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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기사]][최보식이 만난 사람] '장수 경영의 지혜' 박승복 샘표회장

작성자애니그마|작성시간09.09.28|조회수40 목록 댓글 0

간장 만드는 본업에 충실해야, 아니면 바람 나… 사람도 그래"
은행원, 관료 거쳐 1976년에 가업 이어 88세… 최고령 CEO
외형적으로 성장해야 기업이 발전하는 건가? 63년째 적자없는 경영
옛날 집간장 짰지만 요즘 간장은 달달해져… 우리가 입맛 바꾼 것"얼마 전 '장수경영의 지혜'란 책을 냈는데, 대체 무슨 지혜를 알려주시렵니까?" 물으니, "내가 살아온 삶을 말한 것일 뿐 잘났다고 쓴 것은 아닙니다"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 단구(短軀)의 노신사에게 1시간 반 질문하는 동안 난 거의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나이로 미수(米壽·88세)인 박승복 샘표회장의 말은 짧다. 다음 기록은 그런 단답을 일정 부분끼리 합쳐놓은 것이다.

"샘표 공장을 맡게 된 것은 피치 못했어요. 1976년 부친이 별세한 뒤였어요. 내 아우가 아버지 밑에서 오래 일하고 있었어요. 난 동생을 시키려고 했어요. 간장 만드는 일을 제일 잘 알 게 아니에요. 그런데 '형님이 계시는데 전 죽어도 안 맡습니다'고 버텨요."

그는 함흥공립상업학교 졸업 직후 한국식산은행(산업은행의 전신)에 들어가 25년간 은행원으로 일했다. 그 뒤 10년간 정부에서 근무했다. 재무부기획관리실장,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까지 지낸 뒤 물러났다.

"동생과 그렇게 며칠 승강이를 벌이고는 내가 사장을 맡았어요. '경영이 별거냐. 보따리 장사도 경영이고 집안을 일구는 것도 경영이지' 하는 마음이었지요. 사장 취임 후 100일 동안 어떤 지시도 하지 않고 공장 구석구석을 다녔어요. 100일째 되는 날 전 직원을 모아놓고 처음 조회를 했지요."

박승복 샘표회장은“언제나 욕심이 화를 부른다. 과욕을 안 부리니 아쉬움이 없다”고 말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거대한 구상이나 종업원들을 움직이는 메시지를 발표했나요?

"제가 공장에서 발견한 문제점을 말했어요. 이 중 가장 큰 메시지는 '간장병 상자를 5단 높이로 쌓고 있는데 4단으로 쌓으면 어떨까 싶다. 쌓기도 쉽고 간장병이 깨질 확률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었지요."

―겨우 5단을 4단으로 쌓자는 게 취임 일성이었습니까?

"많이 쌓는다고 5단을 쌓으면 사람 키를 넘거든. 상자를 탁 던지는 걸 받다가 깨져요. 일년 간장병 파손으로 인한 손실이 한달 매상이었어요. 그런 걸 모르고 해왔던 거야. 그해 간장병 파손이 줄어든 만큼의 수익금을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나눠줬어요. 직원들이 좋아했지요."

―그때는 간장 담을 병을 구하는 게 어려웠다지요?

"당시에는 간장병이라는 게 없었어요. 맥주병에다 간장을 담아 팔았아요. 맥주 상표를 떼고 샘표 상표를 붙였죠. 그 시절 조선맥주와 OB맥주가 있었지요. 우리 회사로 출근하기 전에 먼저 그쪽 사장실에 갔어요. 맥주 회사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조선맥주 사장은 나와 같은 박씨인데 '병을 주겠다' 하면서 안 주는 거예요. 사장이 주라고 했는데도 밑에서 안 줘요. 자기네들도 모자란다며. 거짓말 좀 보태서 100일을 쫓아다니다가 기권했어요. OB는 주더라고요. 꼭 한 번 안 줘서 하루 일을 못 했어요."

―1980년대 이후로 페트병 용기를 사용했지요? 샘표 간장이 우리나라에서 페트병 용기로 처음 제품화했다고 들었습니다.

"병 구하러 다니다가 워낙 고생을 많이 해 페트병을 쓸 결심을 했죠. 주위에서는 페트병이 이물질이 아닌가 걱정들 많았어요. 하지만 막상 해보니 깨끗해서 더 좋아했어요. 다른 식품업체들도 다 따라왔어요. 우리는 공장에서 원료를 사다가 직접 페트병을 만들었지요."

―간장 제품을 만드는 데는 보통 얼마 걸립니까? 먼저 콩을 사와야지요?

"6~7개월 걸립니다. 숙성을 시켜야 하니까요. 콩도 물도 좋아야 하지만, 숙성시키는 과정이 꼭 필요해요. 장을 담그는 과정에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제대로 된 소금을 안 쓰고 독에 문제가 있어도 장맛이 변합니다. '천천히 제대로' 하자는 게 우리 모토였어요. 사람이 살면서 장을 담그듯이 하면 탈이 없어요."

―기계화됐는데 공정 기간을 단축시킬 수 없나요?

"빨리 만들고 싶어도, 책을 봐도 그렇게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가정에서 장을 담그면 바로 먹습니까?"

샘표 간장은 1946년 일본인이 운영하던 '삼시장유 양조장'을 인수한 게 시작이었다. 그의 선친이 학생복 사업으로 번 돈과 그가 다니던 식산은행의 퇴직금을 모아 사들였다. 일종의 부자동업이었던 셈이다. 미군정청에 '적산(敵産)'으로 등록된 업체라 싸게 구입했지만, 나름대로 간장 사업에 뛰어드는 데는 고민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장이란 사먹는 게 아니라 집에서 담가 먹는 것이었지요. 돈 주고 간장을 사먹겠느냐고 했지요. 선친은 장남인 저와 많은 걸 상의했지요. 이북에서 내려온 수십만명의 피란민이 있으니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지요. 피란민들은 당장 간장을 담글 장독이 없잖아요. 한국 사람은 굶을 수는 있어도 된장 간장 없이는 살 수가 없지요. 그때 공장은 서울 충무로 4가에 있었어요. 주부판매원들이 간장병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해 '한번 맛을 보라'며 시음을 시킨 뒤 팔았어요."

―제 기억으로는 이런 공장 간장을 '왜간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집에서 담그는 간장과는 달리 맛이 달달했지요.

"그게 모두 일본식 간장입니다. 가정에서 만드는 간장은 짰지요. 요즘 간장은 모두 달달해졌지요. 양조기술 때문이지요. 나쁘게 말하면 우리가 사람들 입맛을 바꾼 것입니다."

―간장 파동도 두 번 있었지요?

"한 번은 간장업체가 풀 찌꺼기를 사들여 간장을 만든다는 보도로 시끄러웠지요. 제가 사장을 맡고는 소금물에 검정 색소를 타서 만든 일부 '무허가' 간장으로 난리가 났어요. 몇몇 업자들이 구속되고 망하기도 했어요. 1985년 여름이었습니다. 모든 간장제품 판매율이 급락하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지요. 매스컴에 정정 보도를 신청해도 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TV광고에 직접 나갔어요. '샘표는 안전합니다. 마음 놓고 드십시오. 주부님들의 공장 견학을 환영합니다'라고. 사장이 직접 광고 모델로 나간 것은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 날로 간장 판매가 달라졌어요. 동업자들이 '박 사장 때문에 살았다'고 했어요."

샘표 본사에서 아들 박진선 사장과 함께.

―기업 운영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까?

"국민에게 신뢰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죠. 고객의 마음을 잃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고객이 없는데 살아남을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나? 그건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죠. 먹어보고 '이거 못 먹겠다' 하면 끝납니다. 선친은 간장과 같은 기본 먹을거리는 지위나 재산 여부를 떠나 똑같이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간장 등급이 없이 만들었어요. 그래도 간혹 간장 만드는 사장 집이니까 더 맛있는 간장을 먹지 않겠나 생각들 합니다."

―샘표의 오래된 명성에 비해 매출액은 1650억원, 직원은 550명이더군요. 기업규모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요?

"국민의 50% 이상이 우리 간장을 먹지만 그것밖에 안 됩니다. 하나 팔아도 1억원짜리 파는 품목과는 다르죠. 하지만 일본의 깃코만, 야마사 다음으로 세계 3번째죠. 작년 말 1000만달러 수출했지요.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63개국에 나갑니다."

―같이 출발해서 쭉쭉 뻗어가는 기업을 봤지 않습니까? 소위 기업다각화나 다른 분야에 진출하는 걸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그렇게 해서 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한 경우가 더 많죠. 외도는 안 하려고 했죠. 본업에 충실해야지. 안 그러면 바람이 나요.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간장 쪽에도 여전히 발전할 여지가 많아요. 우리는 조금씩 확장해오고 있어요. 경기도 이천에 지은 간장공장은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 최고입니다. 저는 '과연 대기업이면 곧 훌륭한 기업인가, 외형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기업은 발전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업 경영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말이 있지요.

"업종에 따라 다르죠. 간장 사업은 페달을 밟아도 한계가 있어요. 하루 아침에 간장을 한 병 먹다가 두 병 먹을 수는 없잖아요. 물론 해외로 판매를 늘려야죠. 그러나 외형의 크기보다 내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샘표는 63년간 무(無)적자 기업입니다. 이게 자랑스럽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왜 적자를 냅니까. 적자 안 나게 일을 해야지요."

―누가 적자를 내고 싶어 적자를 내겠습니까?

"글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리스크를 감수하고 뛰어드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본업에 충실하냐, 외도를 하느냐는 것이지요. 욕심은 한이 없죠. 본업을 잊어버리면 욕심이 화(禍)를 부르죠."

―왜 기업을 합니까?

"품질을 최고로 해서 판매를 늘리고 수익을 올리는 것은 기본입니다. 나 혼자 부자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같이 일하는 식구들을 편안하게 먹여 살리는 것이 우선 중요하지요. 그러면서 기업을 키워나가는 것이죠."

―샘표는 감원이나 구조조정으로 직원을 내보낸 적이 아직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어요. 회사가 자꾸 커가니까. 구조조정을 안 해도 정년이 되면 나갈 사람 다 나갑니다. 이 회사에 들어오면 모두들 종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적인 사풍이 있어요. 난 사장 시절부터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게 없었어요. 어머니가 밥하라는 말을 듣고서 밥합니까, 알아서 밥하지요. 직원들 스스로 찾아서 일을 하도록 했어요. 동생인 전무에게 직원 채용 등을 다 맡겼지요. 맡겨야 책임지는 거죠. 맡긴다는 것이 참 무서운 겁니다. 100% 맡기는 데 최선을 다 안 할 도리가 있겠어요."

―이번에 쓴 책을 보니, "젊었을 때는 '최고'를 중시했지만 이제는 '최선'을 더 높이 친다"고 했더군요.

"젊은 시절에는 우리 사회 전체가 뒤떨어져 막 좇아가야 했지요. 의욕적으로 최고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최고'라는 것은 상대방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따라왔으니, 차분해질 때가 됐어요. '최선'은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 없이 다 하는 것이지요."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치는 무엇입니까?

"신의예요. 신세 진 사람을 잊지 않는 거죠. 신세를 다 갚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잊지 않고 갚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내가 있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죠. 꼭 경제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선친은 초창기 시절 간장 판매가 부진했을 때도 '내부에서 먼저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직원들 급여일은 빚을 내서라도 반드시 지켰어요.

또 원칙대로 하는 것도 중요해요. 내가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을 하던 시절, 세금을 전혀 내지 않던 한국일보사 윤전기에 빨간 딱지 붙인 적이 있어요. 평소 알던 사이였던 한국일보 사장인 장기영 부총리가 '우리 신문사 윤전기에 빨간 딱지 붙였더군' 전화를 걸어왔어요. '네, 제가 붙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부총리가 세금을 한푼도 안 낼 수 있습니까?' 이분은 잠시 말이 없더니 '알았어' 그래요. 다 음날 세금을 완납했어요. 그 뒤로 우리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뒤돌아보면 아쉬움은 없습니까?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 아쉬움이 없어요."

―그러면 나이가 드니 무엇이 좀 섭섭합니까?

"특별히 느끼는 것은 없어요. 친구가 없어진 게 섭섭해요. '야, 자' 하는 친구가 앞서 다 가버렸어요. 모임에 나가면 내가 최고령이니 건배사를 하라고만 해요."

그의 '살아온' 말은 음식으로 치면 요즘 독자들의 미각을 자극할 '농비신감(��肥辛甘: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맛)'과는 거리가 먼 쪽일지 모른다. 하지만 풀뿌리를 씹어 담백한 맛을 느끼면 그것이 진미(眞味)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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