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단어 쩨데크 - 올바름, 공의, 의로움, 의 - 의 성경적 개념과 용법 용례

작성자염찬호|작성시간20.07.24|조회수1,608 목록 댓글 0

 

qd<x,(6664, 체데크)

올바름, 공의, 공정, 의로움

 

체데크(명남)'올바름, 공의, 공정, 의로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0회 나온다(19:15, 19:36, 33:19, 6:29, 35:27, 37:6 ).

 

[참고 - 이 어근은 근본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표준과의 부합을 내포한다. '어근 sdq의 본래 의미는 '곧다' to be straight였다'고 스이드(Snaith)는 주장한다(N. Snaith, Distintive Ideas of the OT, Schocken, 1964, p. 73). 그러나 그는 이 어근이 '기준' norm의 뜻으로 대용되었다고 덧붙인다. 이 단어의 기원이 그렇게 뚜렷하다거나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세속적인 기원을 가진 단어들이 특별한 의미를 받게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본래 곧음을 뜻하는 이 단어가 쉽사리 도덕적 용어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막대' rod, '측정하는 자' measuring rule를 의미하는 카논(canon)이 정경이라는 뜻으로 변하였다. 그러므로 체데크(qd<x, , 6664)란 윤리적 도덕적 표준을 말하며 구약성경에서 그 표준은 물론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qyDIx' , 6662) 그 모든 행위에 은혜로우시도다'(145:17).

 

남성형 체데크(qd<x, , 6664)118, 여성형 체다카(hq;d;x] , 6666)156회 등장한다. 이 두 단어가 의미에 있어서는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Snaith, ibid., p. 72).

 

체데크(qd<x, , 6664) 또는 체다카(hq;d;x] , 6666)의 최초 용례들은 재판관들의 역할과 관련되어 나타난다(15:6, 18:19, 30:33 hq;d;x] , 6666를 제외하고). 그들의 모든 판결은 진실에 따랴야 하며 편견이 없어야 했다(19:15). 이것은 무게와 치수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19:36). 상업상의 사기와 속임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두 용례에서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는 기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는 인격적 관계의 세 양상을 묘사한다. 윤리적, 법률적, 신정적(theocratic)측면.

 

윤리적 측면은 인간 상호간의 행위와 관련된다. 어떤 학자들은(Achtemeier, TheGospel of Right eousness, pp. 68-70) 의가 개개인 관계의 특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견해는 의가 현행 규범의 문제라는 것으로 귀착되고 만다. 그러나 사실상 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된 표준과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대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힘쓴다. 궁극적 의미에서 의로운 사람(qyDIx' , 6662)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3:18). 특히 의인은 욥처럼 가난한 자와 고아를 건져내며 길가는 장님을 도와주고 연약한 자를 지원하며 빈궁한 자의 아비(부양자)가 되어 준다(29:12-15). 이것은 욥의 삶에 있어서 의로운 ''이었다. 해 지기전에 저당잡은 가난한 자의 겉옷을 돌려 줌으로써 밤에 그가 옷을 입고 자게 하는 것도 의로움이 된다(24:13). 이 경우는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란 궁핍하고 의지가지 없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등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순응하는데 있다. 욥의 의들 가운데 여타의 것으로는 나그네에 대한 돌봄(31:31-32), 자기 자신을 위해 부를 추구하지 않음(31:24-25)으로써 자신이나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은 것 등이다. 그리고 그는 종들로부터, 최대한의 힘과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빼앗지 않았다(31:13). 자기의 순결에 대한 욥의 긴 맹세는 세 친구가 인지한 바와 같이 의의 선언이었다(32:1).

 

찻디크(qyDIx' , 6662)는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거저 준다(37:21). 이러한 종류의 백성이 있다는 것은 나라의 영광이다(14:34). 그리고 의인을 기억하는 것은 복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따를 때 의가 도성에 거한다고 한다(1:21). 그러나 죄가 지배할 때 성읍은 매춘부가 된다. 뇌물을 받고 악한 자의 편에 들어다스리는 것은 의의 타락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인의 의(고상함, 하나님을 닮음)를 빼앗기 때문이다(5:23). 다윗은 사울보다 () 외로웠다. 왜냐하면 사울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외관상 하나님께서 사울을 자기 손에 붙인 것 같았으나 그를 죽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의로운 행위의 원천은 하나님이 자기의 판단(또는 율법)과 의를 자기 백성에게 부여하는 데 있다(72:1-2).

 

상기의 내용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밝혀주는 바, 의에 대한 그들의 외침이 온 땅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아모스는 성문에서의 공의를 외쳤다(5:15, 24). 즉 올바른 제도가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 분야에서 일하는 자는 모두 자기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들의 행하는 모든 것에서 의로워야 한다. 아름다운 노래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타락한 종교 의식을 흠향하도록 고무시키지는 못할 것이다(5:23, 24). 공의와 의로움이란 모두 약한 자를 구해주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예레미야는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의는 그 도성을 보존할 것이다(22:1-4).

 

국가에 의해서든 개개인에 의해서든 의로운 행위는, 오직 묵은 땅을 기경하고 의의 씨앗을 뿌리며 자비를 수확함으로써 즉 의를 위한 새로운 기초를 설정함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10:12). 모든 사람은 그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은 새로운 인격자들이 되어야 한다. 의로운 행위는 새로운 마음으로부터 발생한다(36:25-27). 하박국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즉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이사야는 의를 성령의 사역과 결부시켜 말하면서 모든 것이 화평을 산출하며 따라서 영원한 평안과 안전을 가져온다고 말하였다(32:15-17). 이러한 사상이 시 85:10[H11]의 비유적 표현,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는 말씀 배후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가 존재해 왔으므로 인간의 길에는 평화의 복이 임한다. 이사야는 이러한 백성들의 상태를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주의 백성이 모두 의로워지리이다.' 진정한 윤리는 부여받은 의로부터 기원된다.

 

체데크(qd<x, , 6664)의 법률적 측면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법률 하에 있는 모든 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의로운 자 즉 찻디크(qyDIx' , 6662)는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어 있다(23:7). 왜냐하면 율법이 그를 정죄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송시에 의로운 위치(의인의 의: '치데카트 찻디크')에 있는 사람이 뒤바뀌어서는 안된다(5:23).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법률에 있어서 재판관이 사람의 무죄성을 고찰할 때 인간의 법률을 깨뜨렸다는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판단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인간이 어떤 법규를 위반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무죄한 경우가 있다.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부죄한 것과 의로운 것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었다.의의 존재가 종종 히필 어간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구문은 의롭게 만들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유다는 자신과 다말을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옳은 위치를 말한 바 있다(38:26). 즉 다말은 그와 같이 행동할 권리가 있었으나 유다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의 행위에 전적으로 찬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정직하거나 진실한 요구는 일종의 ''이며(17:1, 18:20 [H21]) 항상 거짓과 반대가 된다(37:6). 소송 중에 있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 의롭다는 것은 법률을 어긴다는 관점에서 무죄하다는 뜻이다(30:33). 의로운 자는 의롭다고 선언된다(23:7, 25:1). 욥이 이를 주장한다(19:7). (참조, The Argument of the Book of Job Unfolded, W. H. Greeves[New York: 1891], p.188. 사회의 의를 유지하는 것이 재판관과 왕의 임무이다. 23:7-8, 대상 18:14, 16:12).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은 의로웠다(14:14, 20). 개인의 선행은 심판의 재앙으로부터 건져달라고 여호와께 구할 권리를 성립시킨다. 이와 유사하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자기의 후사로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신뢰가 의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창 15:6에서 가르치고 있다.

 

체데크(qd<x, , 6664)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하여 그에게 적용될 때 수식어로 사용된다. 여호와는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며(대하 12:6, 11:7, 12:1, 1:18) 온 세상의 재판관으로서 지극히 공의롭다(32:4, 119:137, 5:16). 그러므로 그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그의 규범과 그의 판단은 의로우시다(119:144, 119:160, 119:172).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뢰의 대상이며 신뢰를 주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45:7 [H8]) 그의 본질적 의를 표현해 준다. 그러므로 의와 공평은 하나님의 보좌의 주소('기초' foundation, NASB, NIV)이다. 즉 이러한 것들이 항상 하나님의 행동의 특징이 된다(97:2).

 

하나님의 의의 법률적 측면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옹호한다는 뜻에서의 구원이라는 개념이 있음을 알게 된다(참조, 1:27, 46:13에서 '테슈아'['구원' salvation]'체다카'와 병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러한 의에서 출현하는데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때문이다(51:1이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함으로써 의롭다고 말해진다(85:9-11[H10-11], 97:2). 고레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도록 부름을 받는데, 그 까닭은 그는 의롭다고 칭해진다(42:6, 45:13). 하나님은 언제나 의롭기 때문에 그의 구원행위는 그의 의로운 오른 손에 의해 표현된다(41:10). 구원하시는 그의 의는 판단, 성실, 사랑과 함께(36:6-7[H7-8], 그리고 능력과 함께(71:19) 표현된다. 이 구원을 경험하는 자들은 그것을 노래로 찬양한다(40:10[H11], 71:15-16).

 

언약적 측면 또는 신정적(theocratic) 측면은 이스라엘 국가와 관련된다. 그 언약은 전 국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것은 그의 백성이 가야할 길이자(1:1-6, 6:25) 의의 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이 언약 아래서 자기 백성을 고통에서(31:1 [H2]), 그들의 대적들로부터(5:8 [H9]), 악인으로부터(37:6) 건지시며, 이스라엘의 적 앞에서 그들을 옹호하고 적들에게 복수하신다(11:20). 이스라엘이 적들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타당하다(54:14-17). 결과적으로 여호와는 의로우시며 구원자가 되신다(45:21).

 

그러나 한편 여호와는 공의로우므로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그들의 국가적 성소를 대적들의 검에 넘겨주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며 이스라엘의 악행은 어떤 방법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즉 의롭다고 생각될 수 없다. 그러나 의로운 자들은 언약을 기억하여 그것을 준행하며 따라서 그들을 회복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51:1-8).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들의 창조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회개와 개혁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의에 입각하여 구원이 도래하였다. 포로로 잡히 이스라엘은 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지만(46:12) 하나님은 자신의 의에 따라 그들을 되돌릴 것이다(46:13). 여기에서 몇몇 학자들의 생각처럼 체다카(hq;d;x] , 6666)가 구조, 구원, 승리 등을 뜻한다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여 죄인들에게 의를 부여하신다는 뜻으로 보는 쪽이 더 낫다. 왜냐하면 이사야 53장의 가르침에 고난의 종이 죄인들의 죄를 담당함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한다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경건한 자에게 의를 부여한다는, 이와 동일한 법률적 의미가 후에 롬 3:26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가게 한 것은 의가 되며(46:12-13)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들어 이스라엘을 그 땅으로 되돌린 것은 의로 말미암은 것이다(45:13). 그러한 의는 온 세상에 공표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기 대문이다. 이러한 언약의 성취로 인해 하나님은 의롭다고 선언되며(54:14) 이스라엘의 위치는 의로운 즉 찻디크(qyDIx' , 6662)의 위치가 된다.

 

어근이 다음과 같이 발전 내지는 다양화되었다.

(1) 어떤 표준에 부합한다는 추상적 의미(15:6).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요구에 도달하였다.

 

(2) 하나님에 대한 기술적 특징으로서(32:4) 즉 공평하고 의롭다고 묘사됨. 이 때 그 표준은 지고무쌍한 존재로서의 하나님 자신의 뜻과 성품이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예화는(45:9-12) 하나님의 결절이 타당함을 가리킨다.

 

(3) 체다카(hq;d;x] , 6666) 또는 체데크(qd<x, , 6664)가 하나님께 적용될 경우 의로움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품성이 인간 행위의 궁극적 표준이 된다.

 

(4) 도덕적 범죄에 대한 심판의 형벌은 의의 일례이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를 거절한 바로에게 내린 심판들이 그러하였다(9:27). 죄를 심판한다는 것은 의로운 하나님에게 있어서 신적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중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자를 옹호함으로써 그의 의를 보여주신다(18:25). 그 의가 형벌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 의는 회개에 대해 자비를 수반한다.

 

(6) 다윗이 용서를 간구한 용례에서는 칭의의 문제가 나타난다(51:14 [H16]). 다윗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해야할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으나 그러한 공적과는 관계없이 구원을 부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51:16-19 [H18-21]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러한 칭의의 배후에는 진실하게 드려지는 죄에 대한 대속적 희생 제사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결코 후에 시편에 추가된 문구가 아니다. 이 구절들은 롬 3:26과 대등한 구약성경의 말씀이다.

 

(7) 이 단어는 구원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후사들에게 부여된 의로운 지위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떤 송사도 부과될 수 없다(54:17). 이 의를 실제로 메시야가 소유하며(23:6), 또 그에 의해 부여된다. 따라서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신약성경의 교리를 지향하고 있다. 구원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후사들이 가지는 의는, 메사야의 구속적 사역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가하시는 메시야의 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오직 그 구속사업을 통해 부여된 은혜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8) 마지막으로 포로기 이후에 이 어근은 어의가 발전하여 경건한 사람의 행위인 자비, 자선 등을 의미하게 된다(참조, 112:9).

 

이 어근의 의미는 상기와는 다르게 해석한 경우를 살펴보자. 슈렝크(G. Schrenk), 이 단어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규범적 행위(하나님이 규범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규범이 되신다)라는 개염을 완벽하게' 드러낸다고 본 디스텔(Diestel)과 카우츠쉬(Kautzsch)의 견해를 인용한다(TDNT, , p.195). 그러나 슈렝크(Schrenk) 자신은 다음과 선언하였다. '체다카는 관계성을 의미한다. 타인이 관계성을 이유로 하여 자기에게 행사하는 모종의 요구를 충족시킬 때 비로소 인간은 의롭다'(ibid). 그는 이 관계성의 개념을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다으과 같은 견해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다. '2 이사야'는 항상 법적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법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마치 고대 동방의 종주국이 종주권 협정 하에 속국 보호를 약속했던 것처럼, 자기와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견해이다. 슈렝크에게 있어서는 이언약의 개념이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의와 구원의 관계는 언약 개념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체다카(hq;d;x] , 6666)는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지키는 것이자 언약 하의 약속들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의 법적 통치권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는, 자기 백성에 대해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함으로써 그가 그들을 옹호하고 구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ibid). 이처럼 언약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약속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하게 되며 어떤 대속에 의해 충족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라는 개념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언약의 백성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한다는 것은 의요 구원이자 승리인 것이다.

 

스나이드(Snaith)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말한다. '8세기의 선지자들은 체데크-체다카(righteousness)를 윤리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2 이사야는 '이 세상에서 실제로 안정을 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체데크(qd<x, , 6664)를 생각하였다. 그것은 곧 승리와 번영이다'(op. cit., p. 87). 각주에서(p.89) 그는 주장하기를,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의 삶'에 대해 가르친 곳은 후기에 사 26:19(3이사야, 3세기)과 단 12:2(그는 마카비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함)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부활에 대한 여타의 구절들은 재 번역된 것이며 그 구원들의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없으므로) 그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의 즉 구원이란 '인간들로부터 영예를 얻는 복 및 일반적 번영의 복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비평적 이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적 의에 대한 성경적 선언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H. G. Stigers.] (p.1200*).



- 바이블렉스 10,0에서 내용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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