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vzw(4982, 소조)
구원하다 save, 해받지 않게 하다 keep from harm, 보존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a) 동사 소조(호머 이래로)는 일차적으로 '구원하다'(save)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신이나 사람이 심각한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험은 전쟁 중이나(예: Homer, Ⅱ. 15, 290이하; Plato, Symp. 220b) 또는 바다에서(Homer, Od. 5; 130; Lucian, Dialogi Deorum 26, 2)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위험은 질병일 수도 있다(SIG3 Ⅱ620, 13이하; Ⅲ1173, 9). 이 경우 '치료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전쟁이나 항해에 관해서 소조는 '지킨다, 보호한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b) 소조는 '지키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생명을 지키는 것, 사면, 보호하는 것이나 궁핍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나 불로부터 지키는 것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포도주나 재물을 지키는 것, 턱수염을 보존(손상되지 않게)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c) 소조는 '이익을 주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건강이 좋다, 이익을 주다'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소테리아는 '안녕, 복지, 평화, 부요, (곡식이나 열매)의 성장, 건강'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d) 소조는 '내적 존재를 보존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내적 존재나 본질을 보존하는 것을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철학에서 이 단어는 특히 내적 건전이나 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e) 종교적 문맥 안에서 신들은 삶에 따르는 여러가지 위험들로부터 인간들을 구한다. 이 신들은 인간들을 위협하는 악운을 쫓아낼 수 있는 구원자(→soter)요 보호자로 간주되었다.
(f)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신적 계시에 의해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참조: Corp. Herm. 1, 26; 1, 29; 7, 1이하).
(g) 신비 종교들에서 구원은 신비 제의의 행동을 통해 죽고 소생하는 신의 경험에 동참하는 전수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주후 4세기의 라틴 작가이며, 신플라톤 주의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비 제의의 반대자였던 율리우스 휘르미쿠스 마테르누스(Julius Firmicus Maternus)는 "구원 받은 신성의 전수자들"에 대해 말했다. 이 전수자는 신적 본질에 참여하여 이렇게 해서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을 얻는다(Apul., Met. 11, 21). 세례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아주 신빙성이없다. 적어도 이 관습이 사도 교회보다 훨씬 후기에 실행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h) 철학과 종교 분야에서 소조(sozo)와 소테리아(soteria)는 '만물들에 대한 신적 보존'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작(Leg. 10,903b)에서이러한 종류의 질서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였다. 렙티스의 코르누투스(Cornutus of Leptis)에 의하면 제우스는 만물을 생성케하고 보존하는 자(소제타이[sozetai])라고 한다(Theologia Graeca 2[3, 9]). 주후 2세기의 스토아 철학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생명에 대한 보다 높은 신적 질서와 보존(소테리아[soteria])에 대한 사상으로 자신의 정신을 위로하였다(Meditaions 10, 1, 3). 헬라 로마 시대, 즉 운명에 대한 신앙이 신적 조화의 신앙을 대신할 때에 신들의 소제인(sozein)은 불가사의한 재난으로부터 구원하고 지키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에 이르렀다(TDNT Ⅶ 969).
(i) 영지주의에 관한 기록은 후기 기독교의 연금술 문헌에 나타나 있는데, 이 문헌을 통해서 볼 때 영지주의자들은 지식(그노시스)이 인간을 구원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이 지식은 계시나 중개자에 의해 영지주의자들에게 전달되었다(Corp. Herm. 1, 26; 1, 29). 그 내용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간의 구원이다(Corp. Herm. 7, 11).
2. 70인역본의 용법
소조는 70인역본에서 330여회 나타나며, 15개 히브리어의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주로 야샤와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약 150회 사용되었으며, 이 어군은 '구해내다, 구원하다, 돕다, 안전하게 하다, 구원, 구출, 구원행위'라는의미를 가진다.
그 다음으로 말라트(니팔형: 미끄러지다, 피하다; 피엘: 구해내다, 구원하다)의 역어로 약 43회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소조는 신약성경에서 108회 나오며, '구원하다,
(a) 육체적 생명의 구원.
소조는 육체적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행 27:20; 행 27:31에서 소조는 바울의 난파에 대한 기사에 선원들을구원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소조는 베드로의 외침에 나온다. 마 8:25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대목에서의 "주여 구원하소서"하고 울부짖는다.
마 14:30의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대목에서 "주여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소조는 많은 구절들에 죽음으로부터의구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도 신적 구원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방관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29이하, 병행구. 마 27:39이하; 참조: 막 13:2; 막 14:58; 요 2:19).
눅 23:39에 의하면 그들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버림받음에 대해 부르짖은 예수님의 외치심을 듣고서 즉시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라고 말하였다.
요 12:27의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여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히 5:7에서 반영되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들에서 문제의 구원은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수난 사화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구원을 능가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아래에서는 신학적 의미를 다룬다.
(b) 공관복음에서 ① 소조는 예수님의 치유의 이적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기사들에서 치유는 항상 전인(全人)에 대한 것이다. 개인의 믿음은 치유의 성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유효하게 만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눅 8:48; 눅 17:19; 눅 18:4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병행구. 막 5:34; 눅 8:48; 눅 7:50). 이 곳에서 소조는 '낫게하다', 악과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 기사에 대해 주석하면서 힐(D. Hill)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여인을 낫게 한 믿음은 자신의 실존과 행동에 비추어 예수님만이 자신의 상황을 처리하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하는 고백이다.
이 신뢰는 예수님께서 권능으로 그녀의 질병을 추방하시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병을 고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여인의 행동이나 믿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이 치유 행위는 사도들의 행위로 계속되었다. 이 병고침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행 4:9이하).
치유에는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
행 14:9이하에서 바울은 앉은뱅이를 고칠 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약 5:15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② 소조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설명에 나타난다.
마 1:21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구원할 것이다'이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형상으로도 나타나신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옛 이스라엘을 대적들로부터 구원할 때에 하나님의 대행자이었는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자이시다.
막 8:35과 병행구, 마 16:25; 눅 9:24에서 종말론적 구원에 대하여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Cross를 지라는 도전적인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선언하셨다.
막 13:20의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는 말씀은 메시야적 환란에서 구출과 메시야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을 가리킨다.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말씀은 법정 앞에 선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사람은 석방될 것이며 반면에 '예수님과 복음'을 긍정하는 사람은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 생명의 약점을 완전히 통찰하셨으나 주님을 부정함으로 자신의 존재의 안전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를 하신다. 역설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충성으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자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두 구절의 말씀, 곧 막 13:13(병행구, 마 10:22)의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은 의지(뜻)를 강조하고 있다(24절처럼). 결정은 항상 우리 인격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동사 소조는 위험에서 '구출함으로 구원한다'라는 뜻 뿐만 아니라 '안전한 상태에 보호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무서운 어리석음이다. 그는 그의 의지에 의해 자기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런 자가 속세의 모든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의 목숨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R.CH.Lenski).
소조는 막 10:26; 병행구, 눅 18:16(참조: 마 19:26)에서 낙타와 바늘 귀에 대한 말씀에 이어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내용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병행구). "구원은완전히 인간의 가능성들을 초월한다; 공로나 공적에 근거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다. 더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법칙도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행동에 의해 제한된 것이다"(W.L.Lane, Op. cit., 370).
그러나 눅 19:9이하에 보면 이 구원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행동들을 통하여 현실적 사실이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b) 사도행전에서 소조는 13회 사용되었다. 원시 교회의 선포에서 소조(sozo)와 소테리아(oteria)가 → 복음 Gospel의 기초이며, 내용이며, 목표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사용됨으로써 그 단어들은 중요시되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전도의 본질적 특징을 요약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행 4:12에서 베드로는 모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선언하였다. 이 때에 베드로는 성전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 이름 Name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이유로 체포된 후에 변론하고 있었다(행 4:9이하; 참조: 행 3:6). 베드로는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일으키사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신" 종으로서의 예수님을 설교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행 3:26). 행 4:12에서 베드로는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는 절대적이고 우주적 요구라고 주장하였다. 먼저 유대인에게 전달되었고(행 13:26) 다음으로는 이방인에게 전달된(행 16:17등) 사도적 케리그마는 구원의 다른 모든 방법을 배제한다(행 13:38; 행 15:10이하). 왜냐하면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16:31). 신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죄의 용서와(행 10:43; 참조: 행 26:18)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존재한다.
사도행전에서 구원에 대한 진술들은 당면한 현재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구원은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요구와 함께 제공되었다(행 2:40). 미래 구원에 대한 언급은 욜 2:32(MT 욜 3:5)를 언급하고 있는 행 2:21에서 발견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엘 선지자는 종말을 언급하였고 따라서 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종말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엘이 말한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이었던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 이 말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으로 예수님 안에서 몸소 현재하고 계신다(참조: C.Brown).
(c) 바울서신.
바울에게 있어서 소조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만으로 제한하여 사용되었다. 바울이 다른 위험들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을 가리킬 때는 뤼오마이를 사용하였다. 구원의 대상은 프쉬케(목숨)가 아니라 인간의 전(全) 존재거나 프뉴마(영)이다(고전 5:5).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메시지는 케리그마를 통해 인간들에게 전해졌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참조: 엡 1:13; 롬 1:16).
십자가의 도는 특히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고전 15:2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다(엡 2:8).
바울의 선교 활동의 목표는 구원이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바울은 복음 선포를 통해 가능한한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였다(롬 1:15; 롬 11:14; 고전 9:22; 고전 10:33; 살전 2:16; 참조: 또한 고전 7:16). 믿음을 통해 구원 받은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과 대조되었다(고전 1:18; 고후 2:15). 사도 바울은 구원이 인간들에게 제시되고 제공된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구원은 죄의 용서, 화해, 칭의와 달리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 롬 5:9, 롬 5:10에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과 "화목하는 것"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미래)와 구별된다.
고전 3:15의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와 고전 5:5의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고,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롬 10:9; 롬 10:13)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살후 2:10). 따라서 구원은 분명히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롬 8:24의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테 갈 엘피디 에소데멘[te gar elpidi esothemen])"(NEB)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현재 구원과 미래 구원 간의 내적 관계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였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최후의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를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더구나 마지막 판정도 그 때에 선고된다(고전 3:15; 고전 5:5; 참조: 고후 5:10).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운"(롬 13:11) 미래의 구원은 기독교인들이 지향해 나가는 목표이다. 현재의 모든 경고와 징계와 징벌은 우리가 이 종말론적 구원을 잃지 않아야 하는 목적 때문이다(참조: 고전 5:1-13; 고전 9:24-27; 고후 2:10).
그러므로 미래, 곧 두렵고 떨림으로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참조: 빌 2:12).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고 난 후에 이 미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롬 11:25이하). 이 궁극적이며 종말론적인 구원 때에(빌 2:12; 살전 5:8; 살후 2:13) 우리는 첫째로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며(롬 5:9; 고전 3:15; 고전 5:5; 참조: 살전 1:10; 살전 5:9;→분노 anger) 둘째로는 하나님의 →영광 Glory(독사[doxa])을 부여받게 된다. 다음으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 형상 Image을 본받게 되며 태초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신자들을 택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행위는 그 결말에 이르게 된다(참조: 롬 8:29; 살후 2:13).
목회 서신들에는 구원에 대한 언설들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그 언설들은 구원의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해 준다.
(d) 옥중서신에서 소조는 에베소서에서 2회 나온다.
엡 2:5에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첫째 그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그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이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자발적인 것이다.
두번째로 강조되어 있는 것은 이 구원이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신약성경은 현재(고전 1:18; 고전 15:2; 고후 2:15), 혹은 미래의 경험(롬 5:9, 롬 5:10)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구원이란 현재의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죄의 실제 자체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으로부터의 분리, 혹은 무조건적 속죄로서의 구원에 대한 표현에는 완료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완성된 행위를 의미하며, 그 결과로 일어나는 계속적이고 영속적인 행위까지도 의미하게 된다(로빈슨).
엡 2:8에서는 5절에서 보다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事役)이다.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것을 받은 인간 편에서 하는 일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로서 규정지을 수 있을 뿐이다(롬 3:22; 롬 3:25; 갈 2:16; 벧전 1:5 등). (참조: F.Foulkes).
목회서신에서 소조는 7회 나타나며, 구원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해 준다.
① 하나님께서는 만인 구원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지식 Knowledge)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② 예수님의 임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딤전 1:15). 이 고백 언설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 간증으로 강조된다. 즉 자신이 은혜의 구원하는 능력을 경험하였고,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하는 간증이다.
③ 구원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수많은 구절들에서 증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딤후 1:9).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역사하는 이 부르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딛 3:5에서도 우리의 행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자비하심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서 구원은 세례(침례)와 성령을 통한 삶의 갱신과 연결된다.
④ 딤후 4:18에는 장차 임할 구원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주님의 왕국 안으로 구조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이곳에서 왕국은 에프라니온: '하늘의'로 칭해지니 곧 종말론적인 나라이다). 딤후 2:10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이니 곧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딤전 4:16에서바울은 디모데와 청중들에게 그가 가르침과 생활에서 단련된 신실성을 나타낸다면,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딤전 2:15에서 바울은 여인들이 어머니로서의 정절을 잃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거룩함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부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기 위해서 혹은 육체에 대해 멸시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13절 이하의 이와에 관한 언급을 고려하여, 창 2:3, 창 2:16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 쓰여진 것 같기도 하다.
(e) 공동서신에서 소조는 9회 나타난다. 베드로전서에서 소조는 벧전 3:21과 벧전 4:18에만 나온다. 벧전 3:21에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세례(침례)로 표현한다. 세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지배를 당하는 사망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구원한다고 한다. 이 의미에 있어서 세례는 노아와 그 가족을 "물로 말미암아"(벧전 3:20) 구원함에 대한 원형(antitype)이다.
벧전 4:18은 잠 11:30의 인용이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칭의된 죄인이 심판을 통하여 불가피한 고통과 손실을 겪으며 어렵게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태도와 생활의 악한 행위에서 이중적으로 잘못된 불경건한 죄인들의 종말은 어떠하겠는가? 여기서 구원은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참조: A.M.Stibbs).
벧후 3:15에서 독자들은 재림이 지연되는 주요 이유인 하나님의 참으심을 그들의 최후 구원의 동기로 받아들이라고 권고받는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그들이 성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궁극적 구원은 보장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종말론과 윤리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야고보서에서 오직 동사 소조만 5회 나오며, 언제나 최후 심판 때의 구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약 5:15의 경우는 예외이며, 맨 앞에서 다루었다.
유다서에서 소조는 2회 나오는데 유 1:5에는 출애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그러나 유 1:23에서는 그 기반을 현재 여기에 두고 있는 심판 때의 구원이 다루어져 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f) 히브리서에서 소조는 2회 나온다. 히 5:7에서 소조는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7:25에서 소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중개자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초림에서예수님께서는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미래적 구원 활동을 위한 기초를 구축하셨다. 영원히 사시는 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g) 요한의 기록에서 소조는 요한복음에서 56회 나오며, 요한 서신과 계시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4회는 구원의 행위를 전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요 3:17과 요 12:47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요 5:34에서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 대해 적용되고 요 10:9에서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구원의 중보자이시다.
그리고 2회(요 11:12; 요 12:27)는 육체적이며 감정적인 위급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신약성경 1(a)를 참조.
(참조: J. H. Thayer; W. Foerster; C. Brown; J. Schnei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