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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Collapse)

2 과거 사회의 붕괴 / 제6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 자기촉매

작성자연곤|작성시간26.06.08|조회수12 목록 댓글 0

자기촉매(自己觸媒)       

이런 역사에 비춰볼때,

바이킹이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전쟁을 벌이거나 

그린란드처럼 가혹한 환경의 땅에서 살았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천 년을 살앗던 스칸디나비아 땅을 떠나서 793년 이후에 해외로 내달린 이유는 무엇이고, 

그로부터 3세기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중단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 역사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더라도 그 이유가

내부의 '척력(斥力),인구 압력과 기회의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의 '인력(引力.무한한 기회와 빈 땅)이었는지, 

아니면 둘 모두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역사에서 영토 확장에는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해왔다.

바이킹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구증가와 왕권강화로 그들은 고향에서 내몰렸다.

아무도 살지 않는 새로운 땅과, 사람이 살지만 방어가 허술한 풍요로운 땅이 그들을 밖에서 유혹했다.

1800년대와 1900녀대 초,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로 밀물처럼 건너간 이유도 척력과 인력의 합착품이었다.

인구 증가, 긂주릶, 정치적 압박 때문에 유럽인들은 고향을 떠났다.

반면에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땅과 경제적 기회가 그들을 미국과 캐나다로 유혹했다.

 

인력과 척력의 합이 793년 이후에 갑자기 높아지고,

1066년 안팎에 갑자기 수그러든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바이킹의 영토 확장은 '자기촉매 과정(autocatalytic process)'의 좋은 예이다.

화학에서 '촉매작용'은 효소와 같은 첨가물로 화학 반응의 속도를 촉진시킨다는 뜻이다.

어떤 화학 반응은 촉매제로 작용하는 생성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따라서 화학 반응의 속도는 제로에서 시작하지만, 어떤 생성물이 만들어지면서 화학 반응을 촉진시키고

그 반응을 더 빠르게 활성화시키는 생성물들이 더 빨리 만들어질 때 급속히 빨라진다.

이런 연쇄 반응을 '자기촉매'라 일컫는다.

임계 질량의 우라눔에 있는 중성자가 우라늄핵을 분열시켜 더 많은 중성자를 방출하고, 

이런 중성자가 다시 우라늄핵을 분열시키는 원리를 이용한 원자폭탄의 폭발이

자기촉매의 전형적인 예이다.

 

영토 확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테크놀로지적 이점 등, 최초의 장점을 바탕으로

인간은 새로운 이득을 얻거나 새로운 땅을 발견한다.

이런 사례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이득이나 새로운 땅을 찾아나서고, 

그 결과로 얻은 이득과 땅에 다시 더 많은 사람이 신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자기촉매적 확장력이 힘을 잃고 고갈될 때까지,

요컨대 획득한 이점으로 그들에게 가능한 모든 땅을 차지할 때가지 이런 연쇄 반응은 계속된다.

바이킹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 촉매는 두 가지 특별한 사건이었다.

하나는 793년에 있었던 린디스판 수도원의 습격이었다.

이 습격으로 바이킹은 상당한 전리품을 얻었고,

이런 전리품에 고무되어 바이킹은 다음 해에는 더 많은 전리품을 노리며 습격을 감행했다

다른 하나는 양을 키우는 데 적합한 무인도 페로 제도의 발견이었다.

페로제도의 발견은 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더 큰 아이슬란드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아이슬란드의 발견은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고 훨씬 더 큰 그린란드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전리품을 안고, 새로운 섬을 발경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바이킹들은

고향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따라서 더 많은 바이킹들이 더 많은 전리품을 노리고 더 많은 무인도를 찾아서 고향을 떠났다.

바이킹만이 자기촉매적 영토 확장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기우너전 1200년경부터 태평양에서 동진으 ㄹ거듭했던 폴리네시아인들이 있었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1400년대, 특히 콜럼버스가

1492넨에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폴리네시아의 화강,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확장과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영토 확장도 그들의 배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지역을 약탈하거나 식민지화시켰을 때

물에 젖은 화약처럼 꺼지기 시작했다.

고향에 돌아온 바이킹들이 무인도를 발견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지 못하면서, 

쉽게 침략할 수 있는 땅은 이제 남지 않았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면서

바이킹의 확장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두 가지 특별한 사건이 바이킹의 연쇕반을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바이킹의 야심을 짓누를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있엇다.

하나는 1066년의 스탐퍼드 브리지 전투였다.

바이킹의 연속되는  패배에 결정타를 먹인 전투인 동시에

습격은 이제 무모한 짓이란 깨달음을 안겨준 전투였다.

다른 하나는 1000년경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지 빈랜드를 10년 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햇던 사건이었다.

빈랜드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노르웨이의 두 전설에 따르면, 

빈랜드는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다툼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는 싸움이었다. 배로 대서양을 건너야 햇던 바이킹의 수에 비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에는 이미 정착자들로 가득했고,

빈랜드는 너무나 위험한 땅이었으며,

대서양에는 사람이 살만한 무인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북대서양의 폭풍우와 목숨을 걸고 싸워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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