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특사 민영환, 7개월이 긴 여정 끝에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다.
-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모스크바까지 머나먼 대장정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과거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의 역사를 말해 주는 오래된 문서와 귀중한 책들이 소장돼 있다. 이 가운데 1백여 년 전 러시아 궁중 관리부에서 출간한 황실 자료집에는 바로 1896년에 거행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상세하게 담겨져 있다.
1917년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황제를 지냈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책에는 대관식을 축하하러 온 각국 외교 사절단의 사진도 실려 있다. 그런데 사절단의 사진 중에 뜻밖의 사진 한 장을 찾았다. 러시아 고관과 함께 있는 낯익은 모습의 이들.... 갓을 쓰고 도포 차림을 한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모습. 이들은 바로 조선왕조의 외교 사절단이었다. 사상 최초의 러시아 특사, 민영환(閔泳煥).
그런 민영환은 누구인가? 1905년 민영환이 을사늑약 체결에 분통해하며 시국을 한탄하다가 자결한 후, 피 묻은 옷을 보관해 뒀던 방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한다. 민영환의 피로 물든 나무라 해서 혈죽(血竹)이라 부르는데, 방에서 솟은 대나무의 잎사귀도 45개로 민충정공이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았다고 한다.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민영환의 충정이 이 대나무로 자랐다고 해서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혈죽과 함께 을사늑약(乙巳勒約) 때의 순국열사로 유명한 민영환(閔泳煥). 그는 구한 말, 조선의 운명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던 절박한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던 것이다.
- 자결하기 1년전인 1904년경의 민영환 모습
구한 말,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대해 자결한 순국열사로 알려져 있는 충정공(忠正公) 계정(桂庭) 민영환(閔泳煥). 그는 최초의 러시아 외교 사절로서 고종에 의해 1896년 러시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민영환이 특사로 러시아에 처음 온 것은 1896년 5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크레믈린 궁 한 켠에 있는 우즈벤스키 사원. 이곳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우즈벤스키 사원은 전통적으로 황제의 대관식이 열리던 장소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은 이곳에서 거행됐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 특사 일행은 축하 사절로 참석한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를 3백년 간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다. 1917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고 제정 러시아가 막을 내릴 때까지 러시아의 황제였기 때문에 마지막 황제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당시 사행 기록인 ‘해천추범’에 따르면 대관식 날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5월 22일(음 10일. 러시아력 10일) 맑음
『일찍 일어나 다시 친서와 예물단자를 살폈다. 일행은 대례복을 입고 기다렸다. 오후 1시에 궁내부에서 공사가 탈 마차 한 량을 보내왔다(6필의 말을 매었고 황금 수레에 황금지붕이다). 또한 한 량(4필의 말을 매었고 붉은 수레에 푸른 지붕이다)은 수원과 참서관이 타는 것이다. 또 말 탄 심부름꾼(금으로 수놓은 검은 의관을 썼다)여섯이 호위하여 동행한다. 장례원 고등관 황족 공작 왜실즉코프가 부하 관리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인사한다. 같이 궁전(크렘린 대궁전-옮긴이)으로 들어가는데 파스코프와 불란손도 함께 들어갔다. 참서관 김득련이 친서와 예물단자를 받들고 크렘린 궁에 도착하였다. 예관(禮官)이 우리를 맞아 휴게소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집에 금빛을 칠했다). 근시관(近侍官)이 알현하라고 전하고 황제가 있는 방 밖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나는 친서와 예물단자를 받들고 수행원 윤치호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고, 참서관 김득련ㆍ김도일은 잠시 방 밖에 서 있었다. 근시관이 문을 열고 역시 들어오게 한다. 모두 문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조금 나아가 무릎을 꿇고 황제 앞에 이르러 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관을 벗고 일어서 있고 황후 또한 일어서 있다(황제의 복장은 어제와 같다. 행차할 때 황후의 옷은 연분홍색이었다). 그 옆에는 단지 근시관 한 사람만 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 먼저 축하의 글을 읽자 윤치호가 영어로 번역해서 전하였다. 내가 친서와 예물단자를 받들어 바치니(친서와 축하의 글 한 장은 함께 친서의 봉투 속에 넣었다) 황제는 친히 받아 시종하는 신하에게 건네준다.
나는 황제와 황후를 향하여 안부를 묻고 다시 황태후의 안부를 물었다. 황제는 영어로 대답하기를, 대조선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온다 하여 대단히 기뻤는데 이제 평안히 도착했으니 더욱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또 어느 경로로 왔느냐 물었다. 상하이를 경유하여 요코하마로 가서 태평양을 건너 뉴욕ㆍ대서양ㆍ런던ㆍ베를린을 거쳐 그제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답했다. 또 모스크바의 경치가 어떠냐고 물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땅이 크며 인민이 번창하고 또 지금 경사스러운 의식을 맞아 성대한 의식을 볼수 있게 되니 기쁘고 매우 다행한 일이라 대답하였다. 이어 물러나와 전과 같이 세 번 무릎을 꿇었다. 예관이 인도하여 문을 나와 마차를 타고 공관으로 돌아왔다. 오후 3시에 외부대신 로바노프를 방문하였다. 궁내부에서 경축식 절차를 인쇄해 보내왔다.
- 우즈벤스키 사원에서 열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모습
- 대관식 후 행진 장면, 당시 강대국이던 러시아의 위상이 느껴진다.
1896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관련된 기사를 싣고 있는 당시 신문에서 조선 사절단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민영환 특사 일행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병풍 2개와 세죽렴, 2층 자개함, 백동조각화로 2개, 그림 4폭을 예물로 가져왔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은 러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질 만큼 성대한 국제 정치 외교의 장(場)이었다는 것은 참석한 외교사절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의 막강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홍장(李鴻章)은 청나라 사절단 대표였다. 일본 정계와 군부의 최고 실력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역시 일본의 왕자와 함께 참석했다. 이들 틈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여야 했던 민영환. 그는 국제 정치 외교 무대에서 조선의 운명을 건 대러시아 협상을 펼쳐야 했다.
러시아에 간 조선의 외교사절단 민영환 일행은 당시 테너 가수의 공연을 생전 처음 보았다. 그는 테너 가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웬 신사가 목살에 힘줄이 돋칠 정도로 소리를 지르니 모두 그를 우러러 보더라. 서양에서 군자 노릇 하기란 원래 저리 힘든가 보다.” 그는 또 발레하는 모습도 처음 보며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 가녀린 소녀를 학대하다니 서양의 군자들은 참으로 짐승이로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풍물과 관습이 다른 서양 국가 러시아. 러시아는 당시 조선인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나라였다. 최초의 러시아 외교 사절단인 민영환 일행에게 낯선 서구 문화는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민영환 특사를 대표로 수행원인 윤치호(尹致昊)와 손희영(孫喜永), 민영환의 비서 김득련(金得鍊). 그리고 통역관인 김도일(金道逸), 안내인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관의 스타인(Stain)까지 모두 여섯 명. 아주 단출한 외교 사절단이었다. 이 민영환 특사 일행이 러시아로 출발한 것은 1896년 4월 1일이다. 인천항에서 러시아 군함 꾸레맛시호를 타고 중국 상해로 가서 또다시 영국 상선 퀸엘리자베스호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간다. 일본에 도착한 민영환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해 캐나다 벤쿠버로 간다. 그런데 왜 시베리아 대륙이나 인도양을 건너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갔을까.
당시에 모스크바를 갈수 있었던 수송로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방법, 인도양 횡단, 태평양 횡단 세 가지였다. 시베리아 철도는 완공이 안됐기 때문 갈 수 없었고, 인도양은 선편이 적었다. 한번 배를 놓치면 제 시간에 갈수 없었다, 태평양 노선은 일단 선편이 많고 시간이 걸리지만 안정적이어서 그 당시 태평양 노선을 선호했다는 걸 알 수 있다.
- 제물포를 출발해 태평양, 미대륙, 대서양, 유럽대륙을 거쳐 모스코바까지의 대장정 지도(EBS자료)
태평양을 건너는 한 달간의 기나긴 항해 끝에 정박한 첫 항구가 캐나다 벤쿠버다. 해천추범(海天秋帆)에 외국 이름은 한글로 적혀 있는데 낯선 나라 벤쿠버를 민영환은 이렇게 적었다. ‘욍커우벌.’민영환 외교 사절단은 배에서 내려 이곳 벤쿠버에서 하루를 묵는다. 당시 머물렀던 곳은 호텔 벤쿠버다. 이 호텔 벤쿠버에서 민영환은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를 경험한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민영환 일행에게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본 감회를 민영환은 해천추범에 이렇게 적었다. “오르내리기 어려울 것을 생각하여 아래층에 집 한 칸을 마련하여 전기로 맘대로 오르내리니 참 기이한 시설이다.”
이번에는 캐나다 벤쿠버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대륙 횡단 기차를 탄다. 가마를 타고 다니던 조선사람 민영환은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의 위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나는 곳은 바다를 껴서 길이 험한데 산에는 사다리를, 물에는 다리를 놓고 쇠로 궤도를 놓아 바람이 달리고 번개가 치듯이 빠르니 보는 것이 금방 지나가 마치 꿈속과 같고 아득하여 기억할 수가 없다.”
러시아로 가는 여정은 멀고도 멀었다. 민영환 특사 일행은 뉴욕에서 또다시 영국 상선 루마니아호를 탄다. 미국 뉴욕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 리버풀에 도착, 런던으로 향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였던 런던의 번화함은 민영환에게 서구 문질 문명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민영환은 러시아로 가는 도중 일본과 유럽을 두루 거쳤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뛰어난 제도와 발전상을 체험하고 한편 놀라움 한편 조선 현실이 얼마나 떨어져 있나 괴리감과 좌절감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서구의 뛰어난 제도와 문물을 우리나라에 접목, 발전시킬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아무튼 민영환은 런던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 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1896년 5월 20일,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한 러시아 특사, 민영환. 인천에서 출발한지 무려 50일만이다. 모스크바 파바로스카야 거리 42번지. 이곳엔 모스크바에 도착해 민영환 특사 일행이 묵었던 숙소가 남아 있다. 정부기념물 표시, 건물15 42번지, 번지수도 변함없다. 이 건물은 얼마 전까지 아프카니스탄 대사관으로 사용됐다. 러시아 정부 지정 기념 건축물로 잘 보존돼 있다. 건물은 옛날 모습 그대로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한국 대사관인 것이다.
1895년, 조선왕조의 민씨 왕비. 훗날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유럽에도 알려졌고 프랑스의 일간지에는 리옹 르와이에라는 사람이 그 장면을 삽화로 그려 넣기도 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친일 내각을 수립하고 조선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고종(高宗)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당시 고종은 조선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음식에 독약을 넣어 올릴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미국 공사관이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만든 밀폐된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조선은 이렇게 국왕의 안전조차 보장 받을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19세기말 외국 공사관들이 몰려 있어 공사관 거리라고 불렸던 정동. 이곳은 당시 정치 외교의 중심지였다. 정동에는 눈에 띄는 이국적인 건물이 하나 있다.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 건물 흔적이다. 러시아 공사관의 본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건물의 중심이었던 전망탑만 홀로 남은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 의해 르네상스풍으로 설계된 조선 시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명성황후 시해 후 이곳은 고종이 일본의 압력을 피해 일 년 간 피신해 있던 곳이다. 우리에게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건물 주변에는 러시아 공사관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 주춧돌이다. 주춧돌의 흔적으로만 봐도 당시 러시아 공사관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동의 넓은 언덕바지에 지어진 러시아 공사관의 전체 면적은 무려 6천8백 평에 달했다고 한다. 한옥을 개조해 쓰던 다른 공사관과 달리 유럽풍의 2층 건물로 화려하게 지었다. 1884년 외교 관계를 맺은 후 급속도로 조선과 가까워졌던 러시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 일본을 견제해 줄 유일한 나라였다.
- 1885년에 세워진 서울 정동의 러시아 공관(국경일이었는지 러시아 국기가 건물 곳곳에 게양돼 있다)
그런데 러시아 공사관 뒤쪽에 예사롭지 않은 통로가 하나 있다. 높이 1.5m, 넓이는 1m. 통로 길이는 50m 정도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공간이다. 러시아 대사관 건물 아래로 통하게 돼 있다. 시멘트로 덧씌워졌지만 원래는 벽돌을 쌓아 올린 이 통로는 무슨 용도일까? 바로 러시아 대사관과 외부를 연결하는 비밀 통로다. 비밀 통로가 설치돼 있는 러시아 공사관. 왕비가 살해되고 일본의 위협으로 고종의 신변마저 불안했을 정도로 조선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린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비록 러시아의 힘을 빌렸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기 일보 직전 기사회생한 조치였다.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숨통이 트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아관 파천으로 조선에서 러시아의 입지는 강화된 반면 일본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의 무력(武力) 시위는 계속됐다. 남의 나라 공사관에 계속 머물 수도 없고 궁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고종에게는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돌파구가 바로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었다. 러시아의 원조를 얻기 위해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특사로 파견한 것이다. 조선의 운명이 걸린, 러시아 특사의 임무. 그렇다면 고종은 왜 러시아 특사로 민영환을 파견한 것일까.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 씨는 명성황후의 귀중한 친필 편지를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오빠 민승호에게 보내는 문안 편지다. 민승호(閔升鎬)는 민영환(閔泳煥)의 숙부로 명성황후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결국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당시 최고의 세도가인 여흥 민씨 집안 출신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민영환. 그는 고종이 신임하는 최측근이었다. 민영환을 러시아 특사로 보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벨기에 공사가 민영환에게 보내는 만찬 초대장이다. 민영환은 1895년 미국 주재 공사에 임명되기도 했고 정동의 외교관들과 교류가 깊은 인물이었다. 국제 정세가 밝았던 민영환. 그는 당시 조선 외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일제의 총구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돌파구였던 러시아. 조선의 운명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나러 간 민영환 특사에게 달려 있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일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상황이었다. 조선은 일본을 견제해 줄 강대국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황제를 만나러 간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러시아의 원조를 얻기 위해 러시아로 간 민영환. 그는 어떤 외교활동을 벌였을까?
러시아 대외문서보관소에는 1896년 당시 러시아와 조선 관련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뜻밖에도 한문 서류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바로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와 국서들이다. 조선 왕실의 문양인 오얏꽃이 새겨진 문양 봉투도 잘 보관해 놓았다. 대관식 예물 목록도 남아 있는데 당시 러시아 신문에 실렸던 내용과 같다. (병풍과 세죽렴, 백동 조각 화로 등 가져간 예물과 그 개수를 적어 놓았다.) 고종이 보낸 국서다. ‘대군주 성헌(誠軒) 이희(李熙)’즉 조선 국왕 고종(高宗)의 서명이다.
- 민영환에게 특사로 임명한 칙명
(당시 독자적 연호인 建陽을 사용했으며, 大君主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민영환은 어떤 외교 교섭을 한 것일까? 민영환 특사와 러시아 정부 사이의 회담을 기록한 문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회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민영환 특사와 러시아 대표의 유일한 회담 문서인 이 서류들에는 당시의 상황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조선 측의 요구 사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회담의 절충 과정들이 세밀하게 정리돼있는 일차 자료들이다.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측에 요구한 조건은 다섯 가지였다.
본회담에서는 보호대 파견, 한국에 대한 차관 제공, 러시아 고문관 파견 등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또 러시아가 언제라도 다른 강대국의 침입 특히 일본의 식민지 야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민영환은 곧바로 러시아 측과 교섭을 벌였다. 협상은 러시아 황제 접견부터 시작됐다. 교섭을 위해 니콜라이 2세를 무려 네 차례나 만났다. 실질적인 협상 창구는 러시아의 실세였던 재무 대신 위떼. 외교 총책임자인 로바노프 외부 대신. 당시 러시아를 움직이던 핵심인물이었다.
그러나 교섭은 순조롭지 못했다. 먼저 3백만원 차관부터 문제에 부딪혔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재정의 여유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군사 지원은 더 큰 난항에 부딪혔다. 당시 일본 특사단 대표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 문제를 놓고 비밀 협약을 체결한다, 이른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다. 핵심 내용은 일본과 러시아는 상호 협의 없이 조선의 군사와 재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협상 좌절에 대한 민영환의 낙담은 컸다. 영어 통역관이었던 윤치호의 일기에서 민영환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영어 실력자였던 윤치호는 사행 일기를 영어로 기록해 두었다. “민영환은 너무 낙심하여 아무데도 가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집안은 그의 한숨소리로 가득 찼다.” 협상에 진전이 없자 민영환 특사 일행은 대관식 이후 모스크바에서 상페테르부르크로 간다. 상페테르부르크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다. 모스크바에서 대관식이 끝나고 니콜라이 2세는 상페테르부르크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민영환 특사 일행도 황제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이다. 민영환의 외교 교섭 노력은 집요했다. 러시아 황제를 비롯한 핵심 인사들과 잇따라 접촉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석 달 동안의 끈질긴 노력이 계속됐다.
- 러시아 외교부 관원(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가장 왼쪽은 수행한 러시아측 무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앞줄 가운데가 민영환, 왼쪽에서 두번째가 영어 통역관이었던 윤치호)
마침내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민영환 특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협상은 타결됐다. 협상 내용은 푸차타 대령을 단장으로 한 13명의 러시아 교관을 파견하여 조선 군대를 근대적 군대로 양성하는 것이다.
당시 한 약소국인 조선의 외교관이 강대국을 상대해서 국권을 수호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민영환 공사의 경우에는 당시 대한제국이 매우 약화되었던 그런 상황에서 당시 강대국의 러시아 황제를 상대로 해서 외교를 전개했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사아로부터 군사 교관 파견을 얻은 것 당시 상황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하겠다.
1백여 년 전 한반도의 위기를 타결하기 위해 머나먼 러시아에 최초로 파견된 조선 특사 민영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13명의 러시아 교관단과 함께 조선의 희망을 안고 귀국한다.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를 출발한 날짜가 1896년 4월 1일, 귀국한 날짜는 10월 21일이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석은 무려 7개월이나 되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민영환 특사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해 러시아 최고의 실력자들을 만나며 3개월 간 끈질기게 대관식 정상 외교를 벌였다. 결국 러시아를 설득해서 13명의 러시아 교관을 데리고 오는데, 13명의 러시아 교관이라는 결과가 초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당시 조선에게 이들은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교관과 함께 귀국한지 3일 뒤, 10월 24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논설이다. ‘아라사(俄羅斯) 군사는 세계에 매우 엄한 법률을 군중에서 쓰는 고로 이런 학교에서 교육한 사관들이 조선 군사를 조련하거든 조선 군사도 규모가 그렇게 속히 되기를 바라노라.’당시 13명의 러시아 교관들에게 거는 기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조선에서 과연 어떤 활동을 했을까? 그리고 민영환 특사는 돌아와서 또 어떤 일을 했을까?
러시아 교관단이 들어오기 전 당시 조선 군대의 조직력은 물론 규모는 열악했다. 한 나라의 군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치안 유지도 힘들 정도로 조선 군대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이런 조선 군대를 상대로 러시아 교관단이 교육하는 동안 민영환은 새로운 중책을 맡아 조선군 양성에 힘쓴다. 민영환은 군부대신, 즉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임용되어 조선의 군사 총책임자로 군정 전반을 총괄한다. 당시 군부대신 민영환에 대한 조선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가는 독립신문 사설에 잘 나타나 있다. ‘민영환이 군부대신 겸 의정부찬성을 맡으니 우리는 매우 즐겁고, 민씨가 이 중임을 맡아 조선 육군이 세계에 뒤떨어지지 않는 군대가 되길 바라노라.’이제 민영환은 러시아 교관단과 함께 조선 관군의 군제정비와 국방정책 입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국왕의 신변조차 보호할 수 없었던 조선 군대, 어렵게 탄생한 조선 군대는 이후 대한제국 군대의 근간으로 성장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영환의 노력도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낸 것이다. 러시아의 세력을 방패삼아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했던 민영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자 민영환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자결로 순국하게 된다.
어렵고 힘든 시기, 나라가 힘없이 쓰러져 가던 때인 구 한말, 몰락해 가는 나라를 붙잡고 민족의 운명을 되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였던 민영환(閔泳煥). 그는“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 자료 도움 : http://www.korea9000.net/
<참고 자료>
민영환(閔泳煥, 1861<철종 12)>~ 1905<광무 9>)
구 한말 서울에서 태어나 민씨정권의 세도 속에서 관직에 진출했고,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45세 나이로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1896년과 1897년 특명전권대사로 상하이·나가사키·도쿄·밴쿠버·뉴욕등을 거쳐 러시아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2차례에 걸친 해외 견문을 통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에게 건의했다. 그중 군제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원수부에 의한 육군통솔이 이루어졌다. 1904년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 후 순국했다.
해천추범(海天秋帆)
민영환이 제정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6개월 2일 총 204일간 11개국을 망라한 대장정의 기록을 담은 기행문이다.
이 ‘해천추범’이라는 제목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뜻으로, 조선 근대화라는 과제를 안고 선진문물을 면밀하게 고찰하고 이를 조선에 적용하기 위해 부심했던 민영환의 노력이 담겨 있다. 정치적 격변기와 근대적 문화 수용의 충격을 직접 경험한 조선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