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명의 붕괴(Collapse)

2 과거 사회의 붕괴 / 제6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 빈랜드에서 실패한 까닭 2

작성자연곤|작성시간26.06.20|조회수21 목록 댓글 0

빈랜드를 탐사한 사람들은 목재, 포도, 모피 등을 가득 싣고 그린란드로 돌아갔지만 

그 여행길은 곧 중단되었고,  랑즈오메도 베이스캠프도 버려졌다.  그 유적의 고고학적 발굴로써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세계에 도착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기는 했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이 별다른 것을 남겨놓지 않아 발굴 작업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발견된 유물들은 버려지거나 부주의로 떨어뜨린 작은 물건들이 고작이었다.

예컨대 부러진 철못  99개 온전한 못 1개 .청동 바늘 1개, 숫돌 1개, 물레가락 1개, 유리알 1개, 뜨개바늘 1개 등이 전부였다.

물론 그들이 이곳을 허둥지둥 떠난 것은 아니었다.

연장과 소중한 물건을 모두 챙겨서 그린란드로 떠난 것으로 보아 치밀한 계획하에 그곳을 떠난 것이 확실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북서양에서 발견한 땅 중에 북아메리카는 가장 넓고 가장 풍요로운 땅이었다.

뉴펀들랜드라는  작은 부분만을 보고도 그들은 감격에 겨웠다.

그런데 왜 그들은 풍요의 땅인 빈랜드를 포기하고 떠난 것일까?

 

이런 의문은 전설에서 간단하게 풀린다.

"수적으로 우세한 인디언들이 적대적이어서, 바이킹들은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들이 9명의 인디언을 처음으로 만났고, 8몀을 죽였다.

하지만 한 사람이 살아서 도망첬다. 시작부터 좋지 않았던 셈이다.

당연히 인디언들이 작은 배를 타고 잔뜩 몰려와 바이킹들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그 싸움에서 에리크의  아들, 토르발이 죽었다.  토르발은 배에 맞은 화살을 뽑아내며

"이 땅은  우리가 찾아낸 풍요의 땅이다. 덕분에 배불리 지낼  수 있었는데,

우리가 자원으로 넘치는 땅을 찾아냈지만 마음껏 즐길 수가 없겠구나"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 빈랜드를 찾은 노르웨이 탐사대는 인디언들과 그럭저럭 교역을 시작할 수 잇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옷감과 우유를 인디언들에게 주었고,  인디언들은 그 대가로 모피를 주었다.

그러나 바이킹이 무기를 훔치려던 한 인디언을 죽이면서 이 관계도 끝나고 말았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많은 인디언이 죽었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람들이 앞으로 만성적으로 겪어야 할 두통거리가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붉은 털 에리크의 전설』에 따르면

"그때 바이킹들은그 땅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들보다 먼저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땅 즉 그린란드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이렇게 빈랜드를 인디언들에게 넘겨준  후,  그린란드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목재와 철을 구하기 위해서

약간 북쪽으로,  즉 래브라도 해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는 인디언들이 거의 없었다.

노르웨이인들이 이곳을 자주 방문했다는 증거는

캐나다 북극권 곳곳에서 산재한 고고학 발굴지에서 발견되는

제련한 구리조각, 재련한 철조각, 잡아 늘인 염소가죽 등과 같은 노르웨이 물건들이다.

특히 눈에 띄는 유물은 '조용한 왕' 울리프의 시대, 즉 1065년부터 1080년까지 노르웨이에서 주조된 은화이다.

팬던트로 사용했던지 구멍이 뚫린 이 은화는 래브란도에서 남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메인 주의 해안에 있던 인디언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메인 주의 유적은 교역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이곳에서 고고학자들은 래브라도의 돌과 연장 들뿐만 아니라

노바스코샤, 뉴잉글랜드, 뉴욕, 펜실베니아에서 만들어진 물건들까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은화는 래브라도를 찾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무심코 떨어뜨렸거나 물건값으로 지불한 것이었는데,

인디언의 교역망을 통해 메인 주까지 흘러들어간 것일 수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개브라도를 꾸준히 방문했다는 다른  증거는 아이슬란드의 1347년 연감에서 찾을 수 있다.

18명이 탄 그린란드으의 배가 '마크란드'로 귀환하던 중에

닻을 상실해 항로에서 벗어나 아이슬란드까지 표류해왔다는 기록이다.

설명이 따로 필요없다는 듯이 아주 간단하고 사무적인 기록이다.

아이슬란드 역사를 기록하던 사가(史家)가 

"올해의 소식은 매년 여름이면  마크란드를 찾아가는 그런 배들 중 하나가 닻을 잃어버렸고, 

토룬 케틸스도티르가 자신의 다유파달루르 농장에서 큰 우유병을 쏟았으며,

비야르니 블라손의 양 한 마리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해의 소식 전부이다.

한마디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 라고 시큰둥하게 써내려간 듯하다.

 

빈랜드에서의 정착이 실패한 이유는 그린란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린란드에는 나무와 철이 너무나 부족했다.

게다가 그린란드는 유럽과 빈랜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바다를 항해할 만한 배가 많지 않았다. 

대규모 탐사대를 파견할 만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앗다.

따라서 노바스코샤의 유목민이나, 세인트로렌스 많은 인디언들이 빈랜드를 공격하면

그린란드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1000년경 그린란드 식민지 인구는 500명 남짓했다.

따라서 그린란드에서 가용한 인력을 총동원해도  랑즈오메도에 파견할 수 있는 성인은 8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식민지 개척사를 보면,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1500면경 이후 북아메리카에  다시 돌아왔을 때도 오랜 시련을 겪었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나라들에서 지원받은  개척자들,

중세 바이킹의 배보다 훨씬 큰 배들로 짜여진 함대에서 먹을 것을 정기적으로 공급받고

심지어 총과 철제 연장으로 무장한 개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매사춧츠, 버지니아, 캐나다에 식민지를 처음으로 개척하고 정착한 사람들 중 절반 가량이

첫 해에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죽었다.

따라서 500명에 불과했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노르웨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 정착한 그린란드 사람들이

북아메리카를 정복해서 정착히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이 빈랜드에서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한 주된 원인은 

그린란드 식민지를 450년 후에  버려야 했던 실패의 원인을 시간적으로 축약해 놓은 것일 수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린란드에서 더 오랫동안 버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린란드가 지리적으로 노르웨이에서 더 가까웠고, 적대적인 원주민들이

처음 몇 세기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소외되었고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린란드와 빈랜드는 똑같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없었다면 그린란드 사람들은 생태적인 문제를 그러저럭 이겨내고,

빈랜드의  정착자들도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빈랜드에서는 인구가 폭박적으로 증가했을 것이고,

1000년경 이후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북아메리카로 물밀 듯이 이주했을 것이다.

그러면 20세기 미국인으로서 나는 이 책을 영어가 아니라 현대 아이슬란드어나 페로어처럼

고대 노르웨이어에서 파생된 언어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293 - 297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