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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중 열국지 235

작성자김상규|작성시간21.09.03|조회수209 목록 댓글 0

[列國誌] 235

■1부 황하의 영웅 (235)

제 4권 영웅의 길

제 30장 한원대전(韓原大戰) (3)


이듬해인 BC 649년, 주왕실(周王室)에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했다.

양(揚), 거(拒), 천(泉), 고(皐), 이(伊) 등의 땅에 거주하는 융족(戎族)이 동시에 주왕실의 수도인 낙양성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융족(戎族)의 이번 침공은 단순한 외침이라기보다는 역모에 가까운 내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주나라 왕은 주양왕(周襄王), 재위 3년째 접어들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복동생인 왕자 대(帶)가 있었다.

본래 주양왕의 아버지 주혜왕(周惠王)은 왕자 대(帶)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제환공의 개입으로 태자이던 주양왕(周襄王)이 왕통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자 대(帶)는 그 후에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낙양 주변의 융족(戎族)을 사주하여 왕성을 치게 하고, 자신은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해 왕위를 탈취하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 왕성 위기.

주양왕(周襄王)은 지체하지 않고 패공인 제환공을 비롯한 진목공과 진혜공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주왕실의 위기는 제후국에게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패공 제환공(齊桓公)은 즉각 명재상 관중에게 군사를 내주어 낙양으로 달려가게 했고,

진목공과 진혜공 또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왕성(王城)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제나라는 동쪽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반면, 진(晉)과 진(秦)은 황하 물길을 타기만 하면 곧바로 낙양에 다다른다.

당연히 진. 진의 군대가 제나라 군대보다 먼저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진목공(秦穆公)과 진혜공(晉惠公)이 왕성 교외에 이르렀을 때는 융족의 공격이 한창일 때였다.

막 왕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던 융족은 예상보다 빠른 구원군의 도착에 당황했다.

그들은 왕자 대(帶)의 사주를 받고 침공한 하수인.

굳이 자신의 병사를 희생하면서 까지 제후군과 싸울 까닭이 없었다.

융병(戎兵)은 진(晉). 진(秦)의 군대를 보자 동문을 불사르고는 재빨리 후퇴했다.

융족(戎族)을 추격하던 진목공과 진혜공은 왕성 교외의 들판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진혜공(晉惠公)은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인사말을 던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반면, 진목공(秦穆公)은 당당하게 진혜공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귀국의 소식은 잘 듣고 있소."

"..............."

진혜공(晉惠公)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진목공(秦穆公)을 피해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그는 진(秦)나라 군대가 일사불
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혹시 자신에게 앙갚음하지나 않을까 겁을 먹었다.

그래서 그는 왕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군막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를 보고 있던 진(晉)나라 망명객이자 비정(丕鄭)의 아들인 비표(丕豹)가 진목공(秦穆公)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진군(晉軍)이 달아나듯 회군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진군(晉軍)을 추격하여 급습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번 출병은 왕실을 돕기 위해 나온 것이다. 어찌 사사로운 원한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역시 군대를 거두어 진(秦)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 재상 관중이 제군(齊軍)을 이끌고 왕성에 이르렀을 때, 융병은 이미 모두 달아나고 난 뒤였다.

중원의 패자국 답지 않는 느슨한 움직임이었다.
관중은 머쓱했다.

'장차 진(秦)과 진(晉)을 경계해야 하겠구나.'

수년 전만 하더라도 왕실의 일에 끼여들 여력이 없던 진(晉). 진(秦)이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중원의 여러 제후들을 제치고 별 어려움 없이 왕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있음은 그만큼 두 나라가 강국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대로 돌아가서는 제(齊)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다.'

관중(管仲)은 군대를 정연하게 배치한 후 융족의 우두머리인 융주(戎主)에게 사자를 보내 크게 꾸짖었다.

- 그대들은 어찌하여 왕성을 침범하였느냐?"

융주(戎主)는 제군(齊軍)의 위세에 눌려 사람을 보내 사과하며 변명했다.

- 우리가 어찌 자의로 왕성을 범하겠습니까? 왕자 대(帶)가 여러 차례 군자금을 내주며 치라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 뿐입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주양왕(周襄王)과 왕실 사람들은 비로소 이번 사변(事變)이 왕자 대(帶)의 농간이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주양왕은 그 날로 왕자 대(帶)를 왕성에서 추방했다.

이어 멀리 동쪽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융족(戎族)을 호령한 관중(管仲)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특별히 그를 왕실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대에게 경사(卿士)의 벼슬을 내릴까 하오."

주양왕(周襄王)은 관중을 한껏 우대했다.
그러나 관중은 정중히 사양했다.

"신은 미천한 관리에 불과합니다. 신의 나라인 제(齊)나라에는 천자께서 임명하신 두 경사(卿士) 국씨(國氏)와 고씨(高氏)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입조하여 천자의 명을 받을 때 천자께서는 그들을 어떠한 예로써 대하려고 신을 경사(卿士)에 올리려 하십니까?"

주양왕(周襄王)은 더욱 관중(管仲)에게 매료되었다.

"관중이여, 나는 그대의 훈공(勳功)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대의 아름다운 덕에 보답하고자 할 뿐이다.

마음 깊이 간직하여 내내 그대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니 굳이 사양하지 말라."

그러고는 끝내 관중에게 경사(卿士)의 직을 내리고 연일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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