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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Collapse)

2 과거 사회의 붕괴 / 제6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 빈랜드에서 실패한 까닭 1

작성자연곤|작성시간26.06.19|조회수30 목록 댓글 0

빈랜드에서 실패한 까닭

바이킹이 북대서양에 세운 식민지로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잠시 머물렀던 빈랜드는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이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요컨대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세우려 했던 최초의 땅이었던 까닭에 빈랜드는 낭만적 추측의 보고였고,

이 땅을 주제로 많은 책이 씌어졌다.

물론 우리가 빈랜드의 식민지 개쳑에서 끌어내려는  소중한  교훈은 실패의 원인이다.

 

북아메리카 국동 해안에 위치한 빈랜드는

노르에이에서 북대서양을 완전히 가로질러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바이킹의 배로도 곧장 가기에는 불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바이킹의 배들은 서쪽 끝의 식민지, 즉 그린란드를 중간 지점으로 삼아 북아메리카로 항해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바이킹의 항해 기준에 따르면 그린란드도 북아메리카에서 무척 먼 거리였다.

그린란드 정착지에서 뉴펀들랜드의 정착지까지 직선 거리로 거의 1,600킬로미터에 달했다.

하지만 항해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까닭에 바이킹은 안전을 이유로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따라서 실제 항해 거리는 3,200킬로미터가 넘었고, 항해 시간만도 6주가 걸렸다.

그린 란드에서 빈랜드까지 항해하고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더구나 날씨가 항해에 유리한 여름에 그런 항해를 했다면

바이킹이 빈랜드를 탐사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이킹들은 뉴펀들랜드에 베이스캠프를 세우고

겨울을 보내면서 시간적이 여유를 가지고 그 땅을 탐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984년 그린란드에 정착지를 세운 붉은 털 에리크의 두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가 빈랜드 탐험대를 조직했다.

빈랜드에 어떤 자원이 있고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지 살펴보기 위한 목적이었다.

북유럽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배에 가축까지 싣고 떠났다.

그 땅이 살기에 적합하다면 완전히 정착할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정착을 포기하고 돌아온 후에도 300년 동안  바이킹들은 북아메라카 해안지대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린란드에 항상 부족했던 목재를 가져왔고,  풍부한 나무로 숯를 만들어 철을 제련하기도 했다.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정착을 시도했다는 정보는 두 곳에서 얻을 수 있다.

하나는 문자로 씌어진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발굴이다.

문자 기록은 발견과 탐사를 위한 초기의 빈랜드 탐험을 설명한 두 전설로 이루어진다.

두 전설은  수세기 동안 구전으로 전해졌지만,  1200년대에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다.

전설의 내용을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두 전설을 가공된 이야기로 취급하며 바이킹들이 신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까지 의심했다.

하지만 바이킹들이 뉴펀들랜드에 세운 베이스캠프가 1961년 고고학자들을 통해 발견되면서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

따라서 빈랜드 전설ㅇ느 이제 북아메리카에 대해 기록된 최고(最古)의 문서로 인정된ㄷ.

그러나 그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그린란드 사람들의 전설(Greenlanders'Saga)』『붉은 털 에리크의 전설(Erik the Red's Saga)』이란 제목으로

전해지는 두 권의 책은 전반적인 맥락에서는 일치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많이 다르다.

두 책에 따르면, 10년 이라는 짧은시간 동안 그린란드에서 빈랜드까지 다섯 번의 항해가 있었고,

마지막 항해에만 두세 척의 배가 사용되었고, 너머지 네 번에서는 한 척의 배만이 항해했다.

 

빈랜드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렀던 곳에 노르웨이식으로

헬룰란드, 마크란드, 빈랜드, 레이푸수부디르, 스트라움피오르, 호프라고 이름을 붙였다.

학자들이 이 지역들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근거로 그곳들이 어디인지 찾아내려고 애썼다.

"이 땅 (마크란드)은 평평하고 숲이 우거졌으며 바다쪽으로 경사가 완만했다.

 하얀 모래로 뒤덮인 모래사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들은 이런 특징을 살려서 그 땅을 마크란드(숲의 땅)라 부르기로했다"

헬룰란드는 캐나다 북극권에 위치함 배핀 섬들의 동쪽 해안이었고,

마크란드는 배핀 섬 남쪽의 래브라도 해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배핀 섬과 래브라도는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를 가르는 좁은 데이비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그린란드에서 정서(正西)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육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서

뉴펀들랜드까지 직선으로 북대서양을 가로지르지는 않았다.

일단 데이비스 해협 너머의 배핀 섬을 1차 목표로 삼았고, 그곳에서 해안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설에서 전해지는 장소 이름들은

뉴펀들랜드, 세인트로렌스만,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이 모두를 뭉뚱그러 빌랜드라 불렀다)를 포함한

래브라도 남쪽 해안 지역과 뉴잉글래드의 해안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린란드에서도 가장 좋은 목초지가 있는 두 피오르드를 찾아내 정착했던 것으로 판단하건대

신세계에 도착한 바이킹들은 더 좋은 땅을 찾아서 광범위한 탐사를 전재했을 것이다.

 

신세계의 바이킹에 관련된 정보는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얻을 수 있다.

고고학자들의 대대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확인되고 발굴된 유적은 한 곳뿐이다.

뉴펀들랜드 북서 해안에 위치한 랑즈오메도(L'Anse aux Meadow)가 그곳이다.

방사성 탄소법으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그 유적은 1000년경에 세워졌다.

붉은 털 에리크의 자녀들이 빈랜드를 여행했다는 전설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984년에 그린란드에 정착한 에리크는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랑즈오메도 유적은 전설에서 레이프수부디르로 칭한 지역인 듯하다.

하여간 이곳에는 80면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세 채의 널찍한 집, 소철을 제련하고 선박용 철못을 만든 대장간,

목수의 작업실, 배를 수리한 곳등 여덟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러나 농가나 농기구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레이프스부디르는 겨울을 지내고 여름  탐사를 위해 편의상 세운 베이스캐프에 불과했다.

바이킹들이 원하던 자원들은 빈랜드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이 랑즈오메도 유적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발굴한 조그만 증거로 이런 사실이 확인되었다.

버터 호두로 알려진 야생 호두 두 알이었다!

버터 호두나무는 뉴펀들랜드에 없는 나무였다.

1000년경의 안팎으로 따뜻한 날씨가  수세기동안  계속되었지만

호두나무의 한계선은 뉴펀드랜드에서 남쪽에 위치한 세인트로랜스 강 아래쪽이었다.

그곳은 전설에서 말하는 야생포도가 자라는 한계 지역이기도 했다.

바이킹들이 그 지역에  '포도의 땅'을 뜻하는  빈랜드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도 야생포도 때문이라 여겨진다.

 

전설에서는  빈랜드를 그린란드에는 없는 소중한 자원이 풍부한 땅으로 묘사했다.

빈랜드의 이점은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였다.

게다가 그린란드보다 위도가 훨씬 낮아 여름이 길었다.

풀도 길고, 겨울에도 포근한 편이어서

노르웨이에서 가져온 가축들이 겨우내 밖에서 풀을 뜯을 수 있었다.

따라서 겨우내 가축을 먹일 건초를 마련하느라고 여름에 땀 흘릴 필요가 없었다.

좋은 나무가 많은 숲도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밖에도 그린란드의  연어보다 훨씬 탐스런 연어가 호수와 강에서 헤엄치고 있었고

뉴펀들랜드를 에워싸고 있는 바다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어장(漁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슴, 순록, 바닷새와 그 알 등 사냥감도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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