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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질문

작성자산자이|작성시간26.06.07|조회수54 목록 댓글 0


초여름은 만물의 성장으로 피어나는 신록 가득한 산야가 장관인 계절이다. 푸르른 복한강을 따라 오랜만에 고적한 굴봉산 으로 강선봉 절경에 취해 산수를 즐겼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본인이 알아가는 것을 정확히 알고싶어 한다는 것이다. 배움이란 정확히 알고싶어하는 본인의 느낌이 생길때 얻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스스로를 알아가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 되는 순간이라는 도덕경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질문은 알지못하면 할수 없는 일이다. 교육이란 한사람의 일생이나 한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백년대계이다. 아직도 교육을 받는자는 피교육자라는 허울을 쓰고 가르침을 받고 사지문답을 맞추는 앵무새를 키우는 사육식 방법이다. 교육은 오래동안 읽고 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교과서는 지식을 담는 한쪽방향의 전달도구 이고, 교실은 그 지식을 주입하는 공간이다.
교사는 지식의 유일한 전달자, 학생은 수동적
수신자이다. 바뀐다고 하지만 줄세우는 방법만 바뀌지 본질은 그대로이다. 미래를 향한다고 하지만 실은 지도자들은 과거의 틀에서 나오는 법조차 모르고 높은 자리에서 탁상공론이다. 교육의 본질은 교육받은 아이들의 선택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나아가게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역활과 서사를 만들어내는 교육의 변화를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은 단지 학습하는 존재가 아니라 배움을 창조하는 창작자가 되어야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무엇을 찻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해야한다. 주입식이 아니라 질문과 스스로 해야하는 일을 하는 동기를 주어야한다. 어른들의 잘못된 교육관이나 정치적 선동식 방법은 버려야한다. 자연이 스스로 하듯이 인간의 삶도 각자가 이루어지도록 멍청한 지도자들은 가만히 보는 법을 배워야한다.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젊어서는 다 예쁘고 잘생겼다고 한다. 젊어서는 다예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진정으로 예쁘고 잘생겼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이가 들어
예쁘기가 힘들다. 길을 가다가 문득 예쁘고
성숙된 분들을 만날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어서도 예쁘다는 것은 진정으로 예쁜것은 마치 오래되어도 아무것이나 맛나는 것이 아니고 명품의 30년산이나 장인의 작품이나 진정하고 값진 도인의 명품은 오래될수록 값어치는 더한것이다. 우린 박물관이나 전시회 에서 오래된 수석이나
분재들을 보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날림이나 싸구려 제품을 오래가지고
있는 분들은 드물다. 산을 다니는 우리 산꾼들은 혹한기를 견디는 제품을 많이 사용한다. 그것들은 아무리 혹한기라도 그대로 유지한다. 원정대들이 몇달동안 입고 유지하는 명품들은 사실 우리나라 산들에 입고 다니기는 아까운 것들이다. 자주다니는 절간에 스님이 녹차나 경옥고나 솔입식초나
감식초를 자주 담어신다. 곁에서 이따금 한두잔 씩 맛보지만 몇십년된 것들은 대단하다. 값으로 품질을 저울질 하는 자체가 힘들다. 일전에 청도에 감식초 장인에게 구경삼아 감식초 하나 구입하러 갔더니 삼십년된 감식초 한병에 삼백만원 호가한다고 한다. 우리도 사실은 스스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명품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는 젊은 날부터 심신을 숙성시키는 버릇이 들어야한다. 예쁘고 품위가 있다는 것은 풍기는 멋이 있어야 가능하다. 본인 스스로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멋이나 품위를 버렸지만 자신의 향기는 나타낼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하는 질문은 늘 가혹하여도
자신에게 질문 정도는 하고 살아이야 한다.

변화는 언제나 우리곁에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실체를 마주했을때 우리는 당황하기 일쑤이다. 변화가 너무 급격히 찻아올 때가 많아, 그것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눈에 보이지 않거나 몸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변화의 흐름에 맞서 뮐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지식이 문제다.
뇌는 끊임없이 수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데, 새로운 정보나 불확실한 상황과 마주할때 기존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을 두고 빠르게 결론을 내려야 궁금증이나 낯선 자극 앞에서 매번 멈춰서 생각하는 '버프링' 상황을 방지 할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익숙해진 것을 통해 미지의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우리의 본능적 사고구조에 깊이 담겨있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가 기존에 형성한 지식과 경험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아예 모르면 어떨까? 아쉽게 몰라서 문제이다. 쉽게 말해 내가 뭘 모르는지 조차
모르면, 새로운 현상이나 흐름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을 감지할수 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질문도 생기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지식의 틀에 갇히게 된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에 너무 많은일이 일어난다. 특히 세대사이는 점점 짧아지는 것같다.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에 모르는 것이 당연한 순간이 되면 사회에서 소외된다. 지식도 변하는 것에 따라 가지 못하면 별 필요성이 없어진다. 따라가지 못해도 따라가는 정도에 알고 이해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나은 사회에 사는 것이다. 변화를 알면 변해야 한다. 세대를 알아야 이해하고 질문 정도는 할수있다.


차거운 바람이 분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고기압 때문이다. 찬고기압은 왜 불어오는가? 모든 지구상에서 나타나는 것은 원인이 있다. 나타나는 결과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현상의 원인은 또 다른 현상의 결과이고, 어떤 현상의 결과는 또 다른 현상의 원인이다. 이처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다. 왜 무無가 아니고 존재일까? 칸트는 세계자체의 원인은 물을수 없다고 했다. 인과론이란 개별적 현상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도식일뿐, 세계 자체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라는 단어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총칭해서 붙인 말이지, 세계 라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라는 말에 원인을 물을수 없다. 그럼, 문제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원인과 결과로 무한히 서로 얽혀지내는 것이 세계이다. 왜? 무無가 아니고 존재인가? 우주는 한점에서 빅뱅을 통해 우주가 만들어지고 지금도 팽창하고 소멸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수많은 가설중에 하나의 이론 일뿐이다. 그럼, 이 한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종교에서도 신이 이세상과 우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 종교 이론에는 우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주를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성경에서는 '출애급기'에 모세가 하느님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 입니까?" 하나님 대답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자" 라는 것이다. 굳이 원인을 말하지면 신은 바로 지가 자신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다. 어려운 말로 자기 원인자라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볼때 신은 비록 자기 원인자라 히더라도 신은 창조자로서 신은 불가능한 존재이다. 신의 창조라는 말은 자체가 모순이다. 신이 창조하였다면 창조 이전 신은 어디있는가?
자기 모순이다. 질문의 답은 원래 없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단지 도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물 중에도 도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원숭이가 딱딱한 것을 물고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먹는 것이나 곰이 나뭇가지로 개미를 잡아먹는 것이나 하는 경우는 있지만 도구 자체를 제작해서 이용하는 경우는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일을 할때가 마치 신이 된듯이 뿌듯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한다 고한다. 인간은 신을 닮을려는 욕심은 끝이 없다. 또 다른 점은 인간은 태어나서 도구를 이용하고 도구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도구이고, 직원이 되는 것은 직장의 필요한 도구가 될수록 가치는 높아진다. 신자들은 종교인들의 도구이고,
남자는 여자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살아남는다. 본인이 얼마나 사회에서 소중한 도구가 될수록 훌륭한 인재라 칭한다. 도道란 말그대로 누구의 도구가 되는 방법을 빨리 깨우치는 것인지 모른다. 장자도 유용 有用과 무용無用에 대해서 많은 사고를 나타낸다.
무용하여 오래생존하는 것과 유용하기에 단명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인간의 도구가 어쩌면 인간의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사는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하나의 도구의 틀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세상을 떠나는 것 뿐이다.
서로의 필요한 도구가 될때 가장 행복하디는 것이다. 우리가 남을 이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수 없다. 의식주부터 생활용품이나 움직이는 것도 도구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소중한 도구를 귀하게 여기고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스스로 누구의 소중한 도구가 되기를 오늘도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본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있어면 늘 느끼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 하고 시간속에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그늘에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다가오는 것은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과거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나가면 과거가 된다고 하는데 무엇이 지나간다는 말인가? 태어나는 순간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 뿐이다.
태어나는 순간 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부모의 과거는 어디에 있는가? 부모의 태어나는 순간 이전의 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미래는 늘 다가온다고 한다. 그러나, 다가오면 지금뿐이다. 과거가 나타나는 순간은 우리가 만든 시간이라는 허울도 없다는 것이다. 미래도 있다고 하고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가사의한 세상에 갇힌 존재의 망상이라는 것이다. 없는 과거와 모르는 미래라는 틀에 늘 생각하고 고뇌하고 얻고 잃는 착각에 살고있는지 모른다. 태어나는 이전이나 죽는 것 이후는 모르는데 늘 아는 것처럼 하고 살아가고 있다. 오로지 지금의 연속에 갇혀산다.


요새부르는 노래가 '아모르 파티' 이다. 참으로 어려운 철학적 문답을 어찌 하나의 유행가 노래로 나타냈는지는 모르지만 니체의 '운명을 사랑한다' 는 말처럼 이운명 앞에서는 무엇을 하게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무엇을 정해놓고 바라는 경향이 많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마냥 행복하면 좋다고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마냥 장미빛 이라는허상뿐이다. 끊임없는 새로운 욕망이 원동력이 되어야 인간은 발전하고 나아간다고 한다. 욕망이란 충족되면 만족감을 느끼지만, 이는 곧 무료함을 느낄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을 가지게 되어있다.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죽음을 설교한다는 니체의 진단처럼 종교자들은 현세를 삶이 아니고, 이세계와 다른 내세의 영원불멸을 세계로 가는 것을 강조한다. 이세계는 참된세계가 아니고, 가야할 참된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짜라면, 이세계의 삶도 가짜이고, 살려고 하는 모든 의지는 불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왜 살아야 하는가? 종교인들의 답도 열심히 살아라 이다. '아무로 파티' 의 삶도 쉽지 않다. 이세계와 삶의 허무함을 긍정하는데서 시작하는 자기 창조의 삶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복종하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은 자기의 삶을 긍정하고, 무한한 삶의 가능성을 해방하며, 자기의 삶의 주인공이되는 유일무일한 존재가 되어야한다.

"ᆢᆢ담장, 바위, 그루터기,풀이나 땅, 그 어느 곳이든 원하는 곳에 편히 앉아 보라. 어디든 한 폭의 그림과 시가 당신을 에워쌀 것이다. 어디에서든 주변이 당신을 중심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조화를 이룰 것이다. ᆢ
많은 생각과 근심은 눈 덮인 산 너머에 남겨 놓고 온 것같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추한 것들과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을 한다. 그곳에서는 존재의 정당성을 찻기가 매우 힘들고, 절망적 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불행한 일을 많이 겪어면서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져든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니 존재의 정당성을 굳이 찻을 필요도 없고, 생각은 한낱 유희가 된다. 세상은 아름답고, 인생은 짧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된다. 눈이 한쌍 더 있으면 좋겠고, 페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고, 풀밭에서 다리를 뻗으며 다리가 더 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소윈 까지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난 거인이 되고 싶다. ᆢ" 헤르만 헤세는 농가
라는 글을 알프스 산기슭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으로 방랑자가 되었다. 시인이 자연속에서 무슨 질문이 필요했을까? 자신이 자연이 되어있는 데 자신에게 무슨 질문이 있을까? 행복이라는 것은 질문이 필요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짝이 항상 존재한다. 음이 있어면 양이 있고, 밤은 낮이 있고, 동물이나 식물이나 암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의 선에는 그 만큼의 악이 있는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때 모든 것들이 방주를 타기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善도 급히 탈려는데 짝을 찻아오라고 했다. 선은 할수 없어 숲으로 돌아가서 악惡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인간은 생을 위해 평생을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항상 자신의 존자를 확인하는 방법은 대비되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 된다.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 에서 "인생의 효용은 그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기에 달려 있다. 짧게 살았으면서도 오래 산 사람이 있다." 고 한다.
인생은 본시 선도 악도 아니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선의 무대도 되고, 악의 무대도 되는 것이다. 삶 이란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
이 되고 죽어서도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멀리 보는 사람이 있고, 눈을 뜨고 있어도 눈앞의 일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단 하루를 살이도 삶을 사는 것 같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 누구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는가?


인류의 역사는 원치않는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늘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들이 마치 정딩한 것처럼 나타나고 진행되는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는 인간의 삶이란 각자의 괸념과 사고는 같을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은 허구이다. 반복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휘횡찬린 새로움의 허구에 광란하고 즐거워하는 축제를 만들지만 또 다른 종말을 기다리는 괸람자가 되는 것 뿐이다. 정권이나 왕조나 모두 새로운 출발로 모두 개혁의 나팔을 불고 난리를 치루지만 결국은 늘 때가 되면 같은 빕상을 받아먹는 끼니처럼 비슷한 일을 또 다시 반복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고유한 개체인 인간은 종말은 끝이 난다. 독재, 질병, 우월주의, 전쟁, 사기, 독과점, 인종주의, 극우세력등은 우리의 현실에서 종말이라는 것은 존재할수 없다.
전쟁이 없어지려면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
특히 즐겨서는 종말론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종말이 오는데 무슨 종교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힌가? 차라리 철학적으로 사괴나무 하나 심는 것이 나을수 있다. 요한 계시록은 종말론으로 메세지가 마치 신께서 거대한 재앙으로 타락한 세상을 완전히 박살내고 새로운 신의 나라를 세운다고 예언한 것이다. 결과는 그러니 굉장히 자극적으로 신앙의 순수한 밑바닥의 끝을 다시 나타내기를 바라는 일종의 위험경고로 나타내는 것이다. 조금만 가면 낭떠러지 가 나오니 조심하고 다른 길로 가야하니 안내비나 운송비를 더 원한다는 말이다. 중국의 왕조나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을 다시 얻을려는 한량이나 모두 종말을 앞세우고 선동 으로 개혁이라는 똑같은 허울을 타고 눈가림 하는 짓이다.누구나 군림하고 신같은 위치를 가지기를 바란다. 사랑을 할때는 우린 신을 섬기듯이 상대를 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신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리고 또 다른 신을 찻아 다니는 인간들의 군상이다. 누군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은 반복의 사슬에 매여 있는 헛것을 숨기는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산을 내려왔다고 다시 산에 가지 않는 산꾼의 아마 드물것이다.
마지막이나 종말은 철저한 거짓말 이다.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앞에 당당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설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 에서 " 이제 저는 신이 명령한 대로 저 자신과 남들을 살피는 철학자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생각하고 사색하는 삶을 살아기고 있지요. 그럴건데 죽음혹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자리를 버린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저가 죽음이 두려워 신탁에 복종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이 법정에 끌려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수 없으니까요. 그런이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다면 이는 지혜를 가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음은 어쩌면 가장 큰 선일 수 있는 데 다들 죽음이 가장 큰 악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알지 못하면서 안디고 생각하는 무지만큼 불명예스런 무지가 또 있을까요? 저는 저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모른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점에서 여러분과 제가 다른
것이고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지요. " 라고 진리앞에서 죽음으로 피하지 않고 선을 택하겠디고 한다. 제자들이나 친우들이 망명을 권하지만 진리의 독배를 마시는 철학의 선구자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 는 신탁의 첫머리를 이정표 삼는 사유의 기본을 가르쳐주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소크라테스의 소중한 깨달음을 감사드려야 한다. "자, 떠닐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겠지요.저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요. 그러나 어느 쪽이 좋은지는 신만이 아실 겁니다." 진리는 이런 것이다.

"不失基所者久 부실기소자구 死而不亡者壽 사이불망자수 그 자신이 있는 곳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고, 죽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은 천수를 누린다. " 노자의 도덕경의 33장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사는 도인이 몇이나 있을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허물을 보고 훤히 본인을 아는 것,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신을 아는 것이 밝음이라는 노자의 말대로 스스로 심성心性을 보지 못하면서 남을 보는 것은 지헤라지만 자신의 어두운 면이다. 지혜는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라 깨우치면 항상 현실의 경계에서 부딪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을 이기는 것은 두려움을 이길려는 마음이고 핍박이나 모욕을 이겨야한다. 지헤는 방편이 없어면 도리어 돌아오는 화살같은 것이라 쓰면 쓸수록 되돌아 오는 것이다. 남과 나는 항상 욕망의 잡혀있는 가상의 자아이기에 별반 다르지 않다. 서로를 비교하는 지혜만 있을 뿐이다. 자신을 항상 먼저 아는 지혜는 도리를 아는 것이다.
지금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항상 지금이라는 지나가는 순간이다.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다면 자신이 처해있는 것을
알고 겸손을 얻어지면 죽더라도 천수를 누릴수 있다는 노자의 마음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아는 것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늘 위태롭다. 우리는 변하는 산길을 다니는 산꾼이다. 늘 변하는 산을 모르면 항상 위태롭다.

이리 좋은 날 고운 만남이 피어나는 원앙들은 만물의 흐름인가?

흐르는 북한강 푸르른 산야 바람따라 다니는 산꾼들은 신선인 것을 아는가?

머무는 곳이 천국이요, 만드는 것이 극락이라 이 어찌 좋은 산길을 무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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