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역사 기록, 三田渡의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大淸 崇德元年冬十有二月, 皇帝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時我寡君, 棲于南漢, 澟澟若履春氷, 而待白日者, 殆五旬。東南諸道兵, 相繼崩潰, 西北帥逗撓峽內, 不能進一步, 城中食且盡。
"대청(大淸) 숭덕(崇德, 淸 太宗의 연호) 원년(1636년, 인조 14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과군寡君, 淸 황제에 대한 겸손한 말로 인조仁祖를 뜻함)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卷秋蘀, 爐火之燎鴻毛, 而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勑諭之曰 : "來, 朕全爾。否, 屠之。" 有若英、馬諸大將, 承皇帝命, 相屬於道。
이때를 당하여 대병(大兵)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於是我寡君, 集文武諸臣謂曰: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玆矣。
由予昏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卽還我寡君於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撫民勸農, 遠近之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生靈, 생령)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小邦之獲罪上國久矣。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回, 恩莫大焉, 而小邦迷不知悟。 丁卯歲, 今皇帝命將東征, 本國君臣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國, 疆土復完, 弘立亦還矣。
우리나라가 상국(淸나라를 말함)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1619년, 광해군 11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강)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1627년, 인조 5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강)홍립도 돌아왔다.
自玆以往, 禮遇不替, 冠蓋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涉不遜, 而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卽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 丁寧反覆, 不啻若提耳面命, 而終不免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변신(邊臣, 변방을 지키는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皇帝旣以大兵, 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曁卿士家小, 俱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內侍看護, 旣而大霈恩典。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旣亡而復存, 宗祀已絶而還續。 環東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古昔簡策所稀觀也。於戲, 盛哉!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편사(偏師, 한쪽 군대)에게 명하여 강도(江都, 강화도를 말함)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과 왕자 그리고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漢水上游三田渡之南, 卽皇帝駐蹕之所也, 壇場在焉。 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 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 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仁聲武誼, 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玆也。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주필(駐蹕, 황제가 행차를 머무름)하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수부(水部, 공조工曹의 다른 이름)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顧摹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曰 :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새긴 비문(銘)은 다음과 같다.
天降霜露 載肅載育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惟帝則之 竝布威德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皇帝東征 十萬其師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殷殷轟轟 如虎如豼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西蕃窮髮 曁夫北落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執殳前驅 厥靈赫赫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皇帝孔仁 誕降恩言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十行昭回 旣嚴且溫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始迷不知 自貽伊慼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帝有明命 如寐之覺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我后祗服 相率以歸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匪惟怛威 惟德之依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皇帝嘉之 澤洽禮優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載色載笑 爰束戈矛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何以錫之 駿馬輕裘
무엇을 내려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都人士女 乃歌乃謳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我后言旋 皇帝之賜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皇帝班師 活我赤子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哀我蕩析 勸我穡事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金甌依舊 翠壇維新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枯骨再肉 寒荄復春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有石巍然 大江之頭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萬載三韓 皇帝之休
만년토록 삼한(우리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嘉善大夫 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臣 吳爾徵 奉敎 篆
資憲大夫 漢城府 判尹 臣 吳 竣 奉敎 書
資憲大夫 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臣 李景奭 奉敎 撰.
崇德四年十二月 初八日 立.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臣, 이이징 봉교 전(篆, 전서로 장식)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 臣, 오 준 봉교 서(書, 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臣 이경석 봉교 찬(撰, 지음)
숭덕 4년(인조 17년, 1639년) 12월 초8일 세움.
<한자 해설>
擣 찧을 도, 모일 주, 밸 주
眷 돌아볼 권, 돌볼 권
- 권속(眷屬) 한집에 거느리고 사는 식구, ‘아내’의 낮춤말.
蘀 낙엽 탁, 택사 택 (낙엽(落葉), 대껍질, 갈대 잎, 떨어지다)
燎 화롯불 요
鴻毛 기러기의 털(극히 가벼운 사물을 뜻함)
托 밀 탁, 맡길 탁(밀다, 받침, 맡기다, 대(臺), 부탁함)
翅 날개 시(날개, 나는 모양, 다만 …만이 아니라)
詣 이를 예(이르다, 가다, 나아감, 철이 되다, 도착하다)
賚 줄 뢰, 줄 래(주다, 사물(賜物), 위로하다)
- 석뢰 [錫賚] 선물로 내려 받은 물건. 또는 하사(下賜)함.
蕭 쓸쓸할 소, 맑은대쑥 소
豼 비휴 비(비휴(貔貅: 표범의 일종), 맹수(猛獸), 너구리)
詎 어찌 거(어찌, 부터, 몇, 적어도, 진실로(眞實-), 멈추다, 그치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冋 들 경(들, 서울에서 먼 곳, 국경(國境) 근처)
曁 미칠 기(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다다르다, 도착하다)
巍 높을 외, 높을 위, 높고 클 외
俘 사로잡을 부(사로잡다, 산 채로 잡다, 노획하다(虜獲--), 빼앗다, 가지다, 포로(捕虜),
노획물(鹵獲物) , 벌(罰)
殳 몽둥이 수(나무 지팡이, 창(槍) 자루, 서체(書體)의 이름)
怛 슬플 달, 방자할 단
<삼전도비 개요>
흔히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 또는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로 불리는 이 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서, 청(淸)의 태종 홍타이지(太宗)가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왔을 때(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항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비로,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비신의 앞뒷면에 몽골, 만주, 한자 이렇게 3개국 문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은 근래 비를 다시 세울 때 새로 만든 것이며, 뒤에 보이는 거북받침이 원래의 것이다.
청나라는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족은 본래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작은 부족이었으나 명나라의 국운이 쇠퇴하는 틈을 타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의 세력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운다. 이에 명나라는 팽창하는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임진왜란을 치른 뒤의 피폐한 상황 속에서도 고민 끝에 광해군 11년(1619) 만주 지역으로 군사를 파병해 후금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이를 빌미로 후금은 인조 5년(1627)에 쳐들어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킨다. 전후 처리로 두 나라는 화약(和約)을 맺기는 했으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어서 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다가 인조 14년(1636) 병자년 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도 숭덕(崇德)이라 정하면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기에 이른다. 두 나라의 관계가 더욱 불편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런 와중에 그해 3월 승하한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의 조문을 위해 청의 용골대(龍骨大), 마보대(馬保大) 등이 조선에 파견되면서 역사는 한차례 광풍을 몰고 오게 된다. 이들은 귀환 길에 조선 조정에서 변장(邊將)들에게 내린 청을 배척하라는 유문(諭文)을 입수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청 태종은 같은 해 12월 직접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군의 선발대가 한양으로 입성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항쟁을 꾀하였다. 그러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군량의 보급로와 지원병을 차단하자 무력해진 왕은 이른바 척화삼사(斥和三士)인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을 적진으로 보냈으며, 이듬해 1월 30일에는 결국 청군이 머물고 있던 한강 남쪽의 삼전도로 나와 수항단에 무릎을 꿇고 치욕의 강화를 맺는다. 바로 이 자리에 인조 17년(1639) 청의 강권으로 조선으로서는 치욕의 역사가 되는 청 태종의 공덕을 새긴 비를 세우게 되니, 이것이 곧 삼전도비이다.
비는 화강암으로 된 귀부(龜趺, 거북받침)와 대리석을 다듬어 세운 비신(碑身, 몸돌)과 이수(螭首, 지붕돌)를 갖추고 있는데, 비신과 이수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네모진 좌대 위에 놓인 귀부는 매우 두툼하여 둔중한 느낌이다. 귀부의 거북껍데기에는 가는 융기선을 되풀이하여 사각무늬를 조각하였으며, 비좌(碑座)를 중심으로 해서 엎어진 연잎 한 장을 커다랗게 돋을새김함으로써 조선시대 석비의 통식을 보이고 있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세 나라의 문자로 씌어 있어 매우 특이하다. 즉, 비신의 앞면 왼쪽에는 몽골문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의 비 가운데 유일하다. 비문은 당시 이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篆額)의 글씨는 예조참판이었던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당시 비문은 조선의 대신들이 지었는데 관여하기를 서로 피했다. 인조는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인조가 이에 따르지 않자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다. 그런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이 글을 썼다고 한다.
뛰어난 문장 탓에 이 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자손에게 '글을 배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글씨를 쓴 오준 역시 붓을 잡았던 오른손을 돌로 찍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또한 이경석은 훗날 이 일로 인하여 송시열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수에는 가운데 있는 여의주를 다투느라 용틀임하는 두 마리 용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돼 있다. 비신은 높이 3.95m 너비 1.45m 두께 0.39m에 이르고, 총 높이는 무려 5.7m에 달한다. 규모로나 귀부와 이수에 보이는 뛰어난 조각솜씨로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석조 예술품이자 금석문으로 꼽힌다.
이 비는 조선의 모일모화사상(侮日慕華思想: 일본을 멸시하고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여 따르려는 사상) 분위기를 우려한 일본에 의해 땅 속에 파묻혔다가 고종 32년(1895)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복구되었다. 그후 1956년 국치의 기록이라 하여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 의해 다시 매몰되었다가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나자 원래의 위치에서 송파 쪽으로 조금 옮긴 지금의 자리에 되세워졌으며 1963년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 백과사전, 네이버백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