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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설교-다윗의자손예수여우리를불쌍히여기소서!

작성자도원 송태정|작성시간12.03.22|조회수250 목록 댓글 1

제 목: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 경: 마20:20-34절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 밤에 주님을 사모함으로 여기에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위로와 생명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육신의 고단하고 피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모하여 오신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오늘 이 밤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이 어떠한 것과,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의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긍휼로 우리를 살리려 오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12명의 제자들과 특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의 두 아들을 예수님이 왕이 되면 왼쪽, 오른쪽에 앉게 해 달라고 하면서 헛된 것을 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이 범죄하여 주님이 긍휼로 살게 해 주셨던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앞을 보지도 못하는 맹인 두 사람이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었던 그 분에게, 맹인 된 우리에게도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었던 그 긍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으며 나온 두 명의 맹인을 고쳐 주시자 그들이 눈을 떠서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밤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세상의 헛된 영광만을 구하는 자가 있다 하십니다.(21절)

 

오늘 본문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말씀은 예수님은 긍휼을 주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오신 분인데, 그것을 가지고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헛된 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이 말씀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긍휼로 너희를 섬기러 왔고,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겨 내 생명과 피를 쏟아서 죄의 값을 다 치루시고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제자들 생각에서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생각에서도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이고, 그러면 내 사랑하는 아들들을 예수님 왼편과 오른편에서 하나는 국무총리를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국방부 장관을 할 수 있도록 간청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 성경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국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십자가의 긍휼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헛된 영광만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뜻을 이루고자 세상의 것을 꿈꾸고, 세상의 출세와 부귀와 성공을 따라갔던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그것을 꿈꾸고 살아가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도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내가 소원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 가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낙심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에 주님께 나올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부르짖고 기도하여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그 사랑에 눈을 떠서 감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주님의 나를 긍휼히 여겨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사랑에 눈을 떴으면, 다시 세상 사랑에 눈 멀어서 살아가서는 안 되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들인 것입니다.

 

이제는 이 하늘의 사랑에 붙잡히고, 이 십자가 사랑에 붙들리고, 이 긍휼에 붙들려서, 그 십자가에서 긍휼로 받아 주신 그 사랑을 헛되게 하지 않고, 그 십자가 사랑을 빛내 드리는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을 꿈꾸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긍휼을 소리 높여 구하라 하십니다.(30,31절)

 

오늘 본문30-31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아멘-

 

여기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이 부르짖어 고백하는 이 신앙고백이 바로 이 본문과 성경전체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이며, 십자가에 우리 죄 때문에 죽으러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가장 그 분이 원하시는 핵심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3년 반의 모든 공적인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 길에 여리고가 있었는데 그 길에 두 명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긍휼을 주러 오시는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길 가에서 거지처럼 구걸을 하고 있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자 소리를 지르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부르짖자, 사람들이 거지가 그러는 모양을 보고서 사람들이 잠잠 해라고 꾸짖어도 더욱 부르짖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그들은 미친 듯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은 예수님이 그 앞을 못 보는 두 맹인을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발 걸음을 멈추게 했던, 그 바쁘신 중에도 예수님으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게 했던 그 고백은 무엇을 담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면서 부르짖으며 고백했던 ‘다윗의 자손이여’ 여기에 모든 것을 푸는 핵심의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장 1절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여기에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성경전체를 푸는 열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을까요? 다윗은 자기 부하 장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여 아이를 잉태하자, 그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이게 합니다. 그는 그 범죄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9장 13절과 12장 9절에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그 긍휼을 주러 오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두 명의 앞을 못 보는 맹인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여!’ 부르짖을 때에도 따르는 말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였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건이 마태복음9장 27절에도 또 두 명의 앞을 못 보는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부르짖었던 고백이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부르면서 반드시 따르는 말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였습니다. 또 마태복음15장 22절에 보면 가나안 이방 여자가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왔을 때, 그가 멀리서 부르짖었던 고백이 ‘주 다윗의 자손이여!’였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에 따르는 말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였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은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바로 당신이 긍휼을 주러 온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2장 44-45절을 찾아보겠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그랬더니 “물론 성경의 아는 바대로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윗이 직접 고백했던 시편110편 1절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칭했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다윗이 범죄 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을 때,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살게 해 주었던 그리스도가 ‘바로 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그 긍휼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22편 1절에 그 유명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부르짖었던 하나님이 다윗을 향한 십자가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긍휼을 만나고 난 다음에 회개하며 찬양했던 시편51편은 너무나 유명한 시요 노래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그 엄청난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나를 주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 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들어 주세요.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다윗이 고백한 가장 중요한 말이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을 가지고 범죄자들에게 이 긍휼을 전하면 그들이 이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이 긍휼을 듣고, 죄인들이 이 긍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과 이방 여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과 마태복음9장의 두 맹인들이 이 다윗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긍휼에 의지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그 긍휼을 의지하며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긍휼을 주러 오신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은 잠잠하라고 하지만, 그 다윗을 긍휼히 여겨서 받아 주신 예수님이 자기들을 반드시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더 크게 부르짖으며, 그 다윗 같은 인간에게도 베풀어 주셨던 그 긍휼을 달라고 물러서지 않고 그 긍휼을 달라고 간구하는데, 그 긍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이 왜 그들의 부르짖음을 모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이렇게 말씀 하셨는데, 이 천국 되시는 예수님은 침노를 당하러 오셨고, 십자가로 천국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바로 오늘 이 맹인처럼 이 긍휼을 구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침노를 당하러, 십자가에 달려 그 긍휼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부르짖어“긍휼을 주러 오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 주님이 여러분을 이 밤에 만나 주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긍휼에 눈 떴으면 긍휼에 눈 뜨게 해 주는 길을 가라 하십니다.(34절)

 

오늘 본문3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아멘-

 

그 긍휼을 주러 오신 예수님께 그들은 다윗에게 주셨던 그 긍휼을 구했더니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열일을 제쳐 놓고, 자기에게 그 긍휼을 구하는 두 맹인을 오라고 하시고서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물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눈을 보지 못하는 맹인 두 사람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서 왔으면, 눈을 뜨고 싶다는 것은 유치원 아이라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지금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묻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바로 21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절하면서 무엇을 구할 때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바로 오늘 소경들에게 말씀하셨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와 같은 말인 것입니다. 제자들과 세베데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과 명예와 출세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맹인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물으실 때에 ‘너희도 육신의 눈만 떠 주기를 원하느냐?’ ‘내가 눈을 뜨게 해 주면 너희도 이제 네가 꿈꾸고 소원해 왔던 세상의 성공을 향해 가기를 위해서 눈을 떠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복음17장에 나오는 나병이라는 문둥병자 10명도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왔지만 고쳐 주고 나자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 한 사람 밖에 없었고, 나머지 유대인 9명은 결국 세상의 헛된 것을 향해 가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중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려 고침을 받았지만 고침을 받고나면 여전히 세상으로 갔던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많았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두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두 맹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 이것만 보면 우리는 마치 이 두 맹인이 단지 육체의 눈을 뜨기만을 원한다고 고백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34절과 연결을 해 보아야 이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눈을 뜨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세상의 것을 쫓아가거나 눈을 떠서 우리의 길을 가기 원해서 눈을 뜨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이신 당신이 그 긍휼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 그 긍휼로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눈을 뜨기 원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눈을 뜨게 해 주신 그 긍휼로 세상에 눈 먼 자들에게 이 사랑에 눈을 뜨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34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을 빼놓고는 오직 여기에 예수님의 긍휼로 고침을 받고 난 다음에 그 즉시로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께 받았던 그 긍휼을 전했던 두 맹인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자기만을 위해서, 이 땅의 것만 구하는 변질된 복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채워 주시로 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도 아니요. 자기의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 크신 긍휼로,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용납해 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그의 어머니처럼 세상 것에 눈을 뜨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 두 맹인이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었던 긍휼에 눈을 뜨고, 그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의 긍휼을 구하고, 오늘 이 밤에 이 십자가의 긍휼에 눈을 확 떠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를 긍휼로 받아주시고, 치료해 주신 그 분의 십자가의 사랑과 긍휼을 전하며, 이 긍휼을 나타내며, 이 긍휼로 세상에 눈 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자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복음해남교회 송태정목사(2012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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