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길은 별명이라는 것을 아시기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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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다른 표기 언어 尹奉吉 동의어 윤우의, 尹禹儀, 매헌, 梅軒
요약 윤봉길은 일찍부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다음에는 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축하기념식장에서 폭탄투척의거를 펼쳐 중국침략의 수괴들을 대거 살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임시정부는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초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3.1독립만세운동 이후 10여 년 동안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치로 인해 독립 의지가 순치되어가고 있었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그 동안 일본의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인해 무력항쟁의 열기가 식은 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상하이 임시정부는 내부의 분열과 재정의 고갈 등 여러 가지 돌출된 문제점으로 인해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를 유린하고 이듬해 상하이까지 점령한 일제는 일왕 히로히토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기해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전승기념축전을 개최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세를 한껏 과시하려 했다. 때마침 새로운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김구의 제안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일본군 수뇌부를 처단함으로써 꺼져가던 한국인들의 독립정신을 되살리고, 중국인들의 대일항전의식을 자극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신성인의 자세로 거사에 자원한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은 감시가 삼엄한 홍커우공원 행사장에 잠입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그 결과 시들어가던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이 되살아났음은 물론 국제사회에까지 잊혀졌던 식민지 한국의 존재가 뚜렷하게 부각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다
윤봉길(尹奉吉)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몰락양반이었던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5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봉길이란 이름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禹儀), 아호는 매헌(梅軒)이다.
6세 때부터 큰아버지 윤경에게 천자문을 배운 그는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침략자 일본의 폭압적 지배체제를 깨닫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면서 과감하게 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신학문을 버린 그는 동생 윤성의와 함께 최병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21년부터 그는 매곡(梅谷) 성주록이 운영하던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사서삼경 등을 공부했고, 동아일보와 잡지 〈개벽〉을 구독하면서 민족정신을 체화했다. ‘매헌(梅軒)’이란 아호는 그 무렵 얻은 것이었다. 15세 때인 1922년에는 배용순과 결혼했다.
19세였던 1926년, 그는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어느 날 공부하던 도중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책을 나섰는데 서숙 맞은편에 있던 공동묘지에서 한 청년이 묘표 여러 개를 뽑아들고 나타나더니 그에게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그는 묘표를 뽑아 본래 무덤의 위치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든 청년의 행위에 경악하면서, 그와 같은 무지가 조국을 일본에 강탈당한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윤봉길은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학생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쳤고, 인원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과 역사, 산술,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다.
〈농민독본〉으로 민족혼을 되살리다
1927년에 윤봉길은 체계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농민독본〉 3권을 저술했다. 현재 이 책의 제1편은 전해지지 않지만 나머지 부문을 살펴보면 당시 그가 오랜 세월 핍박과 수탈에 시달리던 하층민의 권리를 일깨우는 한편 일제 식민지 체제 속에 식어가고 있던 민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많은 구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제2편 〈계몽편〉에서 그는 예절과 민족의식, 민족정신을 강조했고, 제3편 〈농민의 앞길〉에서는 농민과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이상국가 건설과 농민 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제6과 ‘농민과 공동정신’에는 농민계몽과 함께 민족혼을 되살리고자 했던 그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1. 독립적 정신이 조선을 살리는 원동력인 것과 같이 농민의 공동정신이 또한 조선을 살리는 긴요한 하나입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과 같이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렇게 하여도 이기기 어려운 일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면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 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쌓아놓지 않으면 안 될 조선에 있어서, 또 더욱 남달리 가진 힘이 빈약한 조선의 농민으로는 무엇보다도 경우와 이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일치 공동의 필요를 절실히 느낍니다.
2. 크게는 그만두고 사소하게 본다 하더라도 공동경작이라든가 또는 농사에 대한 각종 결합이라든가 또는 상공업자가 벌이고 있는 상리(商利)의 그물을 벗어나는 소비판매에 대한 조합과 같은 것도 또한 그러하여 농민의 일치공동이 아니고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농업자의 사이에는 다른 상공업자와 같은 격렬한 생산판매상의 경쟁이 없습니다. 이 경쟁심이 박약하니만큼 일에 대한 공동이 잘 되지 아니하였지마는 오늘과 같이 농촌이 말 못 되게 거칠어지고 농민의 살림살이가 극도로 글러져서 전 민중의 생명이 뿌리로부터 뒤흔들리게 된 이때를 당하여 경우가 같은, 이해가 같은 사람들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치공동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3. 우리는 ‘내 밭만이 잘 다스려져서 농사가 잘 된다 하여 다른 사람의 밭을 거칠어지건 말건 그까짓 일은 상관할 것 없다.’고 하여서는 안 됩니다. 내 한 몸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내 사는 농촌을 바로잡기 위하여야 되고, 내 사는 농촌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마을에 있는 같은 경우의 사람들의 단합이 아니고는 안 될 것이니, 서로 미약하나마 있는 힘을 다하여 끝끝내 나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묶어 놓은 화살 단은 풀어 놓은 외대 살보다는 강하고, 시베리아 넓은 벌판에 있는 굴레 벗은 말들은 이리의 침해를 막기 위하여 떼를 지어 다닌다 합니다.
1928년, 윤봉길은 농촌운동단체인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농가의 부업을 장려하고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 애용과 일본상품 배척, 생활 개선 등 구체적인 농촌개혁의 실천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29년 2월 부흥원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학예회에서 그는 풍자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여우같은 일본제국주의를 조롱했다. 그 일로 이튿날 덕산주재소에 잡혀 들어가 곤욕을 치렀다. 이처럼 그가 일제의 간악하고 폭압적인 지배체제를 실감했던 시기에 쓴 한시집이 〈오추(嗚推〉·〈임추(壬椎)〉·〈옥수(玉睡)〉·〈염락(廉洛)〉 등이다.
그해 4월 23일, 그는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지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자신과 함께 농촌개혁을 이끌 동지들을 규합했다. 월진회 회원은 발족 당시 38명이었는데 매월 10전씩 회비로 거두어 야학회·강연회 개최, 농가부업 장려, 소비조합 창설, 위생보건사업 추진 및 청소년체육발전 도모 등의 사업을 시행했다. 상부상조를 목표로 하는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한 농촌개혁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일제의 탄압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조국이 독립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해 12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그달 5일자 일기에 ‘광주고보 민족충돌사건의 소식을 듣고 끓는 피를 감출 수 없다.’라고 토로했다. 이어서 10일자 일기에는 경성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에 격정적인 감회를 표출했다.
“경성 보성고보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다. 이들은 만세삼창을 했는데 1은 ‘일본제국주의 타도 만세’, 2는 ‘약소민족해방 만세’, 3은 ‘노예적 교육철폐 만세’였다. 아아, 가슴이 시원한 소식이구나.”
그렇지만 윤봉길은 연이은 학생들의 의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가 상존하는 한 식민지 백성의 운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다. 그달 16일자 일기에는 그의 갈등과 고뇌가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하였다. 아아! 가엾어라, 분통할 일이로구나! 이 압박 어느 날 갚을 것이냐!’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다
윤봉길이 일제의 민족적 압박에 분개하며 복수를 다짐하게 된 것은 스승 성주록을 통해 참여하게 된 유교부식회의 영향도 컸다. 유교부식회는 홍주 의병장 김복한의 유지를 계승한 단체로 유교를 진흥시켜 ‘대공(大公)’, 혹은 ‘대동(大同)’ 세계 건설을 목적으로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고자 했다.
당시 유교부식회의 기관지 〈인도(人道)〉를 간행했던 김은동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미 1928년경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이흑룡으로부터 국외독립운동의 형세를 알고 있던 윤봉길은 이와 같은 상황에 자극받아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월진회 동료들이 마련해준 여비 50원을 품에 안은 그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훗날 그가 쓴 유서에는 당시의 심경이 다음과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 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렇지만 윤봉길의 행보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선천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한 달여 뒤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만주에서 대한독립군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만주의 동포들을 위해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1930년 8월,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공근의 집에 머물며 박진이 운영하던 말총모자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했다. 이때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그해 12월에는 칭다오에 가서 이듬해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번 돈 50원을 집에 송금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이상이 부모형제나 처자에 대한 사랑보다 중요하다면서 나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홍커우공원의 쾌거
1931년 7월, 일제는 만보산사건을 일으켜 한중 양국민의 민족감정을 유발한 다음 그해 9월 급거 만주를 침략하면서 마수를 드러냈다. 그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상하이로 가서 조국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모색하게 된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의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실패했다. 새삼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타오른 윤봉길은 공동조계 내에 있던 일본인 거리에서 야채상을 하면서 적정을 파악하던 도중 임시정부 지도자 백범 김구를 만나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1932년, 상하이사변으로 일본의 야욕이 구체화되자 김구는 상하이에 있는 일제의 군기창고를 폭파하려는 목적으로 윤봉길 등 6명의 애국단원을 하역인부로 투입했다. 그러나 폭탄 제조를 맡았던 상하이병공창 주임 김홍일의 작업이 지연되고, 그 와중에 일본과 중국이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거사의 실행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금세 찾아왔다. 상하이일일신문에서 일제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인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공원에서 전승축하기념식을 열 것이라고 보도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는 김구의 제안에 따라 폭탄투척거사를 결정했다. 이때 거사에 자원한 윤봉길은 4월 26일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당시 윤봉길은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에 27일과 28일, 양일간 홍커우공원을 답사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때맞춰 김홍일로부터 수통형과 도시락형 두 개의 폭탄이 입수되었다. 이윽고 거사 당일인 29일이 되자 그는 김구와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새 시계와 김구의 헌 시계를 바꾸어 차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날 오전 홍커우공원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경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하지만 양복과 스프링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있던 윤봉길은 그들의 경비망을 뚫고 단상 가까이에 다가가 행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단상 위에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 상하이총영사 무라이 등이 도열했다.
오전 11시 40분경, 식순에 따라 무라이 총영사의 축사에 이어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제창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윤봉길은 그 노래가 끝나는 순간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내고 안전핀을 뽑은 다음 단상 위에 집어던졌다.
폭탄은 굉음과 함께 불꽃이 일어나면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했다. 그로 인해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가 치명상을 입었고 노무라 중장은 한쪽 눈을 잃었다. 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츠 공사, 무라이 총영사,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거사 직후 식장을 빠져나가려다 일본군 호위병 고모토에게 붙잡힌 다음 주변 사람들에게 집탄구타를 당했고, 헌병대로 연행되어 모진 고문까지 받았다. 그의 의거로 인해 자존심을 구긴 일제는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범 색출에 돌입했다. 그 결과 프랑스조계에 거주하고 있던 안창호 등 12명의 조선인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본의 주요 신문들은 위대한 인물들이 희생당했다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국제연맹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이만스 의장과 영국 외상 사이먼을 비롯한 각국 대표들이 앞 다투어 일본에 조전을 보냈다. 그렇지만 교전당사국이었던 중국의 반응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중국인들은 만보산사건으로 인해 그 동안 백안시하던 한국인들의 빛나는 투쟁성과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특히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때부터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성원하면서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그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는 윤봉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하이에 왔다.”면서 대장부로서의 변치 않는 기개를 펼쳐보였다. 그해 11월 18일, 그는 일본 우편수송선에 실려 상하이에서 고베항을 거쳐 오사카위수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2월 18일에는 다시 가나자와형무소로 옮겨졌고, 이튿날인 19일 가나자와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당시 일본의 육군형법에 따르면 유해는 육군묘지에 묻혀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육군묘지 아래 일반인이 왕래하는 통로에 암장해 버렸다. 그때부터 13년 동안 오가는 행인들의 발에 짓밟혔던 윤봉길의 유해는 해방 1년 뒤인 1946년 3월 6일 발굴되어 조국의 품에 돌아왔고, 그해 6월 30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다음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봉길은 실로 단순한 독립지사가 아니라 신학문과 구학문을 두루 익혀 현실에 접목하려던 선각자였고 농민계몽에 앞장섰던 운동가였으며, 일본의 노예가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충의지사였다. 그의 의거는 단순하게 적의 요인 다수를 살상했다는 소극적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있던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중국정부와 함께 항일연합전선을 펼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비견될 만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쾌거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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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매헌 윤봉길》 김학준. 동아일보사. 2008.
- ・ 《윤봉길(자유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 김상기. 역사공간. 2013.
- ・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 김상기.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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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용연봉강재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2.09 별명을 이름으로 알고 쓰는 사람들을 전 세계에서 등위를 메기면 우리나라 대한민국 조국이 1위일 수 밖에 없습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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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윤희정 소정공 작성시간 20.02.09 본명이 아닌 별명이 더 알려진 연유도 혹시 아시나요?
다 읽어봤는데도 여기엔 없네요.당시 활동에 제약이 있어서일까요? -
답댓글 작성자용연봉강재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2.09 윤희정 소정공 저의 마음은 諱 禹자儀자를 사용하는 것 보다도 봉길이라는 별명을 쓰는 것이 더욱 좋아서 마을 사람이 부르기 시작하여 수 많은 사람들께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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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등촌동 작성시간 20.02.09 용연봉강재사랑 봉길이라? 그럼 철우라는 이름은 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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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용연봉강재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2.10 등촌동 윤금모님 저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아버님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버님은 고인이 되었으며 아버님의 諱는 仁자植자 조부님의 諱는 希자述자 증조부님의 諱는 相자龍자 고조부님의 諱는 春자大자 이까지만 조부님 1899년생 증조부 1857년 고조부님 1884년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