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는 날아오는데 봄은?
물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울던 아이들도 물소리를 들으면 울음을 멈춘다고 한다. 아마도 아이들은 엄마의 자궁 속에서 들은 물소리를 아주 평안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는 강물의 소리를 들으며 진리를 깨닫는 현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더욱이 산속 깊은 계곡에서 급히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 곁에서도 쾌적한 수면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물 흐르는 소리는 소음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살아 흐르는 음악이다.
이곳 산동네로 옮긴 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여의천 개울을 따라 화사한 봄 내음 속으로 걷는다. 얕은 개천 양지바른 곳에서는 치어들이 노니고, 깊은 곳에는 제법 씨알이 굵은 물고기들이 검은빛을 드리우며 재빨리 움직인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아주 작은 치어들 무리가 어미 물고기의 보살핌도 없이 무리 지어 커간다는 것이다. 어미는 알만 까놓은 채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어미 없이도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헤엄치며 먹이를 먹고 자라는 물고기 무리가 대견하게 보인다. 그러고 보면 독립된 개체로 성숙하는 과정에서 인간만이 가장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생명체일 것이다.
이런 물고기를 취하는 먹이 사슬이 있다. 겨울 철새인 청둥오리들이다. 먹이를 제대로 식별하지도 못할 것 같음에도, 몸통을 하늘로 향한 채 주둥이를 물속에 넣고 사냥하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진지하게 보인다. 먹이를 위해 노동의 정직한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으레 암수 짝으로 헤엄치다가 간혹 풀밭 위로 올라와 햇볕을 쬐며 부리로 몸통 구석구석을 집어댄다. 이제 제법 통통해져 어미의 모습이 된 오리들은 여름이 되기 전에 왔던 곳으로 곧 날아갈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을이 되면 날아가는 여름 철새도 이 개천으로 날아온다. 바로 백로와 왜가리이다. 이 철새들은 청둥오리와 같이 헤엄을 칠 수가 없어서인지 매우 얕은 물가로 찾아온다. 그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 때는 거대한 비행체가 다가오는 듯하나, 어느 지점에 착지(着地)하고 보면 오히려 왜소한 몸매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고고한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홀로 다닌다. 혹 무리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그 백로가 날아오면 산책로에서 지나가던 아이와 어른들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는다. 그러고 보니 그 작은 백로는 이 동네의 귀한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주일 부활절 오후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 조용한 산동네가 그들의 비행에 환호를 보냈다. 으레 날아오던 고고한 백로가 항상 내리던 지점에 안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회색 몸통의 왜가리가 처음으로 날아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처음 찾아온 왜가리를 신기한 듯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뒤이어 또 한 마리의 백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 백로는 머리 양쪽에 댕기 두 개를 가진 쇠백로였을 것이다. 아! 이 동네 개울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이들 3자의 회동이 무슨 연유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하튼 ‘빅 이벤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들의 해후는 그리 길지 않게 끝났다. 그리고는 각자 제 갈 길로 날아갔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날 이후 그들의 모습이 이전같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 철새가 날아온다는 것은 아직도 생태계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낯선 역병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나 자발적 격리를 해야 하는 이 삭막한 시절에, 자연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들과 산에는 꽃이 피고 새가 울며, 개천에는 물고기들이 뛰어놀고, 다양한 철새들이 날아와 배산임수의 풍경에 흥취를 돋게 하는 것은 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이런 봄의 들녘에 이들과 함께 배경이 된다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으로 창조주에 감사드릴 따름이다.
그러나 이 봄이 모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두보(杜甫)는 시 춘망(春望)에서 ‘나라가 망했으나 산천은 여전하고, 장안성에 봄이 되어 사람들은 없으나 꽃이 피고 초목은 무성하다’라고 봄이 왔음에도 전란에서 느끼는 난민의 슬픔을 노래하였고, 왕소군(王昭君)이 호지(胡地)에서 맞는 봄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슬퍼한 것은, 슬픈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고 찾아오는 자연의 가치 중립적인 무정함에 더욱 서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봄이 형통한 자에게는 환희의 축배가 될 수 있을지라도 곤고한 자에게는 잔인한 쓴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잃은 자에게 보여주는 자연의 꽃다발은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형통한 자와 곤고한 자 모두에게 기쁨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기적의 봄은 이 땅에서 불가능한 일인가? 이 나라에는 언제쯤 그런 봄이 올 수 있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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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두종 작성시간 20.04.20 우리가 어렸을 적에 부르던 노래말에 "오는 봄만 맞이려 말고 우리 손으로 만들자" 던 내용을 생각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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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크론베르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4.20 네. 그렇습니다. 장로님 말씀이 맞습니다. 자연현상은 가치중립적이므로 우리가 가치를 만들어가야하나 그럴 기미가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적절한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송암 작성시간 20.04.21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가치중립적인 자연의 잔인함, 무정함 ,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 봄이 우리 모두에게 거부할 수 없는 당랑거철이 아니고 꽃다발 한 아름 안고오는 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작성자크론베르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4.21 집사님,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만들어
가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