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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중 열국지 527

작성자김상규|작성시간22.07.08|조회수126 목록 댓글 0

[列國誌] 527

■ 2부 장강의 영웅들 (183)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4장 쓰러지는 부도옹(不倒翁) (3)


그 해 여름, 초강왕(楚康王)은 오(吳)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릴 작정으로 대군을 일으켜 장강(長江) 하류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오(吳)나라는 만반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강 어귀를 수백 대의 전함이 지키고 있어 도저히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초강왕(楚康王)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회군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화풀이할 겸 다시 군대를 내어 정(鄭)나라를 쳤다.
육상 전투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초군은 성균(城麇)까지 진격하여 마음껏 유린하고 약탈했다.

이 싸움에서 초나라 장수 천봉술(穿封戌)은 정나라 수비대장 황힐(皇肹)을 사로잡는 전과를 세웠다. 함께 공격했던 초강왕의 동생 웅건(熊虔)은 천봉술이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났다.

그는 왕의 동생인것을 믿고 천봉술에게로 가 황힐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천봉술(穿封戌)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웅건(熊虔)은 괘씸하게 여기고 초강왕에게로 달려가 천봉술을 모함했다.

"제가 잡은 정나라 장수 황힐(皇肹)을 천봉술이 뻬앗아갔습니다."

초강왕이 천봉술을 불러 사실 여부를 묻자, 천봉술은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방금 전에 공자 위(圍 ; 웅건)께서 황힐을 내달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적장을 잡은 것은 신(臣)입니다."

초강왕(楚康王)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마침 지혜롭기로 소문난 태재 백주리(伯州犁)가 눈에 띄었다. 그를 가까이 불러 말했다.

" 이 일을 경에게 맡기노니 잘 판결해서 불화가 없도록 하오."

명을 받은 백주리(伯州犁)는 웅건과 천봉술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이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오. 사로잡힌 적장 황힐을 불러 심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오."

곧 황힐(皇肹)이 끌려나왔다.

백주리(伯州犁)는 먼저 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분은 공자 위(圍)라는 분으로 우리 대왕의 친동생이시다."

다음으로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천봉술이란 분으로 방성(方城) 밖의 한 고을을 다스리시는 현윤(縣尹)이시다. 어느 분이 그대를 잡으시었는가? 바른 대로 말하시오."

황힐(皇肹)은 백주리의 손가락 움직임에서 이미 그 속뜻을 짐작했다.
그는 웅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 황힐을 사로잡은 것은 왕자이시오."

그 순간 천봉술(穿封戌)은 분노하여 옆에 있던 병졸의 창을 빼앗아 웅건을 향해 찔러댔다.

"서로 짜고서 나의 공을 빼앗으려 하는구나!"

웅건(熊虔)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흥분해 날뛰는 천봉술(穿封戌)을 백주리가 겨우 잡아 진정시켰다. 그는 초강왕에게로 가서 보고했다.

"이번 공로는 반씩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똑같이 상급을 받았다.

- 상하기수(上下其手)
라는 말이 있다. 잘못인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일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백주리(伯州犁)가 웅건을 가리킬 때는 손가락을 위로 향했고, 천봉술(穿封戌)을 가리킬 때는 아래로 향했기 때문에 이러한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같은 해, 위(衛)나라에서는 위상공(衛殤公)이 살해되고 쫓겨났던 위헌공(衛獻公)이 제구로 입성하여 복위했다. 손림보(孫林父)와 함께 위헌공 축출을 주도했던 영식의 아들 영희(寧喜)가 손씨 일족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한 것이었다.

손씨 일족은 패하였고, 위상공(衛殤公)은 구금되었다가 끝내 독살당했다.

이로써 위헌공은 망명 생활 12년 만에 다시 군위에 올랐다.
그러나 반란의 주역인 영희(寧喜)는 얼마 후 복위한 위헌공에게 죽임을 당했고, 위헌공의 동생인 태숙 의(儀)가 재상에 올랐다.

이듬해인 BC 546년(제경공 2년), 치열한 다툼만으로 일관해오던 춘추시대에 한 획을 긋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각 제후국 간에 긴장 완화를 위한 회합이 마련된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제평화회담이다

역사는 이 회담을 '미병지회(弭兵之會)'라고 부르고 있다. '미(弭)'란 '중지하다' 라는 뜻이고, '병(兵)'은 군대, 즉 전쟁을 의미한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회합 - 정전회의나 다름없다.

이 미병지회(弭兵之會)가 갖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각 나라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최초의 시도라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회합이 군주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각 나라 귀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각 나라 유력 귀족들의 권한이 국제회의를 주도할 만큼 세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병지회(弭兵之會)'의 주창자는 송나라 대부 향술(向戌)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중원의 강자는 진(晉), 초(楚), 제(齊), 진(秦) 이렇게 4개국이다.

이중 특히 진(晉)과 초(楚)나라는 초강대국으로서 맹주자리를 놓고 하루가 멀다하고 다툼을 벌였다. 이들의 동의 없이는 평화회의는 열릴 수 없다.

향술(向戌)은 직접 진나라와 초나라, 그리고 제나라와 진(秦)나라를 찾아다녔다. 이 무렵 진나라의 실권자는 범개에 이어 원수에 오른 조무(趙武)였다.
향술은 조무와 친했다.

- 전쟁은 백성을 해치고 국가의 재물을 없애게 하는 좀입니다.

이렇게 설득했다. 조무는 향술의 제안에 찬성했다.

향술(向戌)은 초나라 영윤 굴건(屈建)과도 친분이 깊었다. 굴건 또한 승낙했다. 제(齊)나라, 진(秦)나라도 동의했다.

회담 장소는 송나라 수도인 상구성 서문 밖 교외, 참석 제후국은 총 14개 나라였다. 물론 참석자는 각 나라 유력 귀족들이다. 군주들은 일체 제외되었다.

그러나 미병지회(弭兵之會)가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진나라와 초나라 대표 사이에 시종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초나라 영윤 굴건(屈建)은 진나라 재상 조무를 의심했고, 조무(趙武)는 굴건을 의심했다.

굴건(屈建)은 예복 속에 갑옷을 숨겨 입고 진나라 대표 조무(趙武)를 습격해 죽일 계획을 꾸몄다. 이를 백주리가 알게 되었다. 백주리는 원래 진(晉)나라 사람으로 초나라로 망명한 인물이다. 굴건의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왔다.

그는 굴건에게 간(諫)했다.

"지금 모든 나라는 초(楚)나라가 신의를 지킬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불신의 행동을 저지르면 그것은 스스로 다른 나라를 진(晉)나라에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갑옷을 벗으십시오."

굴건(屈建)은 얼굴을 붉히며 백주리의 말에 따랐다.

조무(趙武)는 초나라 영윤 굴건이 비밀리에 무장 병사들을 주변에 배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양설힐(羊舌肹)을 불렀다. 양설힐은 숙향(叔向)이라고도 한다. 진나라 제일의 지자(智者)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다.

"초나라가 수상한 행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오. 우리도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소."

양설힐(羊舌肹)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회합의 목적은 서로 군사를 쉬게 하자는 것입니다. 만일 초(楚)나라가 군사를 쓴다면 이는 천하 모든 나라에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이 됩니다. 그리하면 중원은 초나라를 멸시할 것이요, 반대로 우리 진(晉)나라는 신의를 드날리게 됩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맹약에 임하십시오."

조무(趙武)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합에 참석했다.
평화회담은 성공리에 끝났다.

- 각 나라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각 나라 대표들의 맹세였다. 여기서 또 신경전이 벌어졌다.

초(楚)나라 대표 굴건(屈建)이 향술을 불러,
"우리가 가장 먼저 희생의 피를 입술에 바르겠소."
하고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향술(向戌)은 입장이 곤란해졌다. 맹주국인 진(晉)나라가 두 번째에 서는 것을 양보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고 시종을 보내 초나라 조건을 조무에게 전달했다.

조무(趙武)는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이제껏 우리 진나라는 맹약에 있어 두 번째로 희생의 피를 바른 적이 없다."

향술을 통해 조무의 이말이 굴건의 귀에 들어갔다.

굴건(屈建)은 버럭 화를 냈다.

"그것은 우리 초(楚)나라도 마찬가지요. 만일 진(晉)나라가 언제나 먼저라면, 그건 우리 초나라가 진나라보다 뒤진다는 뜻이 되오. 우리는 동등한 입장에서 이 회합에 나온 것이지 진나라 뒤에 서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오."

이 말을 전해 들은 조무(趙武) 또한 화를 내었다.

그러자 양설힐(羊舌肹)이 다시 조무를 설득했다.

"맹약을 주재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덕(德)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덕이 있다면 나중에 희생의 피를 바른다 할지라도 어찌 중원 여러나라들이 우리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며, 덕이 없다면 먼저 희생의 피를 바른다 할지라도 우리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맹세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일로 다투면 싸움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면 신용을 잃고 맙니다. 원수께서는 초나라에 양보해 주십시오."

결국 조무가 양보하여 굴건이 가장 먼저 제단에 올라가 희생(犧牲)의 피를 입술에 발랐다.
이로써 '미병지회(弭兵之會)'는 성사되었다.

실제로 이 미병지회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 동안 맹주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다퉈왔던 진(晉)과 초(楚)가 이 회담을 계기로 일체 전쟁을 벌이지 않은 것이었다.

춘추시대로 접어든지 220년 만에 비쳐진 평화의 햇살이었다.
대신 전쟁의 소용돌이는 남방의 장강(長江) 유역으로 옮겨간다.

이 회담이 갖는 또 한가지 역사적 의의는, 앞서도 얘기했듯, 그 주도자가 군주가 아닌 유력 귀족들이라는 점이었다.

이제 거대한 용(龍) 중국은 바야흐로 '제후시대' 에서 '귀족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미병지회(弭兵之會)는 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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