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가는 인생길에 오고 가는 바람같은 삶이 풍요로운 것은 늘 인연이란 동행이 주는 산들바람 같은 어울림이다. 늘 좋은 인연들과 금남지맥길 대둔산 자락 바랑산 월성봉 신록 가득한 초여름 산길을 다녀왔다.
이 세상에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부모도 자식을 원하는 대로 낳지도 못한다.
우리는 이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러나 누구나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살아 유지 할려고 한다. 그렇지만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죽어야할 이유 또한 없다. 그럼 어치피 살아 유지를 어떻게 해야하나? 미다스는 우리가 아는 '황금의 손' 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만지는 것 모두가 황금으로 변하니 좋을리 없다. 그래서 숲의 신 실레노스에게 물어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걸작이다. "당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것을 잃었다. 가장 행복한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행복을 원하는 것이 삶을 유지하지 않는 것인가? 까뮈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인간은 반드시 살아야할 필연적 이유도 없다." 고 본다 . 인간의 삶의 진정한 이유를 삶의 무의미함만 발견하는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는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자살이 아닌 삶의 의미가 없을때 오히려 인간은 더 잘살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나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려움이 없을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산다는것이다 . 진정한 니흘로스트를 유지하는 방법은 누구의 삶이 아닌 진정한 새로운 자유의 길을 찻아 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산꾼이 되어야 한다. 니체의 말대로 어린아이의 삶은 놀이 같고, 놀이처럼 즐겁고, 놀이에는 목적이 없다. 노자의 도덕경도 같다. 도道는 어린아이 이다.
우리가 아는 다오게네스는 개같은 놈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중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도 있지만 미친 소크라테스라는 다오게네스도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그러니 플라톤과 같은 제자인데
그를 플라톤같이 아테네 최고의 명문귀족 출신이니 누더기에 커다란 항아리에 자고
매일 구걸하고 다니는 다오게네스를 그렇게 보이니 개같은 놈이라 하고 같이 어울리지 않고 멀리하였다 실제로 개의 생활방식을 찬양하고, 죽은 뒤 묘지에 개의 동상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는 신분, 출신, 지위, 권력, 명성, 부를 과시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조롱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로 대왕과 나눈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하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다는 말은 다아는 이야기 이다. 그후 대왕이 왜 자신을 무서워 하지 않느냐 하니, 다오게네스는 사악한 사람을 무서워 해도, 선한 사람을 무서워 하는 사람이 있느냐 했다고 한다. 다시 대왕이 왜 사람들이 당신을 개라고 칭하느냐하니, 자신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꼬리를 흔들지만 나쁜 사람은 물어버리기 때문이라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로 대왕은 떠나가면서 자신이 알렉산더로 가 아니었다면 다오게네스로 살았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다오게네스는 분명한 철학자이고 실천하는 삶으로 살았다. 인위적인 것들은 절대적 가치도 지니지 않는 헛된 것이고, 단지 자연적인 필요와 욕구만 총족하고 살았다. 그 에게 개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이 개 같은 삶을 유지 하는 것은 아무나 할수 없는 일이다. 유지란 자신의 삶이 되어야한다. 그것도 같이 사는 곳에서 유지한다는 것을 할줄 알아야한다.
인간은 우주의 관찰자라는 기본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기준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개념속에서 자신이 던져진 것뿐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세상을 나와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속에서 늙어가고 어느 한정된 시간이 되면 강제 퇴거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두가 자신에게서 자신에게 로 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자기도달' 이리 한다. 자신이 이세상에 던제진 이유는 자신의 시간을 살기 위한 것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자기 재구성' 이라 한다. 존재는 결국 자기의 시간 속에 존재하며 목적지는' 자기 자신' 이라는 것이다. 존재는 항상 현존재이다. 여기 있음, 어디에 있음, 어떤 상황에 있음, 이라는 존재가 처한 구체적 시간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공존' 이라 한다.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와 공존한다는 것이다. 고정된 세계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구성하는 적극적 참조자가 되어야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평등한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인생이란 적극적으로 '나의 세계' 를 창출하는 '나만의 시간' 이 되어야한다. 자신은 자신에게 있어서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이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다. 신이라는 개념을 본적이 있다는 것은 허구이다. 우리가 유지하는 것들은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끝없는 유지를 바란다. 가장 처절한 것은 시간이라는 틀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수시로 잊고 사는는 것도 모자라는 것을 넘어 끝없는 유지를 바라는 인간들이 자신은 모르지만 타인들이 모자라고 멍청하게 보는 것을 모르니 기가찰 노릇이다. 인간은 죽을때까지 유지를 위해 병원에 가져다 주는 비용이 2억4천만원이라는 비용이 든다고 한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각자의 신앙으로 히느님을 믿고 살고 종교나 교회를 만들지 말라 했고, 석가모니 도 제자들에게 하신 말은 누군가가 먼저한 말이고 앞으로도 누군가가 하는 말이니 각자 열심히 마음공부를 하여 깨달어라 하고 종교나 신앙을 만들지 말라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를 오늘도 십자가에 메달아 놓고 괴롭히고, 부처님을 동굴속이나 바위위에나 차거운 법당안에 혼자 모셔두고 영생이니 극락이니 천당이니 죄인이니 무지한 중생이니 하면서 종교의 틀 안에 신을 만들어 진리인양 독재자 처럼 신자를 만들어 유지하고 살아간다. 십자가나 부처님 불상을 만들어 신을 고난의 구덩이에 모셔두고 그것을 빌미로 살아가는 종교라는 것은 태고적부터 집권세력의 허울이다.
인간은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이용한다.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하루에 세끼를 먹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끼를 먹기 위해 산다고 한다. 먹지 않어면 유지가 힘드는 삶이 되는 것은 태어나면서 아는 일이다. 누구는 이름난 식당중에서 비싼것을 과시도 해야하고 자신이 유지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해 먹는다. 어떤이는 열심히 일하는 직장 식당에서 오늘도 전번주와 같은 영양사의 식단대로 의무적으로 먹는다. 가난한 자들은 어느 무료급식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끼를 가지고 두끼를 대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먹는 것은 무엇을 먹든지 먹을수 있는 것이 제일로 하여 먹지만 그것은 우리의 심신을 유지하는 양분의 원소로 변하고 남는 것은 배설물로 사라지고 몸의 어느 일부가 되어 유지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지나간 한끼는 사라지고 또 다른 한끼를 위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심신을 유지하고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또 해야하는 일을 준비 아닌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고 가벼운 한끼라도 지나가는 한끼 일뿐이다. 언젠가 또 다시 기회를 만들고 또 다시 그 음식을 반복해서 먹을 뿐이다. 미식이고 별식이고 그것은 먹는 자의 각자의 선택이고 입의 버릇으로 되어가는 것 뿐이다. 많이 가진자가 좋은 식단을 먹는다고 오래살지도 않고, 한끼를 굶고 사는 이도 때가 되면 먹는다. 단지 세상의 종착역에 가면 모든 것은 잊혀진 지나간 길일 뿐이다. 명품의 음식이나 미식의 음식이나 모두가 한끼의 세상인연일 뿐인데 날마다 찻아 다니는 식사도 사실은 모두가 입이 만든 허울인지 모른다. 죽지않고 먹지않고 생각없는 사람은 없을 뿐이다. 배는 항상 고프고 생각은 늘 반복하고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바쁘기만 하는 삶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빚더미에 앉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자기가 스스로
얻는 것은 없다. 기본인 심신조차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게나 사회로 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유지할려면 본인의 본능적으로 빚으로 얻어지는 것 뿐이다. 댓가는 단지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연이나 선지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살아 가는 것뿐이다. 커가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기전이나 되고나서도 누군가의 도움이나 의존하는 마치 빚을 지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숨쉬는 것도 이지구의 빚으로 무상으로 매일 당연한 듯이 얻는 것이다. 매일 내려쪼이는 햇살은 나를 유지하는 첫번째 빚인지 모른다. 내가 얻는 경제적 이득도 누군가의 이루어 놓은것을 많이 가져와야 되는 것이다. 부자란 남들이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주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다. 부자란 사실은 남들에게 빚이 많을 뿐인데, 구조상 보관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돌려주고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는 구조이다. 누가 이런 구조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진리이다. 신이 있다면 신도 이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갈때는 아마 이런 구조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다. 지구의 모든 것들은 빚쟁이만 존재한다. 가장 어려운 유지를 위한 여정을 이 지구를 벗어나는 순간까지 계속 해야한다. 유지란 얻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하는 것인지만 어려운 것이다. 세상살기가 어렵다는 것은 유지가 어럽기 때문이다. 젊고 어릴때는 가만히 있어도 유지되기에 힘들지는 않는다. 어느시기가 되면 우리는 유지하기 위해 빚지고 얻은 것들을 천천히 소모하면서 다시 돌려주는 여정이 시작된다. 어차피 버리고 가야하는 시절이 다가온다. 빚은 갚지 않든 갚든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진 빚은 즐겁게 나누어 주고 내가 원하는 것들에게 베풀고 가는 것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남겨놓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어떻게 공평하게 돌려주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남겨진 자식들이나 친척들에게 분쟁만 남기고 또 다른 빚을 남기게 되는 것뿐이다.
유지 하는 것이 제일 힘든다. 누구든지 가질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의 정도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유지가 도道이고 유지가 삶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세상어느 것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한다. 역사적으로 집권한 새왕조의 군왕이나 물려받은 새로운 지배자나 진정으로 밤낮으로 하는 일은 오직 유지하는 것이다. 중국의 모든 왕조나 어느 집권한 벼슬아치나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하여 집권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는 끝없는 유지를 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부모형제 조차 죽이고 자신을 위해 평생을 따르는 충신이나 가신들도 때가 되면 유지를 위해 버리고 또 다른 신하를 이용하고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요새 한창 대세인 전자기업들이나 일류 증권 관련 기업이나 모두는 자신의 자리유지를 위해 사활을 거는 것이다. 유지를 못하는 기업은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이 현대의 시간이다.
유지란 마치 하루살이 같은 삶이라 하는 것이 요즈음의 사회구조이다. 성과를 이루어 놓지 못하면 가정이고 사회이고 삶이고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멀쩡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암이나 직장을 읺는 처지가 되는 것 같은 세상이다. 차라리 옛날로 되돌아가는 향수에 젖는 것이 좋아할지 모르지만 병든 노모가 젊어질수 있는가?
유지도 힘드는데 어찌 되돌아 가는 천지개벽이 일어나겠는가? 내일이 오늘 같아지기만 바라는 초심이 나을것 같다.
초지일관 初志一貫 처음으로 세운뜻을 끝까지 밀고나감 이란 마음은 참으로 어려운 도 道이다. 무엇을 이루는 것은 다할수 있다. 상급힉교를 가는 것은 다할수 있다. 그것은 이룬 것이 아니다. 사회에 나가야 한다. 직장을 구하는 것이 성공인듯 동네방네 알리고 자랑을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은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깊이 들어가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때쯤은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모른다. 성공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죽을때까지 배워야한다고 했다. 어린아이 에게 라도 배울것이 있어면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야한다 는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했다. 그것은 초심을 잃지 않고 끝없는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 하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어린아이를 비교하여 도에 대해 말한다. "덕德을 두텁게 머금은 자는 어린아이와 같다. (도덕경 55장)" 어린아이는 초심이다. 인간은 끝임없이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평생을 바라다 유지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간다. 젊어지기 위하여 족자살자 메달리고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그동안 벌어놓은 것들을 병원이나 먹는 것으로
유지하려고 하지만 힘드는 일이라 알때쯤
떠나가는 것이다 . 자주 가는 절간에 스님이 계신다. 동자 출가하신 분이라 하시는 일은 정말 몇십년을 보고 계시지만 하루일과가 변함이 없다. 새벽 2시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운동 하고 사시蛇時기도 드리고, 절간 일을 보고 종일 목욕이나 아니면 만나는 불자들과 녹차 드시고 하는 것이 전부이다. 도道란 평상심이고, 일상을 변함이 없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사업가나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초심을 유지하고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하는 문제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잘하는 것이 유지를 하는 것이다. 더 잘할려는 것은 못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하는 선문답이 '차나 한잔 하시게 '아닌가?
사실은 인간은 하루를 유지 할려고 삼시 세끼를 찻아다니다 죽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유지가 가장 힘들다. 요사이 들어가는 나이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데 인간은 항상 자기편이기에 자신은 마치 복잡한 지하철에 있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입장처럼 자신은 볼수없는 칙각같이 늘 젊은 줄 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심신은 늙어가는 결과 녹설기 마련이듯 산행후인지 운동후인지 관절부분이 이싱해서 한의원을
자주 다니다 보니 신체에 신경을 쓰다보니 마음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같다. 아우렐리우스는 말한다. " 인간의 영혼은 내부에서 빛을 발하는 투명한 구체라 할수있다. 그 빛은 영혼에 대해서 모든 진리와 광명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일체의 외보적인 존재에 대해서도 빛을 비춘디. 이와같이 하여 인간의 영혼은 참된 자유와 행복한 상태속에 있는 것이다. 다만 외부 세계에 대한 정욕이 그 구체의 미끄러운 표면을 소란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것 뿐이다. 그때문에 손상 당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어리석음에 빠지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자신의 심신의 안위를 위하여 평생을 보내는 것이다.
자신의 심신의 유지가 곧 도道이고 삶이다.
유지가 인간의 기본이다.
우리의 마음이 늘 변화하는 것은 도의 이름이 늘 변화하는 것같은 이치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멈춤이다. 노자는 도를 절박한 통나무 에 비유하고 어린아이 비유하고 계곡에 비유하는 이유는 도란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도는 인간이 필요하는 몸과 마음에 비롯되지만 작용은 온 세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욕망덩어리 이고 도는 마음의 유지이고 단속이기에 어러운 것이다. 천지가 화합을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화합을 하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무위이기에 도란 바라만 보아도 본능적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몸에 애착하지 않어니 마음은 단정하고 어떠한 일을 만나도 경계가 없어니 화합하니 저절로 존재하고 변화할 줄 아니 스스로 가지런 하니 이는 매이지 않는 자연의 이치라 한다. 마음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가상의 자기 생각이다. 마음은 현상인 차별계의 상대성을 만드는 끝없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유전자 때문인지 존재하는 것을 이유로 가상의 세계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는 찰나 찰나에 일어나는 생각을 하루에 강을 이루고 흘러 흘러 어디로 정처없이 만드는 것을 마음을 일으키고 관계에 연결할려는 현실에서 늘 좌절하고 번뇌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생각이 끝이 없기에 마음도 끝이 없다. 끝이 없다는 것을 빨리 아는 것도 마음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 어제의 생각도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마음이란 항상 바쁜 생각에 따라다니는 것을 만드는 헛된 두려움이다.
우리 일상에서 접촉은 어떤의미인가? 일상생활에서 밀접하게 연결된 촉각이라는 감각은 쓰다듬기, 포옹, 악수와 같은 신체 접촉은 가장 친밀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격식을 차리는 행동이다. 신체접촉은 기쁨도 주지만 반대로 고통도 주는 복잡한 감정과 기억들이 떠오른다. 포옹이나 손잡기는 서로의 신체를 맞대는 행동은 상대를 안심시키고 공감과 애정을 표현하는데 꼭 필요하다. 신체접촉으로 맺은 관계는 중요한 사회적 연결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꼭 필요한 요인이다. 강한 사회적 연결이 수명을 늘리고 면역체계를 향상하며 정신건강을 증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사회적 관계가 강하게 형성된 사람들의 생존확률이 약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 사람보다 50퍼센트 더 높다는 것이다. 약간의 신체적 접촉이 불안과 스트레스가 줄고 우을감이 완화 된다고 한다. 다정한 손길이 주는 변화는 정신의학적으로 대단하다는 이론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도 신체접촉으로 행복감을 증가하는 순간을 가질수 있다고 한다. 다른 시람과 신체를 맞대면서 위안과 공감을 얻고 촉각을 이용해 주변 세상을 마음껏 탐구하고 이해하는 산꾼은 대단한 공감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촉감은 사람들이 오용하는 감각이다. 부적절한 접촉사례는 괴롭힘이나 성추행으로 변질될수도 있다. 다른 시람을 접촉할 자유를 남용하면 사회적으로 크나큰 문제를 일으킬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의 신제 접촉에 영향을 받지만 저마다 다른 의미와 착각으로 이를 해석한다.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손길이 다른 이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행동으로 이해되는 수가 있다. 우리는 매일 촉각에 의해 살아간다. 촉각으로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식과 감정을 형성한다, 촉각은 우리가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고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간다. 우리중 절반 이상이 삶에서 더 많은 신체 접촉을 원한다고 한연구 결괴로 밝혀졌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질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 형성한 섬세한 풍경을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한다. 촉각이란 실제로 삶의 많은 부분에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를 나타낸다. 우리는 얼마전 코로나 라는 괴물로 서로의 접촉을 단절한 시기를 보냈다. 그 시절 산도 혼자서 다니고 영남알프스를 5년동안 돌아다녔다. 코로나가 아직도 머물지만 우리는 서로의 접촉의 소중함을 벌써 잊어버리고 산다. 우리는 접촉을 가변적인 감각이라 느낀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촉각을 타인과 연결되고 위안을 받는 감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서로에게 귀중한 것으로 여겨아한다. 마치 엄마의 모습을 가질려는 마음으로 ᆢ 니이가 들어갈수록 배우자에게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가까운 신체 접촉으로 보답해야한다.
푸르른 산길에 부는 산들바람은 이리 신선을 만드는 인연은 어디로 가는가?
청아한 옥수 가득 흐르는 계곡에 심신을 담고
이 좋은 산을 버리고 가야 하나?
기다리는지 무심한지 오고 가는 산길에 남는 것 없는 발자욱 천국의 세상을 이제사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