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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교회 주일설교 |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선한 청지기로 살라

작성자백한진|작성시간19.09.15|조회수878 목록 댓글 0

오륜교회 주일설교 |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019.9.1.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 주일설교 말씀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 주일설교]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019-09-01 https://youtu.be/jDn13iGo51E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 8절은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아니 인생의 종말이 가까운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관계를 이루고 유지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 모든 관계에는 반드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 '뜨겁게'라는 원문의 뜻은 긴장감을 가지고 열심히, 열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뜨겁게'라는 말의 단어의 뜻을 보면 운동선수가 애써 자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늘일 때 혹은 말이 최고의 속력으로 달려 나아갈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마라토너가 피니쉬 라인을 보면 젖먹는 힘을 다하여 막판 스퍼트를 내듯이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뜨겁게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은 이만하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식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더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에는 불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도 나이가 들면 별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동사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절) 이것을 보면 사랑은 명사도 형용사도 아닌 동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뜨거운 감정과 느낌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은 뜨거운 느낌과 감정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뜨거운 감정과 느낌 그 이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는 모두 동사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으로 불려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을 모두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입니다. 사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라는 말은 '가장 먼저', '최우선적으로'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했습니다. 왜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사랑없는 믿음, 사랑없는 소망, 사랑없는 은사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시금석

그러면 왜 우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믿음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7절에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말은 위로부터의 거듭남,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말합니다.(요1:13) 그런데 누가 거듭난 자, 위로부터 난 자가 됩니까?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읋 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내 믿음의 시금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참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는 온전한 시금석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또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언급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3:10B)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임을 확실히 보증해 주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한 번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허다한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0장 12절에 보면 "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사랑은 장님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허물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죄와 허물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입니다. 마음이 현미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면 사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면 허물이 가리워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누가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누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며 뜨겁게 서로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입니다.


둘째, 기도의 무릎을 꿇은 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절) 왜 베드로는 가장 먼저 기도를 언급한 다음 곧이어 사랑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2a)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내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사람, 까다로운 사람,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기도를 말하고 다음에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륜교회 주일설교 | 선한 청지기로 살라

2019.9.8.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 주일설교 말씀

베드로전서 4:9~10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 주일설교] 선한 청지기로 살라 2019-09-08 https://youtu.be/KMJpJ8PSqYc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

9절은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9절) 왜 베드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 다음 곧 이어 "서로 대접하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대접하는 것이 곧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 역시 머물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각 성을 돌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 역시 누군가의 집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자신을 대접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또 그것을 마지막 날에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35) 그리고 교회 감독을 선택하여 세울 때에도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자여야 한다"(딤전3:2)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12장 3절을 보면 사도 바울도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네로 황제의 핍박을 이리저리 피하여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피하여 숨어 지내는 성도들을 숨겨주고 대접하는 일은 참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집을 오픈하고 누군가를 대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원망'의 어원은 '남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손님을 대접하면서 동시에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대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대접하는 일이 빈번하여지고 대접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시간도 그렇지만 비용도 들어가고 많은 희생도 필요합니다. 자기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접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수고와 비용이 들더라도 원망과 불평으로 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 대접하라!


왜 원망없이 대접해야 하는가?

그러면 왜 우리가 원망없이 대접해야 할까요? 원망없이 대접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망없이 대접하는 자를 잊지 않으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결단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는데 그 천사를 통하여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창18:8,14)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과 그의 약대를 대접함으로 이삭을 신랑으로 얻었습니다.(창24:17~19)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잘 대접함으로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가족이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수6:25)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잘 대접함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왕상17:13~16)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죽었던 자녀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왕하4:8,17,34) 영국의 존 웨슬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봉사하면 당장은 그것이 고생이 되는 것 같고, 손해처럼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진 섬김과 봉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10절) 우리들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다양한 은사를 주셨을까요?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일까요? 은사를 드러내어 자신을 과시하도록 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봉사의 삶,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사를 따라 서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란 '오이코노모스'인데 이 말은 '관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은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도, 건강도, 지혜와 지식도, 명예와 재물과 권세와 능력도, 심지어는 내가 낳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잘 관리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잘 관리하다가 돌려 드리는 청지기입니다.


누가 선한 청지기인가?

첫째,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자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빈 손으로 왔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시간도, 재물도, 자녀도, 직장도, 명예와 지위도, 사업장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나의 것인양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내 모든 것의 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님이 내게 맡기신 것들을 잘 관리하고 철저하게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자가 바로 선한 청지기입니다.


둘째, 은혜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10절)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에 기초해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은사도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졌습니다. 은사만이 아니라 재물도 건강도 시간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주어졌습니다. 물론 우리의 땀과 눈물과 수고와 희생을 통하여 우리는 그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우리의 힘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세상의 사람들은 그것을 나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고 운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자꾸 비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누구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을, 모든 은사를, 모든 관계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선한 청지기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가 선한 청지기입니까?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식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측량할 수 없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 때문에 봉사하며 섬기며 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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