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대서양에서의 실험
내 세대의 영화광들은 '바이킹(Viking)'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커크 더글러스를 떠올린다.
그는 1958년 상영된 영화 「바이킹,The Vikings」에서
못이 박힌 가죽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한 야만인들을 이끌고
습격과 약탈, 살해를 자행하는 원정에 나선 족장의 역할을 실감나게 연기한 명배우였다.
대학 시절 여자 친구와 그 영화를 본 지 거의 반세기가 흘렀지만
바이킹의 전사들이 성문을 공격하는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자
바이킹은 마침내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사람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며 층청대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다.
커크 더글러스는 아름다운 자넷 리를 포로로 붙잡았다.
자넷 리는 커크 더글러스에게 저항해보지만 그의기분을 북돋워줄 뿐이었다.
이런 유혈극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실제로 바이킹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언어, 즉 고대 노르웨이어에서도 'Vikingar'는 '침략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바이킹의 이야기는 낭만적인 면을 띠고, 이 책의 주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바이킹은 난폭한 해적이기도 했지만 농부이기도 했다.
또한 상인이었고 식민지 개척자였으며, 북대서양을 처음으로 탐험한 유럽인기기도 했다
그들이 건설한 정착지들은 매우 다른 운명들을 맞았다.
유럽대륙과 영국에 정착한 바이킹은 토착민들과 융화되어
러시아, 잉글랜드, 프랑스등 국민국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정착하려 했던 땅인 빈랜드는 곧 포기되었다.
한편 그린란드 식민지는 450년 동안 유럽 사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거류지였지만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슬란드 식민지는 오랜 가난과 정치적 역경을 딛고 일어나
최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회중 하나가 되었다,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는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바이킹이 세운 이 식민지들은 모두 같은 뿌리의 사람들이 살았던 사회였다.
그런데도 운명이 달랐던 이유는 각 지역의 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태평양에서 폴리네시아인의 동진(東進)과 마찬가지로
북대서양 너머로 바이킹의 서진(西進)은 자연과의 실험이란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준다(지도참조)
이 거대한 실험에서 그린란드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바이킹은 그린란드에서 다른 종족, 즉 이우이트족을 만났다.
그린란드의 환경 문제데 대처하는 법에서 이누이트는 바이킹과 사뭇 달랐다.
이 작은 실험이 5세기 후에 끝났을 때 그린란드에서 바이킹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누이트족은 건재했다.
따라서 노르웨이령 그린란드릐 비극은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인간 사회의 붕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연환경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로 인한 그린란드의 붕괴와 아이슬란드에서의 악전고투는
이스터섬, 망가레바, 아나사지, 마야 등의 붕괴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그린란드의 붕괴와 아이슬란드에서의 고난을 추적하는 데는 상당히 유리한 편이다.
그린란드의 역사, 특히 아이슬란드릐 역사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나 그들의 교역 상대들이 문서로 남긴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하지만 글로 씌어진 기록이 거의 없는
다른 과거 사회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아나사지 사회는 소멸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은 이스터 섬 사람들의 사회는
외부인들 때문에 완전히 변해버렷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인은 그곳에 처음 정착한 바이킹 남자들과 켈트족 여자들의 후예들이다.
특히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령 그린란드는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근대 유럽 기독교 사회로 진화되어간 사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의 잔해, 보존된 예술, 고고학적 탐사로 발굴된 연장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어럽지 않게 이해할 수 잇다.
하지만 다른 사회들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을 추측에 의존해야 한다.
예컨대 1300년 경 그린란드 발세이에 세워졌던 잘 보존된석조건물의 서쪽 벽에 위치한 광장에 섰을 때는
나는 다른 곳의 교회와 비교해서 이건물도 교회였고,
특이하기는 하지만 노르웨이 에이드피오르에 있는 교회를 거의 그대로 무방한 것이며,
서쪽 벽의 광장이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주 출입구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사진 15)
「」
하지만 이스터서의 석상이 갖는 의미는 이처럼 상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스터 섬, 망가레바의 이웃섬들, 아나사지, 마야의 운명보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서 겪은 바이킹의 운명은
훨씬 복잡하지만 그만큼 많은 교훈이 담겨 있다.
게다가 내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요인 모두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
바이킹은 환경을 훼손했고 기후 변화로 곤욕을 치렀으며,
그들의 대응법과 문화적 가치관이 그 결과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런 세 가지 요인 중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이스터 섬과 망가레바의 이웃 섬들에서도 작용했고,
아나사지와 마야에서는 세 가지 요인 모두가 작용했다.
반면에 우호적인 이웃과의 교역은 망가레바의 이웃 섬들,
아나사지 그리고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스터 섬과 마야의 역사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악의적 이웃의 간섭(이누이트족)은 노르웨이령 그린란드의 붕괴에서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스터 섬의 운명은 두가지 주제로, 망가레바 이웃 섬들의 운명을 세 가지 주제로
J.S.바흐가 작곡한 푸가에 비유한다면, 아이슬란드의 고난은
바흐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걸작으로 창작하려 한 미완성 작품「푸가의 기법」에 비교된다.
한편 그린란드의 붕괴는 바흐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완전한 4박자 푸가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바이킹이 세운 사회들은 3 장(章)에 걸쳐 아주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달리 말하면 왕뱀에게 둘둘 말린 두 마리의 양 중 두 번째 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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