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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능력

작성자산자이|작성시간26.06.21|조회수45 목록 댓글 0


자연이 철마다 나타나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지 인간은 늘 그대로 따르는 것 뿐이다.
비바람 불어도 그것이 산인지라 인연으로
초여름 해무가득 담긴 동석산 과 금굴산 마애불 암릉길을 십여년만에 안겨보았다.


인간이 가지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늘 각자가 가지는 것들은 항심 恒心에 의해서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불가의 전생에 가진 것에 대한 인연인 것인지 모두는 능력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능력이란 단지 행위를 하기위한 가치판단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자산이다. 현대인은
능력은 마치 현대인의 등급이 된지 오래되었다. 한번 가진 능력은 평생을 계급장 처럼 늘 지니고 다녀야 하는 낙인이 되어 버렸다. 삶의 기본은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선택사향으로 태어나서 가지는 얼굴의 형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능력은 아무필요에 따라 마치 만병통치약 이나 실체도 없는 행복의 개념의 어느 부분처럼 사용한다. 이름난 축구선수는 단지 능력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좋은 것이고, 어마어마한 인터넷 재벌은 단지 수단이 좋은 것이지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정치인 들도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잘 잡는 것이고, 좋은 신랑감은 단지 같이 사는 방법이 나은 것이고,
산을 잘타는 산꾼은 산을 잘아는 것 뿐이지
모든 분야에 특별한 자질을 나타내는 것 뿐이다. 능력이란 인간의 모든 분야에 심신이나 사고나 품위나 도와 덕의 인성이
깊은 군자를 말한다. 능력이란 단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윽하고 고저늑한 깊은 산이
고향의 마을을 품는 자연과 같은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의 말들처럼 능력은 모든 것을
아우럴 줄 아는 성인이 가지는 것이지 인간의 능력은 단면의 기술일 뿐이다.

인간은 끝없이 움직이는 생물이다. 동물인 이유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이와 같아서 끝없이 변화를 반복하면서 일탈을 꿈꾸고 안정을 바란다. 가만히 있어면 움직이고 싶고 , 움직이면 쉬고 싶은 것이 무슨 까닭인가? 인간은 변하고 싶은 심리적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인간에게 반복은 지루하게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상태가 된다. 우린 동물이기에 일상적인 움직임은 권태에서 발생한다.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의식은 항상 움직이게 만들고, 움직이지 않어면 권태를 작동시킨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실존 상태를 두가지 욕망상태와 권태상태로
나타냈다. 우리는 이런 반복적인 변화를 지속하며 살아간다. 항상 변화없는 마음이란 없다.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우울 이두가지 감정교차는 우리 마음의 엔진 오일과 같고 무슨 의미가 없다. 기능이지 본질은 아니라 는 것이다. 항상 같은 마음은 도인이나 수련자들 의 노력일 뿐이다. 단순핫 감정변화는 지나치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충실하는 것이다. 매일 맛나는 음식을 먹어면 익숙해지고, 하는 일도 반복하면 짜증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 느낄때는 보람차고 행복하지만 권태가 찻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반복을 일으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삶은 큰 일탈 없이 안정적으로 붙들어 준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기에 이런 행동의 행복을 느낀다. 인간에게 감옥은 형벌이다. 그러나 아무런 제재가 없이 자유롭게 나다닐수 있다면 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인간이란 능력은 다같이 한정되어 있는 것같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을 심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젊다는 것은 마치 장사가 잘되는 상인이나 어느 재벌이 주가가 계속 올라가는 회사를 운영하듯이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불어나듯이 계속 통장 에 돈이 쌓이듯 시간이 샇이는 기분이다. 그리고 늘 새롭고 즐거운 사람들이 기다리고 같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즐거워도 시간이 빨라지고 아무런 일도 없어도 세월이 계절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병원도 가고 챙겨먹는 약도 많고 좋은 것들 영양식도 먹어야하고 시간 맞추어 운동이나 동우회 나 귀한 사랑들이나 가까운 사람들 모두 소중하고 고마움을 느끼니 꼭 만나고 함께 어울려야 하는 의무아닌 의무가 되어서 시간을 정해놓고 지내니 바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행동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젊은 시절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당연하다. 나이가 들면 움직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도 경험에 의해서 한번더 신중한 결정을 하고 잘못된 행동이나 잊어버린 일들이 자주 나타나는 번거러움도 시간소요가 많아지는 것도 어쩔수 없다.
나이가 들어 좋은 것은 좋은 것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지갑이나 찻지못할 것을 마음 아프지 않게 편한쪽으로 생각 할려는 어리석은 짓 같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힘이 드는 것 자체가 힘드는 것은 당연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열심히 운동하라는 말은 마치 오래된 자동차를 과속으로 달리라는 말과 같다.
인간은 가보지 않는 길을 가는 방랑자 이다.
가본자 만이 알수있는 길이다. 마치 가본 것 같은 느낌으로 편하게 하는 경험 없는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은 고통을 모르는 갓 면허 받은 의사가 진찰하고 수술하며 오래된 의사같이 말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도 고통받는 환자의 아픔을 알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이든 분들을 전우처념 늘 가까이 지내야한다. 본인을 보는 다른 분도 마치 내가 보는 나이 드신분들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능력이란 서로를 아는 것이다. 오래산다는 것 그것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어면 신기루 같은 짓이다.


존재와 시간은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 라는 말은 모든 있는 것들을 있게하는 근원으로서의 참으로 있음, 즉 만물의 근원 (때문에 , 원인) 과 목적 (위하여,목적 , 끝 )을 의미한다. 시작이요 끝이고, 알파이고 오메가라 한다. 자신은 다른 어떤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면서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는 잘못된 존재의 영역을 영원불변하는 진리의 세계로, 시간의 영역을 시끌벅적한 가상의 세계로 만든 플라톤이후의 전통 철학자들의 고정된 철학관이다. 삶의 진리란 자신이 처한 세게속에서 독자적으로 밝혀지며, 그러한 세계도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너의 진리가 나의진리가 아닐수 있고,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진리가 아날수 있다. 삶의 의미는 정답 없는 물음의 연속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불변의진리, 즉 존재는 다양한 개인을 억압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 혹은 독재자의 횡포를 닮았다. 현대는 '존재와 시간'을 '현존과 세계' 로도 바뀌었다고 한다. '현존의 진리'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며, 그 진리가 발생하는 세계가 아니라 현존이 내면이니 존재는 현존으로, 시간은 세계로 대체될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무런 예고나 계획도 없이 어느날 이세계로 던져졌다. 내가 속한 세계는 내의지와 무관하고 원하든 곳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는 물음이고, 철학은 중요하지 않는 물음을 탐구하지 않는다. 신을 탓하거나 조상을 원망한다고 해서 나의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미 던져진 그 세계를 용기있게 인수하고,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영위하는 결단하는 존재방식이 문제이다. 이것이 인간이 소박하지만 실존적인 자유이다. 세계는 현존의 수만큼 다양한데 그 모두에게 하나의 보편적인 정답을 강요하는 것은 모든 개인을 진리라는 감옥에 가두는 일이다. 세계와 분리된 인간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인간과 분리된 진리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익숙함을 낯설게보기 라는 말은 처음 느껴보는 철학적 견해이다. 이말은 고독도 하나의 능력이라는 바우먼의 현대사회의 과도한 엉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독의 능력이 필요하다 는 말이다. 우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익숙함 속에 매몰되지 말고, 늘 새롭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독함이다. " 와로움으로 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둑의 기회를 놓친다. 사람이 생각을 그러보아 숙고하고 반성하고 창조하는 능력, 그 마지막 단계에서 타인과의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 조차 영원히 알수 없을 것이다. " 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것이다. 우리는 산을 다니는 산꾼이다. 홀로가는 산이 좋은 이유를 물어보는 바보들이 있다.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는다." 산이 하는 말을 들을때가 되어간다.

'낭만에 대하여' 라는 낭만은 무엇인지 잘모른다. 젊은 날 어느 해지는 을숙도에 가서 통기타 치고 술한잔 하는 것이 낭만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낭만이란 노래기사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는 살아가면서 이런것 저런것 수많은 명제들이 마치 이룰수 없는 것들은 모두가 낭만이라 느끼고 살아갔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 라고 낭만의 뜻으로 나타낸다. 우리가 현실성 너머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으로 규정된 것을 떠나는 것이 낭만이라 하는가? 현실이라 믿는 진리는 무엇이냐하면 믿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결국은 불변이라는 진리라는 것에 배반을 당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지배자들이다. 자신이 만든 현실이라는 진리에 변하는 현실에 당하는 것이다.
현실은 우리가 믿는 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믿는 것에 불과한 것들 뿐이다. 현실은 어떤 의미 에선 자기 충족적 예언에 가깝는지 모른다. 우리 인간의 뇌용량은 얼마되지 않는데 지구에 존재하는 것들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것을 느끼는 것도 각자가 다 다르기만 하고 , 어떤 관점과 욕망을 지녔느냐에 따라 매번 재구성 하고 업데이트 하지 않어면 도퇴되는 것이다.
현실은 대부분 자신의 눈앞에서 당장 가능하는 현실의 한부분을 현실 그 자체로 오인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편견이나 이데올기에 갇혀살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같은 세계에 살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것뿐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긍정을 내세우는지 모른다. 낭만적이라는 것은 이루지못하고 이룰수 없는 것들에 대한 향수인지 모른다. 돈이나 건강이나 능력, 사회적 성공 미모등 이룰수 없는 것을 낭만에 기대는지 모른다. 밤을 좋아하는 것은 어둠에서 작은 빛이 소중하기 때문이고 숨겨지는 것들에 의존하려는 나약함을 즐기는지 모른다. 정신력은 결국은 나태해지고 실체적인 무능함에 표출된다.
그러기에 어둠에 익숙해지고 낭만은 밝음을 덮는 어둠이다. 낭만은 여러의미를 동시에 담아야하고 지나간 이미지를 흐릿하나마 얻을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잠재성의 바다에서 노니는 기쁨인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 낭만을 알아갈수 있는가? 삶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도 어느 소수의 뜻대로 가지도 않는다. 현실은 낭만적이 될수는 없다. 단지 찻는다는 마음이 현실이다.



완보완심 緩步緩心 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듬어 보면서 걷는 것을 말한다. 삶에는 가속이 필요할 때가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때는 엄청난 속도가 필요한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세대는 일상이 빠르게 세상을 살아왔다. 멈추는 것은 생각 조차도 못하고 살아왔다. 지금은 가속을 버리고 안정적이고 속도를 버리고 자신의 시간을 찻는 주인이 되어간다. 식민지 사관으로 목적을 향해 성과를 얻기위해 주입하고 주입하는 교육으로 한곳으로 가야만 하는 달리는 삶속에서 살아왔다. 산도 마찬가지로 달리고 달려서 수많은 산을 다녔지만 남는 것은 지나간 산길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안나프르나 서킷이나
북알프스 종주나 용아장성이나 하는 곳을 다닐때는 빠른 것은 죽음이다. 폭설이 갑자기 나린 지리산 종주도 새벽일찍 산장을 나가는 것은 죽음이다. 한 걸음 옮길때마다 숨이차고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쉬는 시간이 많을수록 사는 극한상황이 되면 걷는 것보다 살아있다는 것이 즐거운지 모른다. 모든 일들은 쉬고 느낄때 이루어지는 것이 삶이다. 걸을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생각이 다시 돌아오는 산길은 정말 고마운 것이다. 천천히 몸을 느끼고 생각을 다듬어면 걸을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는 때가 오면 천천히 걸어가는 걸음이 행복한 일이 되는 시절이 온다. 다비드 르 브르롱 의 '걷기예찬' 에서 "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어면서 인간은 지신의 실존에 대한 감정을 되찻는다. " 라고 말한다. 걷는 것만큼 즐겁고 상쾌하며 돈 들지도 않고 건강에 좋은 것도 드물다. 걸어면서 숨을 느끼고 내 몸의 모든 감각을 깨우며 차분하게 생각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뛴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 그동안 많이 뛰어왔어니 이제부터 걸어야 한다. 걷기의 최대핵심은 나를 만나는 일인 것이다. 출가한 스님들도 하루에 한번은 걷기명상을 한다고 한다. 온몸으로 할수 있는 수행은 걷기가 제일 우선이다.


웅프라우 정상이나 몽불랑정상에 가면 생수나 컵라면 한그릇 가격은 대단하다.
집앞 편의점에서 돈 천원 안밖의 가격으로
이용하다가 열배이상의 가격으로 이용하는 것은 내용의 싱분이 변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징소가 주는 특수성 과 대체 불가하는 희소성 때문이다. 우리는 스포츠나 무슨 연예인이나 유명한 분들은 우리사회에서
가두어 키우는 사람들이다. 우리사회에서
대단한 수입이나명예를 가득 담고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란 것이다. 다른 사회에 나가면 마치 야생의 숲에서는 온실속의 난이나 고가의 식믈은 생존은 여지없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우리는 종종 스포츠를 보면 평생을 노력하는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본다.
마치 야생의 숩속에서 어슬렁거리는 생존투쟁의 야생동물 같다. 그들이 십여년이나 평생을 바쳐서 성과나 메달을 따면 얻는 것은 단지 명예에 보상으로 받는 몇푼의 연금이 전부이다. 물론 일부는 국워를 선양하고 최고싀 수입도 올리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수백억의 계약금과연봉을 받고 광고수입으로 천문학적 금액을 빋고 지낸다. 물론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일년에 수백억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의 지도자 마냥 취급 받고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것처럼 무슨 사건이나 이슈를 최고의 뉴스로 도배하는 세상이다. 물론 가치관이란 단지 사회가 만드는 것이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분들보다 배불리 온실속에서 키우는 우리시회가 문제인지 그속에서 자라는 연예인이나 프로선수가 문제인지는 각자 삶이니 무어라 하지 않지만 비인기 종목에 삶을 걸고 배고픈 존재가 되어서있는 선수들을 보면 너무 대단하고 진정한 애국자들이 아닐수 없다.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의 수입을 노녁하는 국가대표나 나라를 위하는 분들에게 특별한 보탬을 줄수 있는 제도나 항상 주는 관심이 진정한 애국이고 삻의 기본이 아닌가? 공연티켓 한장에 수십만원 하는 것에 열광 하기보다
니라를 대표하는 배고픈 분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가치란 보상이 따르는 것이 있어야한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자신에게 생기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마음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달마선사의 말대로 마음이 아프다면 마음을 보여달라고 한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가지고 오라고 한다. 마음은 불가에서 허상이고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이 만든 공空이고 남의 마음을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려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정신의학적으로 표상의 세게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우리는 그 세계의 존재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매일 수없이 많은 생각을 떠올리지만 그것들을 바같 현실과 별개로 구분짓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 감정, 기억등을 바같현실과 잘 맞물려 있는 동일한 세계로 간주한다. 현실과 마음은 차이가 있다. 통념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이유이다. 표상의 세계 인 마음은 태어나서 언어의 영역으로 나타내는 이전부터 가진다는 것이다. 엄마라는 단어나 밥이나 울음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순간 이전부터 눈 앞에서 나타나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현실을 담는 순간부터 생긴다는 것이다. 어릴때 하는 어린아이들이 가상의 놀이 장난감놀이나 소꼽장난도 표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라 한다. 물론, 자페아 처럼 표상의 세계를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는 대부분 언어의 사용을 못하는 것은 마음의 표현을 현실착각으로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조상의 유전자로 태어나기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 능력은 가지고 태어나는지 모른다. 마음이라는 개념은 태고적부터 생존본능에서 가지는 것이다. 표상의 세계는 오래된 경험으로 숲이나 동굴이나 살아남기 위해 미리 가상의 세계를 먼저 인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과 마음은 구별하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이란 가상의 세계이고 자신이 만든 허상일지 모르는 것에 대한 배신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심하면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모르고 사는 것보다 알고 사는 것이 좋다. 안다는 것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는계기로 시야나 관점이 넓어지는 좋은 것이다. 생소히지만 이슬람의 기본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종교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랍ㆍ무슬림 전통은 우주의 아름다움이 꾸란에서 강조되어 있다. 꾸란 자체의 문학적 우월성은 신의 손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의 아름다움은 신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된 인간의 형상이아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라 한다. 과거 이스람법은 직접통치 할수 없고, 공동의 이익의 원칙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통치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술도 위대한 후원자들에 의해 아름다움은 창조하고 우상숭배를 지금도 금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문화는 도시의 성장과 권력, 종교,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했다고 한다. 시, 서예, 음악, 건축, 장식예술은 통치 제도의 후원으로 번성하고 발전되었다. 인간위주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문화이기에 시는 중세 아랍 세계에서 최고이자 가장 광범워한 가장 논의된 예술이고, 미의 개념은 주로 시에서 찻을수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는 장식이 있다." 는 말로서 호화로운 것보다 기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모스크적이다. 아랍권을 적대시하는 기독교적인 사고가 문제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은 영장류로 인간의 우위로 분류하는 것은 종교적 갈등의 결과이고 사실은 침팬지나 원숭이들과 같은 유인원의 분류에 들어간다.
그런데, 인간과 침팬지나 원숭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물학의 연구는 계속 관찰하고 같은 행동이나 습관으로 보면 비슷한 짓을 한다고 한다. 사회성이나 일정한 배우자를 두고 성관계를 한다든지 서열에 따라 단체생활이나 간단한 의사소통도 하는데 어찌 인간처럼 진화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많은 지구의 역사로 연결하여 연구하였다. 초원지대에서 발달한 두발행보나 먹는 것으로 진화 했다는 것등의 이유가 있지만 그것으로는 유인원과 영장류라는 것의 차이는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언어의 차이라는 의사전달의 단어 형성의 감정 전달 혼란스러운 소통상황의 기호전달의 포괄적인 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후두와 유인원의 후두는 다르게 진화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단어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전달하는 다양성이 인간의 의사소통의 발전에 있다고 한다. 애완동물이나 원숭이는 인간의 몇개의 단어에 반응하지만 그것이 의사전달의 소통에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중으로 상징화된 신호들은 아주 늦게야 인간의 언어속에 확립되었다. 원숭이는 이런 이중으로 암호화된 신호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인간들 중에서도 밀림처럼 낙원이라는 곳에서 단순히 떠들고 잠자고 함께 모여 짝짓기나 하는 천국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은 유인원과 별반 다른 소리나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언어는 인간과 다른종들 사이뿐 아니라 상이한 다른 인간의 문명들 간에도 근본적인
걸림돌이 된다. 인간은 다른 관점에서도 자기 언어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도 누구는 언어의 영역을 벗어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리 찬란한 암릉에 나린 마애불 인연에
지나가도 잊고 사는 중생을 담을수 있나?

어찌 이리 해무가득 숨는 암릉꽃들은 자난 세월 그리 자주 왔지만 늙어가는 걸음앞에 피는가?

세월이 흐르면 돌산도 변하고, 산야는 어디서
이리 새로운 산길을 운무담고 보여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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