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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Collapse)

2 과거 사회의 붕괴 / 제6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 바이킹의 종교

작성자연곤|작성시간26.06.12|조회수18 목록 댓글 0

바이킹의 종교

800년경 바깥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바이킹은 ㅋ르만 종교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였다.

풍요의 신 프레이르(Freyr), 하늘의 신 토르(Thor), 전쟁으 신 오딘(Odin)들이 있었다.

바이킹들에게 공격당한 유럽 사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이킹들이 비기독교인이어서 기독교 사회의 금기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당과 수도원을 공격하면서 가학적 쾌감을 즐기는 듯했다.

843년 바이킹 함대가 프랑스의 루아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약탈을 계속했다

그때 그들은 강 하구에 위치함 낭트의 성당을 점령해서 주교를 비롯해 모든 성직자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바이킹이 교회를 약탈함녀서 특별히 가학적 쾌감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일반 시민은 약탈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방어 능력이 떨어지는 성당과 수도원은 쉽게 노략질을 할 수 있는 곳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바이킹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유한 무역 거점들을 마다하지 않고 공격했다.

 

바깥 세계, 즉 기도교의 땅에 정착한 후 바이킹들은 토착민들과 결혼하면서 지역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기독교까지 포용했다.

바깥세계로 진출해서 개종한 바이킹들이 기독교를 스칸디나비아에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이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기독교라는 새러운 종교에 대한 정보를 고향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족장들과 왕들도 기독교가 그들에게 안겨줄 정치적인 이득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왕들보다 먼저 기독교를 비공식으로 받아들인 족장들까지 있었다

기독교가 스칸디나비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덴마크의 푸른 이빨 왕 하랄 1세(Harald Blatand)의 공식적인 개종이었다.

노르웨이는 995년에 공식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고, 

스웨덴은 다음 세기에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노르웨이가 개종하기 시작하자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로 이주한 바이킹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에게는 배가 거의 없어 노르웨이 배를 이용해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르웨이가 기독교로 개종한 마당에 기독교를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노르웨이 왕 울라크 1세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교도인 아이슬란드와의 교역을 중단시켰고,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아이슬란드인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아이슬란드 지도자의 혈육까지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이슬란드가 이교도적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포로로 잡은 인질들의 사지를 절단하거나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이이슬란드의 국민의회는 999년 여름의 모임에서

대세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을 공식적으로 국교로 인정했다.

같은 해, 그린란드 식민지를 개척한 붉은 털 에리크의 아들 레이브 에릭손(Leiv Eriksson)도

그린란드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1000년 이후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세워진 기독교 교회들은

요즘 교회처럼 자체의 땅이나 건물을 가진 독립된 단위가 아니었다.

지역 유지나 족장이 짓고 소유한 교회였다.

교회가 십일조의 명목으로 지역주민들에게 거둔 세금을 나누어 갖는 권리가

지역 유지나 족장, 즉 교회 주인에게 있었다. 달리 말하면

족장이 맥도널드 햄버거 본사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협상해서

지역 판매 독점권을 얻어 교회를 세우고,  맥도널드의 기준에 따라 물건을 공급받아

이익의 일부를 자기몫으로 챙기고 나머지를 본사에 보내는 식이었다.

물론 이경우에는 니다로스(지금의 트로헤임)의 주교를 통해 로마의 교황에게 보냈다.

따라서 교황청은 교회를 지역 유지, 즉 주인에게서 독립시키려 애썼다.

1297년 마침내 교황청은  아이슬란드의 교회주인들을 욱발질러

교회터의 소유권을 주교에게 양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린란드에서도 이런 변화가 있었는지 확증할 만한 증거는없지만

1261년 그린란드가 명목상으로라도 노르웨이법을 받아들이기를 결정하면서

그린란드 교회 주인들도 무언의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1341년 베르겐의 주교는 그린란드에 이바르 바르다르손(Ivar Bardarson)이란 감독관을 보냈고,

그 감독관은 그린란드교회들을 기록한 자세한 목록을 안고 돌아왔다.

이런 기록에서 우리는 주교가 아이슬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린란드의 '프랜차이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바이킹의 해외 식민지들은 커다란 문화적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기독ㄱ는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를 자처하며 배터성을 가졌기 때문에 

기독교로의 개종은 이교도적 전통의 포기를 뜻했다.

예술과 건축이 기독교적으로 변했다. 당연히 유럽 대륙을 모델로 삼았다.

식민지의 바이킹들은 큰 교회를 세웟다.

인구가 훨씬 많은 스칸디나비아 본토의 대성당 못지 않은 대성당까지 세웠다.

따라서 식민지 인구에 비할 때 성당의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그래도 식민지 정착자들은 기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지 십일조를 로마 교황청에 꼬박꼬박 바쳤다.

그린란드 주교가 1282년 교황에게

십자군 십일조(현찰이 아니라 해마의 엄니와 북극곰의 털가죽으로)를 보냈다는 기록, 

그린란드에서 6년간 십일조를 받있다고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1327년의 기록이 있다.

한편 교황청은 그린란드에 유럽의 최근 문물을 전해주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린란드 교회에 임명된 모든 주교가 그린란드 사람이 아니라 스탄디나비아 본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정착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자아관이었다.

이런 결과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에게서 확인된다.

1788년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아시아 사람이아 태명양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외에 사는 영국인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1915년

그들의 국익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 뿐만아이라  아득히 멀리 떨어진 겔리볼루까지 기꺼이 달려가

영국을 도와 터키군과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북대서양 섬들에 정착한 바이킹들도

자신들을 유럽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며 교회 건축, 장례 관습, 측량 단위 등에서

본토의 변화를 그대로 따랐다.

이런 정체성의 공유 덕분에 수천명의 그린란드 사람들은 서로 힘을 합해 역경을 견디었고, 

4세기 동안이나 가혹한 환경에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체성의 공유는 악영향도 미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누이트에게 배우기를 거부했고,

더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었을 방향으로 정체성을 변회시켜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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