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4부/ 여섯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 15장. 얄리의 종족(19)

작성자연곤|작성시간25.12.03|조회수18 목록 댓글 0

근본적인 이유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적어도 일부 지역은 유럽인이 식량을 생사하고 정착하기에 적합한 데 있다.

물론 원주민을 몰아내는 데는 유럽의 총과 균과 쇠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앞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기후와 토양이 제기하는 어려움을 강조했지만, 

비옥하고 생산적인 지역에서는 유럽의 농경법을 적용할 수 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온대기후권에서 주로 재배하는 작물은

유라시아 온대기후권의 주된 작물, 즉 밀(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작물), 보리와 귀리, 사과와 포도이다.

그 밖에도 아프리카 사헬 지역이 원산지인 수수와 목화, 안데스 지역이 원산지인 감자가 있다.

북동부의 열대지역(퀸즐랜드)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기원을 둔 작물이 자리기에 최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농경을 시작한 유럽인은 뉴기니로부터 사탕수수,

동남아시아 열대지역으로부터 바나나와 감귤류, 남아메리카 열대지역으로부터 땅콩을 들여왔다.

가축으로는 유라시아의 양을 도입함으로써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건조한 지역에서도 식량, 즉 양고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습한 지역에서는 작물을 재배하는 동시에 유라시아의  소도 길렀다.

 

결국 기후가 비슷한 지역에서 작물화한 식물과 가축화한 동물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입된 이후에야 식량 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작물화와 가축화가 이뤄진 곳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바다를 횡단하는 항해술이 발달한 뒤 그런 전달이 가능해졌다.

뉴기니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대부분 지역에는 유럽인의 접근을 방해할 만큼 심각한 풍토병이 없었다.

북부의 열대지역만 말라리아를 비롯한 열대성 질병 때문에

유럽인이 19세기에 정착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의학의 발달에 힘입어 결국 정착하는데 성공햇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도 유럽인의 식량 생산을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잠재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농지와 목축지를 이미 원주민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은 당시에도 수렵.채집을 하며, 그런 곳에 가장 조밀하게모여 살앗다.

유럽 정착민은 두 가지 수단을 동원해  원주민의 수를 크게 줄엿다.

하나는 총기를 이용한 살상이었다. 

이 방법은 유럽인이 1930년대 뉴기니 고원지대에 들어갔을 때보다

18세기 말과 19세기에 그런대로 용인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행한 대규모 학살은 1928년에  앨리스스프링스(Alice Springs)에서 벌어졌고, 

이때 31명의 원주민이 학살당했다.

다른 하나는 유럽인이 가져온 병원균이었다. 

안타깝게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는

이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을 획득하거나 유전 저항을 키울 기회가 없었다.

1788년에 첫 유럽 정착민들이 시드니에 상륙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전염병으로 죽은 원주민의 시신이 흔한 구경겨리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을 죽음으로 몰아간 주된 질병은

천연두와 독감, 홍역, 장티푸스, 발진티부스, 수두, 백일해, 결핵, 매독이엇다.

 

이 두가지 요인 때문에 유럽식 식량 생산에 적합함 모든 지역에서

자주적으로 살아가던 원주민 사회가 지워졌다.

어떻게든 무사히 살아남은 원주민 사회는 유럽인에게 쓸모가 없믄 북부와 서부에 있던 사회였다.

유럽인이 정착을 시작하고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4만 념 동안 지속해온 원주민의 전통문화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내가 이 장을 시작하며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오스트레일리아 우ㅠㅓㄴ주민에게 결함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원주민이 4만 년 동안이나 문자도 없이 수렵.채집민으로 떠돌아다니며 살던 대륙에 

영국 이주자들이 발을 들여놓은 지 수십 년 만에 

문자를 사용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둘에 대한 비교는 인간 사회의 발전 과정을 엿볼볼 수 있는 완벽한 대조 실험으로, 

결국 인종 차별적 결론을 우리에게 강요하는게 아닐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비교적 단순하다.

백인 영국 이주자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민주주의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만든 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 모든 것, 즉 가축과 온갖 종류의 작물(마카다미아 제외), 야금술과 관련한 지식,

증기기관, 총과 알파벳, 정치제도, 심지어 병원균까지 오스트레일리아 밖에서 가져왔다.

그 모든 것은 유라시아 환경에서 1만 년 동안 숙성된 결과물이었다.

1788년 시드니에 상륙한 정착민은 지리적 우연으로 그것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유럽인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젓이 없었다.

따라서 로버트 버크과 윌리엄 윌스는 글을 쓸 정도로 똑똑했지만, 

원주민이 살아가던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지역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똑독하지는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회를 일궈낸 사람들은 그 대륙의 원주민이었다.

물론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는 

문자가 있고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환경적  특징에 있었다.

 

 

516 - 519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