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스터(Munster) 재세례파 천년왕국의 비극(1533-1535)
루터파, 개혁파에 밀려 힘이 없던 재세례파는 1527년에 펠릭스 만츠(Felix Mantz,1498-1527)가 익살 당하고 마이클 샤틀러(Michael Sattler,1490?-1527)도 처참하게 분살 당하게 되고,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이후 카톨릭은 물론 신교파의 통치자들에 의해 더욱 잔인하게 핍박을 당한다.
네덜란드 저지대의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뮌스터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베른하르트 로트만(Bernhard Rothmann,1495-1535)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마우리 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고 있던 로트만은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러 모았으며, 그의 설교 운동으로 개혁 운동이 점차로 힘을 얻으면서 교회의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뮌스터 시의 상인조합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그는 비밀리에 학자금을 받아 비텔베르크 대학에 가게 되었다. 1531년 7월 뮌스터 시에 돌아온 로트만은 개혁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에 놀란 주교가 그를 사제직에서 해임시키자 조합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로트만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시내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들 중에는 루터파, 개혁파 그리고 나중에 재세례파가 혼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교회를 반대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행동을 같이 하였다. 시민들은 신속하게 로트만을 뮌스터 시의 종교적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뮌스터 시의 길드 회원들은 도시의 평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532년 이들은 주교와 무력으로 대항하여 승리를 얻었다. 뮌스터를 다스리던 로마 천주교회의 주교도 1533년 뮌스터를 “복음적인 도시”로 선포할 단계에 이르렀다.
뮌스터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박해로 인해 피신했던 많은 재세례파들이 네덜란드에서 뮌스터로 몰려왔다. 1533년 이후에는 뮌스터의 시민들보다 이민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시의회 의석도 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주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이때 1533년, 스트라스부르(Strassburg) 출신의 혁명적 재세례파(Revolutionary Anabaptist)인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1496?-1543/4)이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스트라스부르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자신은 6개월 동안 감금당한 후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1533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그렇게 외치다가 투옥 당했는데 10년 후인 1543년에 옥사하고 만다.
‘뮌스터(Munster) 재세례파 천년왕국의 비극(1533-1535)’이란 호프만의 가르침을 받은 네덜란드-북부 독일의 얀 마티스(Jan Mathijs,1500?-1534)와 존 라이덴(Jan van Leiden 또는 얀 복켈슨 Jan Bockelson,1508/9-1536)이 일으킨 사건으로 뮌스터 시를 점령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선포하고 강제로 재세례를 시행하며,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등 약 2년간 도시를 점령하고 통치한 사건이었다.
모피 제조자인 슈베비쉬-할(Schwäbisch-Hall) 출신의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에 의해 묵시론적이고 열광적인 사상이 재세례파에 유입되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폭력을 통한 멸절을 요구한데서 극점에 도달하였다. 호프만이 스웨덴, 프리슬란드, 네덜란드와 스트라스부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며(소위 말하는 멜키오르파) 베스트팔렌 지역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다 결국 투옥되고 만다.
한편 뮌스터에는 호프만의 말세 설교를 듣고 그를 따른 많은 사람들 중 네델란드의 빵 장사 얀 마티스(Jan Matthys)가 있었다. 마티스는 자기가 선지자 에녹이라고 자칭하고 하나님께서 스트라스부르는 불신앙 때문에 배척하시고 그 대신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으로 선택하셨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농민 전쟁을 부추겼던 토마스 뮌처의 사상을 뮌스터 시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으며 그는 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성경에 따라 뮌스터를 개혁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성경 강조는 주관주의에 머물렀다. 그는 주관적으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종말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 에녹이라고 자처하여 재세례파를 규합하였고, 곧 뮌스터 시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칭하고, 성도들이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천년왕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현금과 재산은 국가 소유로 하였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서적은 불태워졌고,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현물로 임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상에 반대하는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항거하는 자들은 처형되었다. 그들은 특별 계시에 의해 평화주의(pacifism)를 포기하고 구약의 형태를 따라 그리스도인의 무력 통치 및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며 강제로 물건을 공용하고 모든 반대자는 죽여 버렸다. 뮌스터가 “새 예루살렘”이 된 것 같았다. 소수의 군대로 로마 천주교의 군대를 무찌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외치면서 로마 천주교회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나 막강한 카톨릭 군대와 루터파의 군대들이 1534년 2월 이 도시를 점령하고 1534년 4월 마티스는 전사했다.
마티스가 죽은 후 1534년부터 뮌스터가 함락되기 까지 마지막 약 1년 2개월 동안 버티면서 뮌스터를 지휘한 또한 사람이 네델란드의 양복재단사 존 라이덴(Jan van Leyden)이다. 그는 마티스의 후임으로 나서서 친위대를 조직하여 모든 뮌스터 시민의 생활을 규제함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였고,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하면서, 과부들에게 결혼하여 자녀를 두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설교하였다.
그는 구약의 족장들처럼 일부다처제를 수용하라는 계시를 환상 중에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미모의 여인 15명을 아내로 삼았다. 존은 1534년 8월 주교의 용병을 격퇴한 후, 자신이 마지막 시대의 메시아요, 새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계시적 사상의 위협에 직면한 카톨릭과 루터파의 연합군대는 1535년 1월 뮌스터를 공격했다. 결국 투쟁 끝에 1535년 6월 24일 뮌스터는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존은 불에 달구어진 쇠로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뮌스터 재세례파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문자적 성경 해석을 주장하며 산상 보훈의 교훈을 문자대로 받아들여 실천하려고 했고 그들 중 일부는 구약의 일부다처 제도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했다.
2) 직접 계시를 주장하며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의 말을 구약 예언자들의 말처럼 권위 있게 여겼다.
3) 역사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4) 분파적 교회관을 내세우며 교회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무리로 구성되고 박해를 받으며 국가와는 연합 될 수 없는 단체로 간주했다.
5) 성경 연구를 강조했다.
6) 부정적 국가관을 내세우며 무기 사용과 맹세를 배격했다.
7) 극심한 선교열을 고취시켰다.
1534년 얀 마티스와 존 라이덴이 뮌스터에서 재세례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가고 그곳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려 했을 때 뮌스터의 많은 여성들이 재세례파에 동참하면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도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뮌스터가 꿈꾸던 천년왕국 저변에는 여인섭리사의 일면이 수면위로 잠깐 등장하려다 다시 심연속으로 가라앉게 되었고 그때의 자료를 찾아 정리하면서 뮌스터의 비극으로부터 450년이 흐른 1983년부터 1985까지 한국섭리사 가운데 당시의 비극과도 같을지 모른다는 애천을 생각하니 이내 착잡해 진다.
뮌스터의 많은 수의 여성들은 마치 수백 년 동안 침묵을 강요했던 기독교 전통에 항거하려는 듯, 열렬히 설교하기도 하였다 한다. 저자거리나, 길모퉁이마다 여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뮌스터 시의 시민들이 회개하도록 외쳐댔다. 한 여성은 장시간 외쳐댄 덕에 목이 잔뜩 쉬어버리자, 양의 목에 달아주는 방울을 자기 허리에 달아서 말은 못하여도 적어도 사람들에게 주의를 끌게끔 하기도 하고 여자 재세례파 신도들은 열렬하게 그들의 지도자를 추종하였으며, 수녀원에서 빠져 나와 이에 합세하는 여성들의 수도 늘어났고, 이들 가운데는 계시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은 수가 있었다 한다.
뮌스터에서 이루어졌던 재세례파 혁명은 천년왕국 운동 가운데에서도 가장 전투적이며, 조야한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기록된다. 원래 뮌스터 시민들이면서 카톨릭 신도들이거나 루터를 따르던 사람들은 새로이 세례를 받거나 그 도시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그 결과 세례를 받고 그 곳에 남겠다는 여성의 수가 월등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수의 수녀들, 평신도 여성들이 세례를 받았다. 숫자적으로 뮌스터에 남게 된 남여의 구성비가 약 1대 3의 비율이었다 한다. 여성의 수가 압도적이다. 이 여성들은 이러한 급진적 조류 속에서 루터식의 종교개혁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더 깊게 느꼈던 듯싶다.
재세례파 운동에서 여성들은 국가 교회에서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처럼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이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담당했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자기들이 가진 생각을 전하며 재세례파의 의도를 전하는 선교의 과제였다. 마치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전도 부인"들이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던 것이나 한국섭리사의 통일교, 애천에서 처럼, 소명의식에 꽉 찬 여성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열정적으로 이러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 나갔다. 자기들 가족, 친지, 이웃, 친척을 대상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 그리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나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선교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여성들은 예배의식을 진행해 가는 것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에 여자들은 "만인사제설(das Priestertum aller Gl ubigen)"의 원리에 따라 신앙생활 가운데 계급 간, 성별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한다. 재세례파의 예배란 남성 사제 중심의 독점적 형태가 아니라, 누구나가 말씀 선포에 참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서를 같이 읽고 하는 것이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한 데로 재세례파 운동은 여성 해방에 영향을 끼친 것이며, "만인사제설"의 원리가 가부장주의 속에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돌파구로 작용하였고 실제로 여성들에게로 확대 시행된 것이었다.
재세례파가 형성되던 초기에 이들은 내부 조직의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외부적 압력에 눌려 있었다. 카톨릭 뿐만 아니라, 기성 종교개혁파들이 이들이 상대할 대상이었고, 이러한 배후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버티고 있었다. 때문에 재세례파 형성 초기에는 여성들이 비교적 자유로이 활약하도록 허용되었으나, 차츰 이들이 조직화, 제도화 되어가던 후기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설교가로서 여성들이 활동하기에 재세례파 안에서도 많은 한계가 있었고, 국가 공권력의 개입과 재세례파 내에서도 사제의 역할을 남자에게만 제한하는 추세가 강해지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종교개혁 시대에서조차 여사제라는 것은 악마의 사제이고 그것은 마녀라는 등식으로 연결되는데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차츰 여성 사제직을 거부하고 여성을 멸시하게 된 것이다.
재세례파에서는 철저한 성서중심주의 때문에 바울의 서신 가운데 특히 "여자여,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하여 문제가 되었으며,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겠다. 재세례파 운동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초기 단계에 여성들의 역할과 능동적, 주체적 참여는 더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이 특별히 제의적 행사에 활발히 참여했던 곳에는 기존의 예식 형태와는 다른 황홀하거나 밀의적인 예배형식이 사용되었고, 이러한 형태는 남성에 의해서 주도되는 교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렇게 여성들의 역할은 재세례파의 가르침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였으나, 뮌스터시가 재세례파의 수중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되자 기존의 가르침과는 달리 여성들의 자리는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여성들은 결혼한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였고 불순종은 심지어 사형으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결혼공동체는 존속되어야 된다는 것이고, 그러자면 여자는 단순히 남자에게 순종해야 된다는 논리였다. 여자들은 창세기의 사라가 했던 것처럼 남편을 "주(Herr)"라고 불러야만 했다(벧전3:6). 그러나 이러한 구속은 너무 지나쳐서 곧 사라지게 되었다. 자유를 원했던 여성들을 다시 구속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수녀원에서 나온 여성이건, 남편을 떠나 집나온 여성이건, 많은 여성들이 독자적인 삶을 꾸려나가기를 원하였다.
본래 재세례파는 엄격한 성윤리를 강조하였고 세례 받고 형제, 자매가 된 그들 안에서의 결혼만을 인정하였었다 한다. 그러나 당시 신앙을 이유로 뮌스터를 떠난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남겨두고 떠났으므로,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불균형 상태에 있었으니 존 라이덴(Jan van Leyden)은 마침내 구약성서의 가부장적 사고를 바탕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뮌스터에 일부다처제를 부활시키도록 하였다. 여성들을 보호하고 구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속하기 위하여 그 당시 일부다처제가 용인되어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분배되었다. 뮌스터의 일부다처제는 철저히 남성의 여성에 대한 특권과 지배권, 우월권을 드러내는 법적 장치가 된 것이다. 단 한 명의 여자도 독립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초기의 자유함을 외면한 채 뮌스터마저도 여성들은 문자 그대로 남성들에게 분배되어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뮌스터 재세례파의 주목받던 또 다른 지도자였던 베른트 로트만(Bernt Rothmann)은 그의 글 "옳바르고 건전한 기독교 교리의 재건(Die Wiederherstellung der rechten und gesunden christlichen Lehre)"에서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조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 한다. 즉 서커스단 사람들이 곰을 사슬에 묶어 끌듯이 여자들이 남자들을 주도할 수 있을 뻔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로 뮌스터에 새로운 질서가 잡혀서 모든 것이 제대로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여자나 늙은 여자나 할 것 없이 이곳에서는 남자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태를 그는 결혼이 자유의 재정립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여성의 자아실현과 여성해방의 물결은 재세례파 운동 초기의 짧은 시기에만 단지 가능하였고, 여성들은 다시 억압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만인사제설’의 원리와 엄격하던 재세례파의 성윤리는 뮌스터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일부다처제는 혼음과 유사한 자유연애 형태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여성은 뮌스터가 새 예루살렘에로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채 혼란과 방탕, 공포정치 속으로 빠져 들어감에 따라 일차적인 희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끝.
[단림세 2008.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