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
|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승하(昇遐)한 정조(正祖)는 그해 11월 6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墓所)인 수원의 현륭원(顯隆園) 내의 강무당(講武堂) 옛터에 건릉(健陵)이라는 능호(陵號)로 안장(安葬)됐다. 정조에 이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한 순조(純祖)는 즉위(卽位) 당시 11세에 불과했기에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이자 증조모(曾祖母)뻘이 되는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해가 바뀌어 1801년(순조 1) 1월 10일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가 5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반포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탄압(彈壓)이 시작됐다. 구체적으로 철저한 천주교 신자인 정약종(丁若鍾)이 천주교 관련 자료(資料)를 숨기고자 교리서(敎理書), 성구(聖具), 신부(神父)들과 교환(交換)했던 서찰(書札) 등을 책롱(冊籠)에 담아 운반하던 중, 그해 1월 19일 한성부 포교(漢城府捕校)에게 압수(押收)당한 사건(事件)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당국(當局)의 본격적인 수사(搜査)가 시작됐다. 그해 2월 10일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해 정약종과 정약전(丁若銓) 형제,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 등이 체포(逮捕)되어 국문(鞠問)을 받았는데,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獄死)하고 정약종과 이승훈은 서소문밖에서 장렬히 순교(殉敎)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각각 장기(長鬐)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流配)를 떠났다. 그러나 정약용 형제는 그해 가을에 발생한 조카 사위 황사영(黃嗣永) 백서 사건(帛書事件)과 관련해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돼 추가로 국문을 받은 이후 다시 유배를 가게 됐는데, 지역이 변동되어 사암(俟菴)은 강진(康津), 손암(巽庵)은 흑산도(黑山島)로 새로운 유배지(流配地)가 결정(決定)됐다. 그해 11월 5일 감옥(監獄)에서 나온 정약용 형제는 11월 21일 나주읍에서 북쪽으로 5리 지점인 율정점에 이르러 초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 다음 날 다시 헤어지게 돼 사암은 강진으로 향하고 손암은 흑산도로 향해 출발했는데 결국 이것이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解配)되기 2년전인 1816년(순조 16) 흑산도에서 꿈에도 그리던 동생을 결국 만나지 못하고 향년(享年) 59세를 일기(一期)로 운명(殞命)했던 것이다. 덧붙이면 생전(生前)에 정약용과 우애(友愛)가 깊었던 정약전은 16년간의 흑산도 유배 생활(流配生活)을 하면서 특히 주민들과 소통(疏通)을 잘했다고 하며, ‘자산어보(赭山魚譜)’ 제하(題下)의 저서(著書)를 남겼는데 이는 당시 흑산도 근해에 있는 수산물을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分類)해 조사(調査)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서 실학자(實學者)로서의 면모(面貌)를 유감없이 보여준 탁월한 저서(著書)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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