장으로 떠날시간이라 줄여야만 한다. 후일 기억을 떠올리기 위하여 막마구 갈겨둔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벽초(朴魯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9.07 .모악산 장군봉 자락에는 김일성의 32대조 김태서의 묘소가 있답니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입니다. 하긴 말이지요. 전주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분파했다고 알고 있어요.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