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황폐해져가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올바른 대책을 세웠다.
나무를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고, 생태계에 위협적인 돼지와 염소의 사육을 중단했다. 그리고 고원지대에서 내려왔다.
침식을 막기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웃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예컨대 늦봄에는 풀의 생장을 보장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소유한 고산지대의 초지까지 양들을 여름의 언제 쯤 끌고 올라가야 하고,
가을에는 양들을 데리고 내려올 때를 함께 결정했다.
농부들은 공동으로 소유한 초지에서 최대한 몇 마리까지 양을 키울 수 있고,
그렇게 결정된 양의 수를 각 가정에 어떻게 할당할 것인지도 함의해서 결정했다.
이런 식의 의사결정은 상황에 민감하고 탄력적이지만 보수적인 면도 띤다.
실제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내게 그들의 사회를 보수적이고 경직된 사회라고 표현했다.
1397년 이후 아이슬란드를 통치한 덴마크 정부도 그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려는 진지한 노려을 보일 때마다
그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하기 일쑤였다.
덴마트 정부는 작물 재배, 그물의 개선, 소형 어선보다 대형 어선을 이용한 어업,
건조 생선보다 소금으로 가공 처리한 생선의 수출, 밧줄 제작, 가죽 가공, 수출용 유황의 채굴 들을 통해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시키려고 무진 애섰다.
덴마크 정부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아이슬란드 사람들까지 나서서 이런 변화를 촉구했지만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언제나 '관둬요!"였다.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느냐는 따져보지도 않았다.
내 아이슬란드 친구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의 환경적 취약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보수적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는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그들이 어떤 변화를 시도하더라도 상황을 개선시키기는 커녕 악화시키기 십상이라는 인식이
집단 무의식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초기의 정착자들은 그런대로 효과 있는 경제.사회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그 시슽템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가나해졋고, 때로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런 비극을 피하려고 새롭게 시도한 실험들도 언제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런 재앙들의 증거는 어디에나 있었다.
달 표면처럼 변해버린 고원지대, 버려진 농장들, 침식된 흔적이 뚜렷한 밭들.....
이런 역사적인 결험을 통해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 나라는 실험의 호사를 즐길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우리는 취약한 땅에 살고 있다.
우리식으로 살면 적어도 일부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에게 변하라고 강요하지 마라!" 라고 말했다.
870년 이후 지금까지 아이슬란드의 정치사는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
처음 수세기 동안 아이슬란드는 자치 지역이었다.
그런데 다섯개의 유력 가문을 이끌던 족장들이 치열한 전쟁을 벌엿고 ,
급기야 13세기 초반에는 수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밭이 불태워지는 파국에 이를렀다.
1262년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노르웨이 왕에게 통치권을 맡겼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왕은 그들에게 크게 위험하지 않고
그들에게 더 많은자유를 허락할 것이며,
가까이 있는 족장들처럼 그들의 땅을 혼돈에 몰아넣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스칸디나비아 왕가들끼리 결혼하면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왕관이 1397년 한 왕에게 씌워졌다.
그 왕은 가장 부유한 덴마크에 큰 곤심을 기울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는 별관심을 두지 않았다.
1874년 아이슬란드는 부분적인 자취구너을 획득했고,
1904년에는 완전한 자치권을 얻었으며, 1944년 덴마크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중세 말에 시작된 아이슬란드는 근해에서 잡히는 대구를 말려,
유럽본토에서 나날이 확대되어 가는 도시들에 수출함으로써 경제적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는 좋은 배를 건조하기에 적합한 큰 나무가 없엇기 때문에
노르웨이, 영국, 독일, 나중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배로 대구를 잡아 수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1900년대 초, 아이슬란드는마침내 자체의 선단을 갖기 시작했고, 어업을 산업적 규모로 확대시켰다.
1950년경에는 아이슬란드 총수출의 90퍼센트 이상이 수산물이었다.
과거의 주력 산업이던 농업을 압도한 셈이었다.
실제로 1923년 부터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수적으로 추월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이제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도시화된 나라이기도 하다.
수도인 베이캬비크에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살고 있는 실정이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농부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그들의 농가를 여름 별장으로 팔아넘긴 후
일자리와 코카콜라. 세계화된 문화를 찾아서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풍부한 어종, 지열 발전소, 모든 강에 세워진 수력 발전소 덕분에,
그리고 배를 건조하기 위해 나뭇조각들을 긁어모아야 하는 수고에서 벗어난 덕분에
얼마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제2장부터 제5장까지 살펴보았던 붕괴된 사회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쇄시켜주기에 충분한 성공담이 아닐 수없다.
아이슬란드 출신으로 195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할도르 락스네스(Halldor Laxness)는
소설 『살카 바카 Salka Valka』에서 여주인공의 입을 빌려
"역시 삶은 무엇보다 소금에 절인 대구이다"라고 말했다.
아이슬란드 사람이기에 가능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숲과 토양이 그렇듯이 소금에 절인 대구도 관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날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숲과 토양에 가해진 훼손을 회복시키고,
자신들의 어장을 훼손시키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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