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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기사]]"난 10년 전의 내가 아니고, 10년 후의 난 지금의 내가 아니오" -시인 고 은-

작성자애니그마|작성시간09.08.24|조회수9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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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8.24 02:57 / 수정 : 2009.08.24 08:09

연작시 '만인보' 탈고한 시인 고은
박정희 전(前)대통령 중요한 시대적 역할해… 당시 투쟁의 잣대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어
김대중 전(前)대통령 정밀한 기계같은 분… 창파(蒼波)의 삶이었고 태산의 죽음이라 할수있어

고은(高銀·76) 시인은 보드카 한병과 술잔을 직접 들고 왔다. "카자흐스탄에서 막 부쳐왔는데 한잔씩만, 그냥 수줍어서." 대낮인데 수작(酬酌)을 붙였다.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의 전원주택 마당에는 개 3마리가 있었고, 서재에는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책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전 '만인보(萬人譜: 만인의 족보)'를 탈고했다. 1986년부터 시작해 23년간 3800여명의 인물 스토리를 시로 쓴 것이다.

―그 많은 인물을 노래해 무얼 추구하려고 한 건가요?

"역사책에는 가진 존재만 나오나 무명씨(無名氏) 같은 이들도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았지요. 인간이 살다 가는 것은, 바람 한점 왔다가 가는 것이나 귀뚜라미가 울다 찬바람 불면 사라지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가졌으니까, 그 흔적을 축약해 간직할 수 있고, 그 사람이 살았던 자취를 재생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더 살아야 하는데 더 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기록을 남겨 더 살려 줄 수 있고요."

고은 시인 자택의 1층 서재.
―시집 30권의 방대한 분량인데, 실제 이를 사서 읽는 독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문학에 시장(市場)이 개입되는 시대인데, 난 거기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말라르메(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의 시집 '목신의 오후'는 생전에 단 30부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시의 역사에 한 점을 남겼지요. 얼마나 팔리고 읽히는 시장의 잣대에는 난 관심이 없습니다."

―시집이나 문학작품이 팔려야 인세(印稅)가 들어오고, 인세가 들어와야 작가들은 생활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시만은 무상(無償:대가 없음)으로 쓰고 싶어요. 시는 본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살면서 문학을 생계에 직결시켜본 적이 별로 없어요. 길가다가 술을 만나듯이, 밥도 만나는 거지요."

―이런 말씀 하시면 후배 작가들이 다 들고일어납니다.

"물론 난 이전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고, 지금은 그렇게 살 수가 없죠. 함민복이라는 시인이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긍정적인 밥>'이라고 했지요. 아주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인데, 거꾸로 말하면 지금 모든 시인들이 시를 써 살 수 없다는 반증이지요. 나도 지금 살고 있는 시인들의 아픔이나 소외가 걱정 안 되는 바는 아니지요. 그러나 나 자신에게만 볼 때는 그렇지 않다는 거지요. 저는 백지(白紙)로 살아왔습니다. 환속(還俗)한 이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돌면서 빈손으로 살아온 것이지요."

―그때는 빈손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살고 계시니 지키고 싶지 않습니까?

"지킬 것이 무엇 있습니까?"

―가정도 있고 전원주택과 녹색의 잔디도 있는데.

"허…."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갇혔을 때 '만인보'를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방은 창문 없이 전구 하나 달랑 매달려 있었어요. 그 불이 꺼지면 깜깜한 사진 암실 같았지요. 꽉 막힌 커다란 관(棺)에 내가 입관되어 있는 느낌이었지요. 생존 가능성은 불투명하고. 내가 그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추억하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지요.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내가 만난 사람들,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따져보니 '만인보'는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계가 있군요.

"그러네요. 김 전 대통령은 정승화 장군(12·12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된 육군참모총장)이 있었던 감방, 나는 김재규(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중앙정보부장) 방에 같이 갇혀 있었지요."

―'만인보' 시집 안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오지요?

"시에 나오는 것은 1970년대 모습이었지요. '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했는데,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 '준비된 대통령'이란 구호가 나오데요."

―그 시절 맞서 싸웠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당시 체제와 반체제의 관계는 즉물적(卽物的)이었지요. 미우면 미운 겁니다. 지금은 그 감정이 다 없어졌죠. 그건 '해답'으로 끝났으니까."

―무슨 '해답'을 말하는 겁니까?

"죽었으니까요. 죽은 뒤의 평가는 그와 싸울 때와는 당연히 다르지요. 박정희가 집권해서 그전까지의 보릿고개, 황달에 걸린 것 같은 노란 얼굴색이 없어졌죠. 그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소위 산업화 시대라는 것이죠.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고… 오늘날을 만든 것이죠. 근대화의 결실을 맺었지요. 그 당시 우리가 싸웠던 유신체제의 저항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어찌 변절한 느낌이 좀 듭니다.

"아니요. 박정희라는 인간을 크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된 거죠. 세월이 흐르면 지지도 변하는 겁니다. 변(變)은 참 좋은 겁니다. 변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입니다. 내가 있던 환경도 바뀌었지 않습니까. 나는 10년 전의 내가 아니지요. 우리 다 그렇지요.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닙니다. 그때 어디에 있을지 모르나."

―'만인보' 작업을 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진 겁니까?

"내 원점은 '어리석음'입니다. 번뇌(煩惱)만이 싱싱하고 뜨겁습니다. 번뇌는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한때 선시(禪詩)를 많이 썼지요. 선시는 깨달은 자가 세상을 딱 내리치듯이 씁니다. 지금은 선시를 안 씁니다. 어리석은 자의 쪽에서 노래하는 거죠."

―선생께서는 한 인터뷰에서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게 죽음'이라고 한 적이 있지요.

"나뿐만 아니지요. 그 때문에 겁나니까 종교가 있는 거지. 개똥이나 누구나 하는 대답이오."

―죽어서 내가 없는, 내가 참여할 수 없는 세상이 여전히 남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매력이죠. 한 개인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세상은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난 죽음이 겁나지 않아요. 근대 시인들 중에는 스물다섯~여섯에 요절한 분이 많아요. 난 이들보다 3배나 더 살고 있어요. 내 삶은 수많은 죽음의 미수(未遂)였고, 전쟁통에는 수많은 죽음을 봤고,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와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어요. 나는 끊임없이 죽음을 지고 다녔어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잘 알겠군요.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지, 내가 아는 건 살아 있는 한에서 죽음이지. 죽음에 대한 미지(未知)가 생(生)이지요. 죽음을 알려 하는 건 생을 모독하는 거요. 김 전 대통령의 삶은 창파(蒼波)의 삶이었고 태산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죠."

―김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1970년대 자연스럽게 반독재투쟁을 하면서 만났죠. 내가 아는 그분은 매우 치밀하죠. 정밀한 기계죠. 난 그와 정반대죠. 난 광기와 술로 살았지만, DJ는 술을 못 합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후 만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이분에게 술을 건넬 때 '대통령은 술을 못합니다. 시인(詩人)하고 합시다'고 내가 말했지요. 그래서 몇번 주고받고 마시니, 내가 술 취할까 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죠."

두 눈썹만 새카만 고은 시인은 “인간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슬픔이 늘어난다”고 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당시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해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서 즉흥시를 낭독하고 김정일과의 건배에서 무병장수를 빌었다지요?

"무병장수를 기원한 기억은 안 나는데."

―다음 날 오찬에서 김정일이 '시를 참 감명깊게 들었다'고 말했다면서요?

"그건 했지요. '요 다음에 한번 꼭 오라' 했는데,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첫날 밤 초대소에 있던 30가지 술을 한잔씩 시음하고 감회가 고무됐죠. 새벽 3시까지 잠이 오지 않아요. 그때 시가 나왔어요. 그날 만찬 중반쯤 남북합의서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급격하게 잔치분위기가 됐지요. 그 고조된 분위기에서 시 낭독이 갑자기 이뤄진 거죠. 술 마시다가 앞으로 불려갔으니까요."

―그 뒤 김정일에 대해 "속에 있는 말이 바로 나오는 직설적인 화법을 가졌다. 매우 예술적인 취향도 지녔다. 정치인을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예술가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고 평을 한 적이 있지요?

"속에 있는 말을 탁탁 던지는 직설적이고 예술적인 사람으로 보였지요."

―인상이 좋았던 모양이군요?

"그게 아니죠. 있는 그대로의 인상이지요. 칭찬도 폄하도 아니지요."

―선생께서는 한때 '민중' '민주' '인권'을 많이 노래했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일 뒤에 가려진 북한 민중들의 참담한 삶에 대해 시를 쓴 적이 있습니까?

"이쪽 체제와 저쪽 체제가 만나서 민족 문제를 고민하고 합의를 보는 자리인데, 북한 인민의 열악한 계급성을 갑자기 말할 수는 없지요. 그건 별도지요. 전혀. 이건 협량(狹量)의 질문입니다."

―그 뒤에 한 번이라도 북한 주민의 고통을 노래한 적이 있나요? 선생의 시는 김정일의 칭찬을 받았고, 다른 글들은 북한 풍경이나 인정(人情)에 대해서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외국 원수가 와서 서울의 달동네에 가봐도 그렇지 않나요. 북한만 그런 게 아니라, 거기도 참담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도시 빈민을 어떻게 다 해결합니까."

―혹시 북한 주민의 참상과 우리 빈민의 문제가 같다고 보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모든 걸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파편적으로 들려오거나 소문으로 알 수가 없죠. 내가 현장에 가보지 않는 한. 현장에 가려면 이 체제와 만나야지요. 또 북한을 들어가도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습니다."

―북한 주민의 참상에 대한 자료는 많고 숱하게 보도됐습니다. 당장 우리 주변에는 이를 증언할 탈북자들이 1만5000명이 넘습니다.

"일일이 지적해서 남북 관계에서 무슨 기여를 합니까. 나는 정치인이 아니에요. 개선해줄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1970, 80년대 왜 민중의 고통에 대해 노래했지요?

"그건 내가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요. 상황 논리이지요."

―선생께서는 몇년 전 미당(未堂) 서정주의 '친일 친독재' 행적을 내세워 그 시를 가혹하게 폄하했습니다. 같은 잣대로 일각에서는 선생에 대해 '친북'이라고 비판합니다.

"난 북한을 다녀왔고 들쭉술을 마셨을 뿐인데, 잘려진 한반도의 공간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염원이 있는데, 그런 말을 들어야 합니까?"

―선생을 보면 '시적 재능의 범람(氾濫)'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습니다. 시를 쓸 때 무엇이 중요합니까?

"백지(白紙)는 시를 쓰기 이전의 상태이지요. 순결함…, 진실을 위해 피를 쏟는다든지, 시를 쓰는 자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 때처럼, 시인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거죠. 산해경(山海經)에 '난(鸞)새는 절로 노래하고 봉(鳳)새는 절로 춤춘다'고 합니다. 시에 너무 고도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시 정신에 너무 고취되지 말고, 거기에 항복하지 말고, 절로 견딜 수 없어 나오는 것이지요. 종달새는 하루에 3천번 울고, 개구리도 울고, 송아지도 우니, 시인도 우는(鳴) 겁니다."

―젊은 날 행적에 대해 회한이 없습니까?

"인간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슬픔이 늘어납니다. 용기나 희망보다 회한이 늘어나죠. 그걸 돌이킬 수 없죠."

인터뷰 동안 그는 보드카를 두잔 마셨고, 나는 입술만 축이고 일어났다. 그런 나를 '속절없이 돌아갔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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