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자유로운 활동이 억제돼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던 차에 인연이 있어 오랫만에 생활근거지인 서울을 떠나 차를 몰아 멀리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의 화개산(花開山)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천년고찰 도피안사(到彼岸寺)다.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彼岸 ;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다 하여 절 이름을 '도피안사'로 이름지어졌다. 규모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아닌 편인데,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터라 과거에는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요즘은 자유로운 편이다.
이 절은 지금부터 약 1,160년전인 신라 경문왕 5년(서기 865년)에 도선국사가 세웠는데, 국보 제63호로 쇠로 만들어진, 높이 91㎝의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나무나 돌로 만드는데 비해 쇠로 만든, 아주 희귀한 불상이다. 나무나 돌로 만들기도 어렵거늘 그 당시 아주 정교하게 쇠로 불상을 만들었다니 참으로 놀라울뿐이다.
거기에다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불상 등(뒷배)에 140자의 한자가 양각돼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는 통일신라시대 당시 불심이 깊은 1,500명이 금석과 같이 뜻을 굳건히 하고자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절에는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삼층석탑이 보존되어 있으며, 수령 600년이 된 느티나무가 늠름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전각은 몇 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6.25전쟁 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 도피안사의 부근에는 철원평야와 철의 삼각지가 있는데, 여기서 휴전을 앞두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국군용사들이 산화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데 강제동원된 적군인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도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몇년 전부터 이 도피안사에서는 백마고지 등에서 전사한 젊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수륙제(水陸齋 ;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올리는 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다소 쌀쌀한 날씨속에 이 도피안사에서 하루 밤을 보내며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고, 또 예불에 참석해 죽은 젊은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앞으로 이 땅에 6.25와 같은 민족상잔의 비극이 없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했다.
▲ 절 전경. 중앙에 600년 된 느티나무가 도피안사의 풍치를 더해 주고 있다.
▲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삼층석탑
▲ 삼층석탑 해설문
▲ 대적광전에 봉안돼 있는 높이 91㎝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모습. 불상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지금부터 1,000년이 훨씬 지난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5년(865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현재 국보 제63호로 지정돼 있다.
▲ 비로자나불의 등에 140자 한자가 양각돼 있다.
1959년 봄에 땅속에 묻혀있던 이 철조비로자나불을 처음으로 발견해 세상에 알린 육군 제15사단 연대장 고주찬 대령(오른쪽 사진)과 이를 수습해 처음 도피안사에 봉안한 제15사단장 이명재 소장의 숨은 공로가 있다.
▲ 양각된 글자 전문
<해설문>(도피안사 자료 참고, 오랜 세월 탓에 일부 마모된 글자도 있어 다소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음에 유의 바랍니다.)
거룩하고 위대한 석가모니불 가리어 진원에 돌아가니 의례가 옮겨지고 세간을 넘기시어 삼천대천의 세계에 빛을 비추지 못한 세월이 1,806년이 흘렀다.
이를 슬퍼하고 기이하게 여겨 여기에 문자를 새겨 넣을 것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서원을 세운다.
또 오직 바라는 것은 비천한 사람들 처지가 낮더라도 나아가 창과 방망이로 자기를 쳐서 깨달아 고요하고 깨끗한 밝고 맑은 불상을 통해 오랜 어움을 헤치고 어리석은 뜻을 바꾸어 진원의 어짊에 물드는 것은 색으로써 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도다.
당나라 의종 함통 6년 을유년 정월 일 신라국 한주 북계 철원군 도피안사에서 불상을 이룬 불교신도 모두가 용악과 같이 굳세고 맑았다.
이때에 불심 깊은 거사로 결연한 1,500여명이 금석과 같이 뜻을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힘써 괴롭고 힘든 줄 알지 못하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