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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Collapse)

2 과거 사회의 붕괴 / 제6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 오크니 제도, 셰틀린드 제도, 페로 제도(1)

작성자연곤|작성시간26.06.13|조회수11 목록 댓글 0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

바이킹이 북대서양 섬ㅇ 세운 여섯 개의 식민지는 같은사람이 시도한 여섯 가지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의 첫 부분에서 말했듯이 실험들은 각각 다른 결과를 낳았다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의 식민지는 생존의 위협을 별로 받지 않고 1,000년 이상을 존속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식민지도 존속하고는 있지만 가난과 정치적 혼란을 이겨내야 했다.

그린란드에 세운 식민지는 450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빈랜드 식민지는 10년 만에 버려졋다.

이렇게 다른 결과들은 식민지들의 환경 차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처럼 다른 결과를 낳은 환경의 네 가지 중요변수는 

(1) 노르웨이와 영국을 기점으로 한 거리나 항해 횟수,  (2) 원주민의 저항 , 

(3) 위도와 기후에 영향을 크게 받는 농업의 적합성, 

(4) 환경적 취약성, 특히 토양 침식과 삼림 파괴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실험 결과는  여섯 개뿐인데, 그 결과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변수는 네 개나 된다.

따라서 9가지 변수에 81개의 결과(즉 섬)를 가졌던 태평양의 경우에 비춰보면

바이킹의 문제를 올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는 하다.

어떤 통계학적 상관분석이 성공할 가능성을 가지려면

검증되어야 할 변수보다 실험 결과가 더 많아야 한다.

따라서 실험 결과인 섬들이 많은 태평양의 경우에는

통계적 분석만으로 각 변수의 상대적 중요성을 충분히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대서양에는 실험 결과로 사을 만한 섬들이 많지 않다.

따라서 이 정도의 정보만 주어질 때 웬만한 통계학자라면 바이킹의 문제는 설명할 수 없다고 결론 지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문제에 비교 방법론을 적용하려는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부딪치는 딜레마이다.

즉 가능한 독립변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 실질적인 결과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여서, 

그 변수들의 중요성을 통계적으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딜레마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최초의 환경 조건과 최종 결과 이외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최초의 조건과 최종 결과를 이어주는 단계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바이킹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항해 횟수와 뱃짐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항해의 중요성을 검증할 수 있다.

또한 바이킹과 지역민 간의 충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원주민의 저항이 낳은 결과를 분석하고,

실제로 재배된 작물과 사육된 가축에 관련한 기록을 바탕으로 농업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 있다.

삼림 파괴와 토양 침식의 징후들(화분과 화석화된 식물),

혹은 목재를 비롯한 건축 자재를 확인해서 환경적 취약성을 검증할 수 있다.

이런 중간 단계들과 결과에 대한 정보를 근거로 북대서양의 여섯 개 식민지 중 다섯 개 사회를 차례로 살펴보자, 

거리와 부의 크기를 기준으로 해서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 빈랜드이 순서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린란드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음 두 장(章)을 할애해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오크니 제도는  영국의 북쪽 끝에서 약간 떨어진 군도(群島)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해군의 주요 기지로 사용된 광활한 정박지 스캐퍼플로를 둘러싸고 있다.

스코틀랜드 본토의 북단인 존오그로츠에서 가장 가까운 섬까지의 거리는 18킬로미터에 불과하고, 

오크니 제도에서 노르웨이까지도 바이킹의 배로는 하루 거리이다.

따라서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오크니 제도를 침략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물론 오크니 제도가 필요한 것을 노르웨이나 영국에서 수입하고, 그들의 특산품으 수출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오크니 제도는 육지에서 분리된 섬이다.

달리 말하면 원리 영국 본토의 일부였는데 1만 4,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육지에서 분리된 것이었다.  어쨋든 육지와 연결되었을 때

엘크(영국 붉은사슴), 수달, 토기 등 많은 포유돌물이 이 섬들로 건너와 훌륭한 사냥감이 되었다.

바이킹은 픽트인으로 알려진 원주민을 순식간에 굴복시켰다.

 

빈랜드를 제외할 때

북대서양 식민들 중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하고 멕시코 만류의 영향권에 있어,

오크니 제도의 기후는 포근한 편이다.

비옥한 토양이 빙하 작용으로 되살아났고,  침식의 위험도 심하지 않다.

따라서 오크니 제도에서는 바이킹이 도래하기 전부터 픽트족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바이킹의 식민지가 된 후에도 농업은 계속 유지되었고 오늘날 까지도 높은 생산성을 자랑한다.

요즘 들어 오크니 제도는 쇠고기와 달걀, 돼지고기와 치즈, 그리고 몇몇 곡물을 수출하고 있다.

 

바이킹은 800년경에 오크니 제도를 정복해서 영국과 아일랜드 본토를 침략하는 전초 기지로 삼았다.

그 후 강력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했고,  한동안 노르웨이 왕국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오크니 제도의 바이킹이 부자였다는 증거는 9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7.8킬로글램의 은괴이다.

북대서양의 다른 섬들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은괴로, 

스칸디나비아 본토에서 발견된 가장 큰 은괴와 같은 크기이다.

다른 증거로는 영국의 더럼 대성당을 본떠 12세기에 세운 성 망누스 대성당이 있다.

1472년에 오크니 제도의 소유권을 노르웨이(당시 덴마크의 속국)에서 스코틀랜드로 양도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가 덴마크 공주를 신부로 맞아들이면서 약속받은 지참금을 덴마크 왕실이 지불하지 못하자,

제임스가 오크니 제도를 지참금 명목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스콜틀랜드 지배하에서도 오크니 섬 사람들은 1700년대까지 노르웨이 방언을 계속 사용했다.

원주민이던 픽트인과 노르웨이인의 후손들은 농부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 

북해 원유의 종점 역할로 적잖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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