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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강해

623장 주님의 시간에

작성자늘찬양|작성시간11.10.12|조회수402 목록 댓글 0

623장 주님의 시간에

요일 2:17,2011.10.16.늘찬양교회

 

‘주님의’, ‘시간에’, ‘변하리’, ‘살리라’는 코러스를 반복적으로 넣어서 찬양을 더욱 부드럽고 아름답게 만든 경배와 찬양으로 복음성가 ‘주님의 시간에’와 비슷한 곡으로 가사만 다른 찬양으로 다이안 벨(D.Ball;1941~ )이 작시‧작곡하였습니다.

 

1절 주님의(주님의) 시간에(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변하리)

     주님 나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니

     주의 뜻을 따라서 살리라(살리라)

 

1절, 주님의 시간에 나의 갈 길을 아름답게 인도하여 주시리.

시편 22편 1-2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며 신음하며 드리는 처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시 23편 1-3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이어서 6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런 변화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분명하게 발견하면 그렇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한국교회에 쏟아지는 시련과 환란을 바라보며 제 살을 깎는 아픔과 같은 개혁의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재발견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와 성도로 탈바꿈해야 됩니다.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섬기고 있었던 신앙의 그릇된 부분을 “주님의 시간에... 찬양강해를 통해... 올바른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주의 뜻을 따라서 살리라” (찬송가 1절) 고백하며 나타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던 날,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무너지던 날, 왕을 비롯해서 모든 귀족들이 맨발로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던 날. 그들은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보호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모두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묻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크신 권능과 은총으로 조상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광야 40년 동안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모든 원망과 불평을 받아가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 가나안 땅에서 평안하게 살도록 안식을 주셨던 하나님! 다윗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강대한 국가로 만들어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생명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그들은 버렸습니다. 그리고 헛된 우상에게로 그들은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말씀하지도 않으신 것들을 그들은 감행했습니다. 자식들을 불로 태워서 인신제사를 드렸고, 이방 나라 사람들처럼 음란하게 살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의로운 법인 율법을 버리고 이방 풍속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도대체 너희들에게 무엇을 잘못 했기에, 내가 행한 일 가운데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기에 나를 떠나서 헛된 우상에게로 그렇게 속히 떠났느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수없이 보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 선지자의 말을 등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들을 잡아 감옥에 던지고,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버렸기에 그들은 생명에서 떠났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버렸기에 그들에게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땅은 황폐하게 되었고, 산천초목을 모두 말라버렸습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였던 공동체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서로 착취하고 억압하는 분열과 폭력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서 더 이상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안식과 번영과 축복의 땅이었던 유다 땅에서 쫓겨나서 이방 땅에서 한숨과 탄식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세월을 지내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도 깨지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무너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버렸던 하나님, 그들이 무시했던 하나님, 그들이 의심했던 하나님을 그들은 재발견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임하기 전,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총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재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무한하신 사랑으로, 영원하신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그들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을 그토록 사랑하는 줄을 나 자신도 몰랐다. 어째서 나는 에브라임을 그토록 사랑하며 잊을 수가 없는가? 나는 그를 책망하고 징계할수록 더욱더 그를 사랑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 에브라임이 내게 무서운 채찍을 맞고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핏속 뼛속까지 아프고 내 오장육부가 그를 향하여 끓어오른다. 나는 에브라임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오 에브라임아, 그러나 내가 어떻게 너를 내어 버릴 수가 있겠느냐? 오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아드마처럼 파멸시킬 수 있으며, 내가 어떻게 너를 스보임처럼 멸망의 길로 빠지게 할 수 있겠느냐?”(호 11:8)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이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요 자비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MBC PD수첩’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님의 이야기가 편향 보도되어 방송을 탔다. 그렇잖아도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상태에서 ‘한국교회 죽이기 식’의 방송은 복음전도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나는 요즈음 부설로 운영하고 있는 프레이즈 실용음악학원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 이유는 실용음악학원이 돈 벌이가 되는지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제 살 깎기 식의 경영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창가에 실용음악학원을 세우고 더 나아가 인가도 나지 않는 지하실에서 레슨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학원장이 교인이다. 아마 저들도 교인이다 보니 십일조도 할 텐데 그 부정한 것을 하나님이 받으실까?... 학원만이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새 아파트가 입주하는 상가 건물 같은 층에 여러 교회가 동시에 입주해 있다. 그러면서 자기 교회로 나오라고 엄청난 홍보활동을 벌린다. 그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며칠 전에는 일당 3만원을 받고 대리 운전하던 목회자가 그만 교통사고로 참변을 당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성장을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성장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성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한 것들이 많다.

나 자신도 유다 백성들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더 이상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들이요, 나의 가족이다.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너희는 나를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나는 너희들을 무궁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했고, 인자함으로 너희를 인도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너희들이 죄를 지어서 나라가 망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지만 내가 다시 너를 세울 것이다. 너는 나로 말미암아 세움을 입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지은 죄악 때문에 슬픔과 절망과 탄식 가운데 바벨론으로 끌려 왔지만 이제 너희들은 모든 슬픔을 잊고 다시 소고를 들고 나와서 춤을 추며 돌아오게 될 것이다. 너희들의 죄악으로 땅이 황폐해지고, 이방인들이 너희들이 지은 모든 곡식과 포도나무의 열매를 빼앗아 갔지만 다시는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희 땅을 기름지게 할 것이요, 너희들이 심고 가꾼 포도나무의 열매를 거두어 먹게 될 것이다(슥 8:12).

하나님의 전인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도 못했던 너희들,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도 누리지 못했던 너희들을 내가 다시 고향 땅으로 인도하여 시온 산으로 올라가게 할 것이요, 하나님께 나아가서 경배하며, 예배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며, 음란하고, 패역하고, 타락했던 너희들을 내가 다시 일으켜 세워서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 것이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축제를 열게 될 것이다.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망했기에 민족적인 자존심도 완전히 무너졌던 너희들. 그런 너희를 이제 다시 일으켜 세워서 만민 가운데 첫째 가는 백성으로 만들어 줄 것이요, 억압과 고통 받는 남은 자들을 모두 구원하여 낼 것이다.

(사 52:7)

온 세상으로 흩어졌던 너희들,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한 북쪽 이스라엘,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남쪽 유다, 그로 인해서 온 세상으로 흩어졌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고향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나의 백성을 고향 땅으로 인도하는 그 날, 분열 되었던 왕국이 하나의 나라, 하나의 가족이 될 것이요, 도시와 농촌의 구별이 없어지고, 어느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 안전하게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맹인들도, 다리를 저는 사람들도, 임신부와 산모도 어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데리고 오되,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평탄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을 고향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장소, 물이 풍성한 시냇가 땅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버려서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나아갔지만 나는 너희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윗은 발견하였기에 시 22편에 이어서 시 23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회복하시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믿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했습니다. 혹 우리가 죄를 짓고 허우적거리며 살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주님께서 한국교회와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축복의 자리로, 안식과 평안의 자리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지금 조금 어렵고, 지금 조금 힘들다고 해서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분발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모든 삶의 자리를 평안과 기쁨과 축제의 자리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2장 17절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며 결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주님의(주님의) 시간에(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변하리)

     나의 정성 다하여 주를 찬송하오니

     주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주소서)

 

2절, 주님의 시간에 나의 정성 다하여 찬송할 때에 주의 뜻 이루어지리.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므로 변화 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수가성의 여인은 다섯 번씩이나 결혼을 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으면서도 참 만족을 얻지 못했지만 주님을 만나는 순간 생수의 기쁨을 얻고 변화되어 “와보라!” 며 예수

님을 증거 하는 여인이 되었으며(요 4:29),

삭개오는 자신의 키 작은 콤플렉스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많은 친구들로 부터 놀림을 받고 상처를 받으며 소외감과 열등감 속에 물질을 통하여 보상받기를 갈망하며 물질주의로 살았

지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므로 변화되어 자신의 가장 관심거리인 물질을 이웃 사람을 위해 절반을 내어놓은 것은 물론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며 물질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택하는 놀라운 변화를 보였습니다(눅 19:8).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제자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며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

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며 예수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심지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

섰던 죄인 중의 괴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므로 세계 선교의 초석을 다졌

던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빌레몬의 집에 종으로 있었던 노예 오네시모는 주인

바울의 전도를 받고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자”(몬 1:11)로 변화

되는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목적이 바뀌었고, 신분이 변화되는 등 하나님의 소중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듯 복음의 능력은 너무나도 귀하고 값지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복음을 증거 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잠잠하게 만들었는가요?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냉랭하게 만들었는가요?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돈입니까?’ ‘피곤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게으름입니까?’ ‘원망과 불평 때문입니까?’

세상이 아무리 강퍅해지고 물질중심으로 흘렀다고 해도 내 속에 예수 믿고 변화된 은혜의 흔적, 믿음의 흔적, 사랑의 흔적이 있다면 예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완전해서 쓰임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추하고 나약한 내 모습이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달려 나와서 무릎 꿇고 겸손하게 회개하며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성령님께서 나의 약점을 변하여 장점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실수가 있더라도 뛰어들어 믿음으로 일을 저지르면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역사와 기적으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을 붙들어 베드로로 써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적같이 써 주실 것을 믿고 “나의 정성 다하여 주를 찬송하오니 주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찬송가 2절) 고백하며 주님께 담대히 나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뵌 후 얻어진 행복감과 구원의 기쁨을 깨닫고 즉시 나눔과 섬김의 자세로 회복되어 예수님과 이웃 사람들을 섬겼듯이 오늘 우리는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 없어질 세상 성공과 돈과 물질욕망을 위하여 살지 말고 참된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만을 위하여 나의 모든 시간과 재능과 정성과 물질을 드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주님의 시간에 ....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이 시간에, 말씀 들으며 예배하는 이 시간에, 헌신하며 작정하는 이 기도 시간에...”이런 놀라운 기적의 변화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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