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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참된 기독교', 5장 에드워즈의 해임, 참된 기독교로의 부름

작성자강대식|작성시간20.06.30|조회수278 목록 댓글 0

5장 에드워즈의 해임, 참된 기독교로의 부름

 

에드워즈는 당대 가장 유명한 목회자였고 노샘프턴 교회는 식민지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교회였다. 에드워즈는 신학에 철저히 근거를 둔 목회를 해나갔고 사역 기간 몇 차례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고 에드워즈는 부흥의 주된 도구였다. 에드워즈는 창조적이고 심오한 내용, 유려한 문체의 강력한 설교를 했는데, 미국 역사상 에드워즈에 필적한 만한 설교자, 신학자는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노샘프턴 교회는 성찬 논쟁으로 알려진 것에 대한 에드워즈의 결정과 방침에 반발하여 20년 동안 자신들의 목사로 섬겼던 에드워즈를 해고했다.

 

에드워즈와 회중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 명목상 기독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깊은 우려와 참된 기독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드워즈에게 회심은 언제나 실제적인 것이었고 에드워즈의 최우선 관심사였다. 이 갈등 가운데 나타난 에드워즈의 모범은 오늘날 교회 안에 참된 회심, 참된 기독교를 추구하도록 교훈해 준다.

 

성찬 논쟁

 

에드워즈는 55년 동안 노샘프턴 교회를 목양했던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가 도입해서 시행한, 노샘프턴 교회의 기존 성찬 방식을 예전부터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스토다드는 성찬을 회심 의식으로 보았고, 따라서 신앙을 고백하고 단정하게 생활하는 모든 이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고, 참여하도록 했다. 1749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외조부 스토다드의 견해를 취했다. 외조부의 책을 통해 배웠고, 유년 시절부터 받아들인 외조부의 관행을 따라 실천해 왔다. 내 자신의 견해에도 풀지 못한 난점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해석에 대한 불신, 그토록 존경받는 분의 권위에 대한 존경, 외조부의 견해의 표면적인 타당성, 외조부의 목회적 성공, 그리고 외조부의 엄청난 명성과 영향력이 외조부의 견해에 대한 나의 의혹을 오랫동안 억눌러 왔다.”

 

그러나 1740년경부터 에드워즈는 삶으로 신앙고백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참된 회심을 성경이 말하는 수준으로 강조하기를 원했고, 경건하게 살아감으로, 참된 신자로 여겨지는 사람들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를 원했다. 에드워즈는 성경적으로 분명한 근거가 있는 이런 입장이 기존 견해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 대한 에드워즈의 방침은 시행되자마자 반대에 부딪쳤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찬 자격에 대한 강론에서 말했다.

 

가시적 성도들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것이고, 모든 곳에서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초점에 해당하는 것, 즉 가시적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가시적으로 경건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경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시적으로 경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경건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시적 성도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성찬 자격에 대한 논쟁은 교회 회원권에 대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1748년 한 젊은이가 에드워즈에게 교회 회원권을 요청했을 때, 에드워즈는 젊은이에게 회심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구했다. 교회의 회원이 되어 교회 회원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신앙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반대하자 에드워즈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명백한 것이고 아무도 부인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종교 또는 신앙에서 경건한 마음과 삶은 중심적 요소이다. 오늘날은 기독교 교리를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본래의 정의에 어긋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이다.”

 

에드워즈는 기독교가 윤리 규칙 또는 믿는다고 고백했다가 잊어버리는 교리 체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가슴 종교라고 말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가슴 종교, 영적인 종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가르쳐 주신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이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 교리와 외적인 의식만 고백하고 영적인 것은 빠뜨려 버린다면, 그 사람이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라 할 수 없다. 기독교에 가장 본질적인 것을 빠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믿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교회 회원권에 대한 느슨한 방침은 해당 교회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흔한 사람의 내면을 요구하지 않는 피상적인 종교를 믿는다는 고백은 사실, 그리스도가 이방 종교보다 더 혐오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신앙고백을, 자기 교회와 가족으로 받아들여, 친구와 자녀로서 자기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정하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논증은 선명하고 강력했으나 많은 이들이 에드워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했다. 성찬 자격에서 시작해서 교회 회원권으로 확대된 이 논쟁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고, 뉴잉글랜드 전역의 많은 이들과 교회가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의 갈등에 있어서 사소한 일에까지 귀를 세우고 있었다. 결국, 에드워즈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으는 데 실패했고, 1750622, 에드워즈와 에드워즈를 비방한 사람들 사이의 여러 갈등이 여전히 끓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에서 해임되었다.

 

에드워즈는 참된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태도로 말미암아,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에드워즈가 생각하기에는 이 문제는 모든 것-자신의 평판, 목사직, 개인적인 안정과 평안-을 걸어야 할 만큼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다. 에드워즈는, 참 신자의 성찬 참여를 옹호하는 것이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거룩한 전초기지로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참된 기독교를 증진시키는 데 있어 자기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에드워즈의 고별 설교에 분명히 드러나는 목사직에 대한 이해는 성찬과 교회 회원권 논쟁에서 에드워즈가 취한 결정과 행동에 빛을 비춰 준다.

 

목사는 안내자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 성경에서 목사는 교회 안에 세워진 등불로 묘사되곤 한다. 그래서 목사는 때때로 교회 회중을 만나서 가르치고 깨우친다. 잘못을 교정하고, 회중에게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30:21)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진리를 밝히고 확증해 준다. 틀리거나 나쁜 견해를 논박하고, 잘못된 자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의심하는 자들을 굳게 세워 준다.”

 

에드워즈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성찬이나 교회 회원권에 있어서 미지근한 관행을 지지할 수 없었다. 양떼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자로서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고 실제로 복음은 죄인을 꿰뚫고 들어가 영원히 변화시키는 불타는 진리였다. 성찬 논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 참된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압축할 수 있다. 의견 충돌과 갈등을 다루는 에드워즈의 방식이 때때로 논쟁의 기세를 부추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에 있어서는 에드워즈는 언제나 건전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성경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회원들의 하나 됨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신실한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을 황무지로 몰아내고 말았다.

 

참된 기독교의 추구

 

이후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의 강단 사역 같은 사역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목회적, 신학적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다. 에드워즈의 통찰력과 실천적 경험은 오늘날 우리 상황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참된 회심과 참된 회심이 만들어 내는 선명한 기독교적 삶을 추구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행한 동원 나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사역 그리고 복음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 접근

 

회심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탁월한 분으로서 절대적 우선권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교회를 세우셨고, 영혼을 구원하셨고, 순종을 받고 믿음의 대상이 되기에 유일하게 합당하신 분이다. 에드워즈는 실용적인 관심사를 목회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목회에서 중심적인 관심사는, 자신이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가였다. 통계나 개인적인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 중심적인 길을 따라갔다. 그 길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심지어 회중의 이해 부족으로 말미암아 목회 사역 자체를 위협하는 그런 곳으로 인도해 갈지라도 하나님 중심적인 길을 걸었다. 에드워즈는 목회 사역지를 잃어버렸을 때도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회에 대한 열망은 큰 시련 가운데서도 지속되었다. 결국 에드워즈 자신이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삶이 돌아갔다. 이런 시각은 에드워즈의 행복의 뿌리였을 뿐만 아니라 시련 가운데 에드워즈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자신을 참된 회심을 위해 힘쓰도록 부르셨다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확신했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인 외양 아래 자신의 실상을 감추고 있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기만성을 깨닫도록 하는 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었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의 회원들이 눈에 띄는 상석에 앉으려고 다투고 경건의 모양새만 갖춘 채 성찬식에 참여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괜찮다고 가정하는 식으로 무사 안일한 태도로 목회할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명목상 기독교에 맞서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교회 안의 명목상 기독교와의 싸움이 자신의 모든 것을 대가로 지불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실제로 에드워즈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명목상 기독교와 싸웠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 회심했다고 주장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에는 전혀 미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조차 참 신자로 인정하고 있댜. 이런 상황에 온갖 재정적 그리고 사회적 압력까지 더해져,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있어 자기 교회 회중으로 하여금 명목상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과 회심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면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작 이것이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성경이나 기독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교회에 겨우 참석하고, 성경과 정반대 되는 신념을 고수하고,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도 실패하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하나님 중심적 목회는 본질적이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인 모든 것을 떨쳐 버릴 것을 요구한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목회 사역을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도록 요구한다. 목회자 겸 신학자인 에드워즈의 모범은 신학을 욕인 양, 설교를 집단 심리 요법 정도로 생각하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오늘날 목사직에 대한 탁월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사역을 하나님 안에 정초시키려는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진부하게 또는 어떤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 목회의 근본 문제는 이런 하나님 중심성을 망각한 데 있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성경은 모든 것 위에 권위를 갖고 모든 사역은 성경으로 충분하다. 성경 인용이 전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열정적으로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에 필요한 것이 이것이고 이런 목회자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얻기 위해 세상의 경영이나 마케팅 방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능력과 매력이 넘치는 참된 회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증진시키는 교회가 필요하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성경은 발판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 결코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모든 사역을 형성하고 점검하도록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참된 기독교의 중개인이며 하나님 말씀의 학생으로 처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적인 사고와 삶을 기르고 드러낼 기회가 주어진다.

 

복음이 이끄는 교회가 중심이다

 

에드워즈는 지역 교회의 중요성을 확신했다. 기독교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곳, 하나님이 자신의 복음을 구현시키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했다. 회중에게 성경의 풍성한 가르침을 전하고 몸소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교회를 사랑했고 복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죄와의 투쟁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와 신학 작업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죄와의 투쟁’, 이 두 가지를 기독교의 참된 이해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았다. 에드워즈는 죄의 기만성을 폭로하기 위해 힘쓰면서, 동시에 회심에서 비롯되는 참된 감각이 회개한 심령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어떻게 불붙이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결국 성경적 신앙은 구세주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증오 둘 다에서 시작하고 마친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신앙은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참된 기독교의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이 두 교리들을 죄인의 가슴과 머리에 넣어 주셔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 두 교리를 굳게 붙잡고 이 두 교리를 재료 삼아 교회 생활을 펼쳐 나가야 한다. 참된 기독교는 죄에 대한 애통만도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만도 아니다. 참된 기독교는 둘 다다. 죄를 슬퍼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이 결합되어 사람의 심령에 함께 거하는 것이 기독교다. 그리스도와 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여 믿고, 이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기독교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토대가 되는 이런 실재에서 이탈하여 다른 가르침- 정치적 입장, 사회적 대의명분, 특정 생활방식-에 따라 교회의 정체성을 정립하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한 이런 상황에서 죄의 영향력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제대로 강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절실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방팔방에서 도전과 유혹을 받는 오늘날,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과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격과 사역에 정초시키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집중함으로써 죄와 싸워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인생

 

에드워즈는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정신을 깨우치고 감동을 주며 영혼을 뒤흔드는 설교를 한 최고의 설교자가 되었다. 한 줄 간격으로 작성된 10쪽 내지 20쪽 정도 분량의 설교문은 한 권 분량의 두꺼운 책들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간단히 말해 에드워즈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에드워즈는 참다운 성도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전 생애를 통해, 에드워즈는 매일 아침마다 목마른 사슴의 심정으로 주님을 찾았으며, 자신의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 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예배했다. 에드워즈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찬 참된 성도의 삶을 살았다.

 

에드워즈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배했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인생의 최우선 폭표로 삼고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에드워즈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인생의 대소사에 관여하시며 자신의 크신 지혜로 섭리하시는 분이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지닌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이며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구원에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다. 궁극적으로 에드워즈의 삶의 초점은 영감된 말씀을 통해 타락한 인간들에게 대속의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맞춰져 있었다. 이런 에드워즈의 삶의 모습이야말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기쁨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가야 할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에드워즈의 사상과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이다. 우리는 에드워즈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동일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 모두 에드워즈의 지혜를 빌려 에드워즈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오래 전 하나님을 사랑했던 에드워즈가 그랬던 것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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