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나 사건은
그 의식의 상태 혹은 전부 속에서의 개인의 의식 수준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전부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식의 각각의 수준이 그런 장에서
카오스이론에 나오는 '끌개장'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도를 나날의 삶에서 나타나는 좋고 싫은 감정의 상호 작용 속에서 가려낼 수 있습니다.
생활 방식, 지거업 선택, 사회적인 행동 습과, 약점, 강점, 집단적인 동일시 등으로 표현되는
끌림이나 반발 같은 현상 속에서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문 : 그런식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촉진시켜 줄 만한 간단한 장치나 기법이 있습니까?
답 : '저것' 과 '이것'을 , '무엇(what)'과 '누구(who)'를, '자동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을,
'관찰되는 것'과 '관찰자'를 식별하도록 하세요.
의식의 관찰자.증인.앎과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려 내는 것은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것은 보이고 들리는 것과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식별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나의 눈(The Eye of the I)은 자아에서 알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주는 참나입니다.
태양이 빛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참나의 빛이 없었다면 자아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참나의 빛이 의식이 앎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몸은 에고가, 에고는 몸이 존재함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스러움은 신성의 참나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적 근원임을 드러내 줍니다.
무한하고 영원하고 비인원적인 참나는 이원성과 지각의 세계속에서 자아로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참된 근원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아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에고는 처음에는 참나가 자신의 근원이라는 시실을 반박합니다.
자신이 따로 분리되고, 자족적이고, 제 힘으로 작용하며, 독립적인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이성과 지적인 능력의 수준으로 성장하고 나면
에고는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스스로를 넘어선 곳에서 해답을 찾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성숙도가 낮은 수준에서 지성은 교만해지는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능력과 행위가 다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며
저작귄을 주장하고 스스로를 진화의 정점으로 봄니다.
어떤 시점에 이르렀을 때 성숙한 지성은 영적인 정보를 식별해내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지성을 다시 자부심과 위치성에 눈이 멀 수 있습니다.
더 많이 경험하고 영적으로 진지하게노력하는것과 아울러
겸손한 자세를 자질 때 에고의 지배력은 약화됩니다.
또 영적인 앎이 점차 향상되는 상태를 좀 더 깊이 있게 체험한 수 있습니다.
이런 초기 국면은 기꺼이 사랑하려는 자발성에 수반되는 일종의 선물입니다.
뒤어어 일어나는 영감은 평화와 기쁨의 영역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럴때 연민이 지배적인 것이 되며, 지각을 통찰로 전화시켜 줍니다.
이과정이 완료될 때 자아는 참나 속에 녹아 없어집니다.
600으로 측정되는 이 수준은
세상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깨달음이라고 불러온 의식의 수준을 의미합니다.
이 지점에서 지복의 상태는 세상에서 더 이상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복 자체가지도 신에게 내맡기면 현자의 상태에 이릅니다.
이 단계가 무르익을 때
신의 의지가 뒤이어 일어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 그럴 때 자아 감각은 사라지나요? 에고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니까요,
답 : 자아가 참나 속으로 녹아드는 과정은
한정되고 덧없고 취약한 것으로부터, 모든 세계와 우주를 초월하는,
불멸의 무한한 전부임으로의 엄청난 확장으로 체험됩니다.
그러한 참나는 시간성 너머에 존재하므로 탄생과 죽음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참나가 가려진 것은 지각이 모든 실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탓에서 비롯되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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