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형상이란 무엇인가?
창 1.26-27은 하나님이 인류를 그의 형상과 모습으로 지었다고 말한다. 두 가지 용어들은 동일한 의미의 동전의 양면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
하나님 형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질들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영혼, 고도의 이성적 추론 능력, 자의식, 신의식, 신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 등. 이들은 피조물들 중에서 인간만이 가지는 자질들이다. 인간만이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이들 자질들이 바로 하나님 형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와 진화론을 조화시키는 방법이 되기도 하다. 진화의 계보를 쭉 따라가면 어느 곳에선가, 하나님아 두 유인원 (hominid)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었고, 이들이 결국 첫번째 진정한 인간 존재가 되었다. 그 두 유인원이 바로 아담과 하와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기나긴 진화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어째튼 창조되었다. 어쩌면 이 일이 일만년 전에 일어났다고 보면, 창세기에 기록된 연대기와 잘 들어맞을 수도 있다.
진화론에 맞서서 인간의 기원을 성경적으로 기술하려는 동기가 가상하다. 하지만 전적으로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진화론의 논리에 맞추어서 인류 기원을 기술하려고, 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버린다. 성경의 진리를 이렇게 보존하려고 하면, 비성경적인 것과 이런 식으로 조정을 해야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이나 다른 자질들과 동등하게 보게되면, 창세기 1.26-27의 본문 메시지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지우게 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 인간은 하나님을 대변, 대리하는 통치자이다. 그런데 왜 우상숭배하니?
인간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진리는 인간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통치자임을 나타낸다. 창세기의 하나님 형상과 고대 사회의 왕들의 형상 사이에는 병행하는 점들이 있다. 고대 사회에 통치자들은 어느 곳에서나 즉시 있을 수가 없다. 핸드폰도 없는 시절이다. 기차나 비행기도 없던 시대이다. 그래서 왕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념비나 건물 또는 자신의 동상을 다스리는 왕국의 곳곳에 세웠다.
이들 형상들을 왜 세웠는가?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함이니다. 무엇을? 왕의 통치는 그의 형상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서나 확장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상의 형상이 왜 세워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상은 신전에서 신을 대변한다. 우상 자체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거저 신상일뿐 이었다. 그러나 신상은 신이 신비로운 방법으로 숭배자에게 현존함을 알리는 방법이다.
왕들이나 신들의 형상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그림언어로 도움을 준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로서 하나님 나라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브리안 월쉬 (Brian J. Walsh)와 더불어 Transforminng Vision: Shaping a Christian Worldview를 썼던 리챠드 미들톤 (J. Richard Middleton)은 The Liberating Image: The Imago Dei in Genesis 1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표 또는 대리인들로서 인류의 소명 또는 왕적 지위"
이다 . 인류에게는 땅의 자원들과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장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함께 참여하는 권능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는 창 1.26-27과 정확하게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인간은 여섯째 날에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이 만드신 넷째날과 다섯째 날의 피조물들을 통치하는 권세가 주어지고 권위가 부여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주어진 권위이다. 창세기 이야기에는 영혼이나 이성의 능력이나 신의식 또는 어떤 다른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특색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이들 자질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에 중요하지만, 창세기의 하나님 형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들 자질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형상을 담아내는 역할을 할 때에 도와주는 도구들이다.
3. 우상은 결코 아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모든 나라들은 신들을 함께 모아 놓은 만신전이 있었고, 모두 다 자신들의 신들을 숭배하였다. 이스라엘엑 주신 십게명 중에 첫째와 둘째 계명은 고대 사회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경배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이다. 어떤 형상이든지 막론하고 숭배하지 말라
출 20.3-6
두번째 계명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거나 숭배하지 말라" 고 명령한다. 심지어 야훼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포함된다. 이스라엘은 황금송아지를 만드는 사건으로 이 계명을 어겼다 (출 32장).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야훼는 다른 신들과 같지 않게, 자신이 만든 것들과는 독특하게 구별되신다. 야훼는 아로새긴 동물의 형상들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 한 조각 속에 포로가 된 듯이 갇혀 있을 수 는 없는 분이시다.
둘째는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형상을 만드셨다. 인류이다. 살아있는 형상이다. 야훼를 경배하려고 형상을 만드는 것은 야훼가 원하시는 방법과는 다른 대안 방식을 사용하여 야훼와 연결관계를 만들려는 의도이다.
4.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드러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 왕들은 신들을 대표하는 통치자들이었다. 신들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렸다. 왕들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신들의 아들로 때때로 간주되기도 하였고, 종종 신들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편 2편을 보자.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에 사용된 시이다.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왕을 시온에 세웠다. 시편의 핵심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노라" (7절)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세웠다. 야훼와 왕의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한편으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왕들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이스라엘은 심지어 왕들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심상 8장). 왕들도 사사건건이 다른 어떤 이들과 마찬가지로 야훼의 통치에 종속되어 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왕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 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나 왕들은 여전히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의 이미지를 감당하는 역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물론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는 아주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왜? 왕들이 대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실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어, 진정한 왕이란 무엇인가를 지상 사역을 통해서 보여졌다.
5.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
이스라엘에만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왕적 형상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은 오직 왕위계승자들에게만 전가될분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부여된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정치 개념이다. 시편 8.4-6은 "하나님 형상" 무엇인지를 적절하게 잘 요약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나이다.
시편 8.4-6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를 읽을 때에, 보통 생각하기를 인간이 아닌 예수를 말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 시를 창세기 1.26-27에 비추어 읽으면, 둘 사이에 명확한 연결관계가 드러난다. 이 시편은 인류가 창조세계에서 존귀한 신분을 가진 존재임을 노래하고 있다. 인류는 하나님 또는 하늘의 신적 존재들 (천사들)보다는 못하지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신분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창세기 1장 본문에서 "우리"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천사들이 참여하는 천상의 어전회의이다. ( 창세기의 처음 독자들은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전혀 모른다. 삼위일체는 전적인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이 점은 존 칼빈이 이미 지적하였다.) 하나님이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기로 회의를 하고 결정하셨다. 인간은 하나님과 천상회의의 참여자들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이다지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썼다. 영광과 존귀의 관은 전형적으로 신들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이지만, 인간에게도 부여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시편 8편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 창조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피조물은 전혀 없다. 피조물 가운데 인간과 같이 하나님과 같은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전혀 없다. 시편 8편은 창 1.26-27과 온전하게 일맥상통한다.
6.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궁극적인 모델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형상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모델로서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예수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신다.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이시다. 그 누구도 예수처럼 인간의 진정한 자질을 충분하고 온전하게 구체적으로 실현한 사람은 결코 없다.
히브리서 2.5-9은 시편 8편을 인용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언뜻 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긴 논증을 통해 예수가 천사와 모세와 대제사장과 성막보다도 더 탁월하신 분임을 증명한다. 그 중에 시편 인용구는 예수가 천사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할 때에 사용되었다. 시편 8편은 히브리서 기자의 논증을 지지한다. 피조세계는 천사가 아닌 인류에게 부속되었다. 모든 만물이 인간의 왕적 권위 아래 복종하도록 하였다 (8절). 그러나 히브리 기자는 탄식한다. "현재까지도 우리는 모든 만물이 '그'에게 순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8절). 여긱서 '그'는 예수가 아니라 인류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이다 (9절). 예수는 십자가 죽음으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하나님은 예수에게 종속되지 않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도록,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속시키셨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에서 예수가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서 인간의 죽음을 친히 맛보신다.
예수는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 자매들과 같으시나, 궁극적인 인간이시다. 이는 만물이 사실상 그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적 형상의 담지자로서 인류의 고상한 신분은 참이지만, 안타깝게도 전체 인류에게서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서 온전히 실현되었다.
예수는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이시다. 흔히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예수는 이때까지 살아 온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진정하고 온전하신 인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비교하거나 또는 타락하고 왜곡된 역기능적인 그림으로 보면 진정한 인간을 볼 수 없다. 십자가 달려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를 봄으로써 '인간'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골로새서 1.15-20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요지를 말하고 있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15절). 예수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 이는 모든 만물이 그로 인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의 신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본문을 읽고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골로새서 기자가 주장하는 요지의 반밖에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한 아들로서, 예수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이고 장자이시다 (18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는 인류에게 부여된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 역할을 온전하게 체현하신 첫 번째가 되신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을 겪지 않으셨다. 오직 뒤따라 올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그 뒤를 따라 가는 자들이다. 피조물의 첫 아들로서 예수는 그 뒤를 따라 오는 자들이 동일한 신분을 얻을 것임을 보신다. 예수는 창 1.26-27을 '완수'하시는데, 작신을 우해서도 그렇고, 우리 하나님 백성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셨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면에서 그이 형제들과 같이 육신을 입고 탄생하셔야만 되셨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하고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시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실 수 있기 위함이다.
이 주제는 이미 히브리서 1.1-4에서 선포된 내용이다. 하나님이 과거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친히 기름을 부으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핫기고 계신다. 시편 8편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가 새롭게 임명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진정한 다윗 계열의 왕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대표하는 통치자이심을 확증한다. 그러나 이 아들은 한 술 더 떠서 '하나님 영광의 광채요, 존재의 정확한 재현'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통치자이시다. 그런데 다른 왕들과 비교 할 수 없는 통치자이시다. 그 왕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서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고 평화를 이루신 분이시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부여하신 대표하는 통치자로서 인류의 고상한 역할과 신분을 말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진정한 하나님 형상을 손상되고 불완전하고 죄에 종속된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은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만이 실현된다. 그렇다면 성육신이 무엇인지를 훤씬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다. 예수는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담지자이시다. 이때까지 살아 온 어느 인간보다도 가장 인간이신 분이시다. 믿음으로 우리는 회복된 인류에 참여한다.
7.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시작된 회복된 인류에 참여한다. 새로운 인류는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출입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형상으로 똑같이 보이는 것을 더욱 더 체현 (구체적으로 몸으로 실현)하는 방식으로 매일을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예수는 새롭게된 형상의 원인인 동시에 우리가 따라 살아가야 할 모델이시다.
바로 이 점이 역설적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하나님 형상으로 재창조된 존재인지를 보는데 있어서 핵심이다. 예수는 이렇게 진정한 형상 담지자의 역할을 감당할 자로 인류를 승귀시키셨다. 그러나 예수의 성육신은 자신의 신적인 권리를 친히 비우는 행동이었다. 빌 2.6-7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는 친히 자신을 비하하셨다. 성육신은 자기 비하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갱신된 형상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에 모두 다 따라감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예수를 닮는 삶을 매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새롭게된 형상을 감당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빌립복서 3장에서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다. 예수를 아는 것은 결코 단순한 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하는 코이노니아를 경험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전부아니면 전혀 아님을 전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 참여하는 자들은 매일 예수의 십자가와 자기 비하의 표시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새로워진 형상에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롬 8.29).
그리스도인은 이제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대표들이다. 옛날 근동사회의 왕들이나 심지어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왕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들이다. 신약에서 통치를 강조하지 않는다. 신약에서 다른 일들로 강조점이 옮겨졌다. 그리스도인들은 겸손과 사랑과 거룩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을 대변하고 대표한다.
베드로전서 2.9-12는 우리에게 이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출애굽기의 언어를 차용하여, 베드로는 독자들이 '택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께 속한 백성' (9절)이라고 말한다. 강조점은 단지 하나님 클럽에 가입하였다고 붙부추기면 기분을 띄워주려데 있지 않다. 그 다음을 잘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거민들 가운데서 선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초청한 날에 세상 거민들이 그들의 선한 행위들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어떻게 행동할지를 조심해라! 당신은 어쩌면 이때까지 성경을 읽은 사람들 중에 유일한 성경의 사람일수도 있다." 요점은 좋다. 그러나 현실은 훤씬 더 심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던 것을 세상에 대표하여 대변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더 좋은 문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떻게 행동할지를 조심해라! 당신은 어쩌면 이때까지 보았던 사람들 중에 유일한 그리스도의 사람일수도 있다."
창세기 1.26-27이 원래 문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넘어 선 말이다. 창세기에는 겸손이니 고난이니 경건한 삶과은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옳은 말이다. 예수가 창 1.26-27엣거 하나님 형상으로 하신 행동은 구약에서 다른 모든 것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형상을 변혁시키셨고, 구약 의미의 한계를 초월하여 채우셨다. 그림자는 실재를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은 구약과 같이 지배의 개념이 아니다. 진정한 통치는 고난을 통해 성취된다. 딤후 2.13에서, 현재의 고난은 미래적인 차원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가 참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주시는 말씀인 듯하다. 어떤 종류의 종말론적인 통치의 권위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느 곳에서도설명하지 않고 있다. 무엇인지를 탐구라고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싶다. 만족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에 부활에서 이미 행하셨던 것보다는 어느 정도 한 발자국 나아간다. 신약은 현재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인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여기서 예수가 삶으로 친히 보이신 종의 지도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가? 신약의 초점에 여기에 있지, 내일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은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이 형상은 구약에서 아주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의미이다. 즉 피조세계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통치자. 이 형상은 손상이 되었지만, 결국에는 예수 안에서 회복되고 변혁된다. 예수는 하나님 형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대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잇는 자들은 이렇게 새로워진 인류에 일부분으로 참여한다. 그 방법은 고난의 길을 통해 겸손과 사랑과 거룩을 이 세상에서 드러내는 삶을 매일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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