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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Collapse)

2 과거 사회의 붕괴 / 제6장 바이킹의 영토확장 /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페로 제도(2)

작성자연곤|작성시간26.06.14|조회수14 목록 댓글 0

오크니 제도에 관련된 이야기 중 일부는 셰틀랜드 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셰틀랜드 제도도 원래 픽트인의 땅이었지만 9세기에 바이킹에게 정복당했고,

1472년에 스코틀랜드로 양도되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노르웨이어가 사용되었으며,  최근에는 북해 원유 덕분에 적잖은 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들도 있다 .   북쪽으로 오크니 제도에서는 80킬로미터, 스코틀랜드에서는 21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바람이 더 많으며, 토양이 상대적으로 척박해서 농업 새산성이 떨어진다.

오크니 제도와 마찬가지로 셰틀랜드에서도 털을 얻기 위한 양의 방목이 경제의 한 축이지만

셰틀랜드에서는 젖소 사육이 쉽지 않아 어업에 주력했다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 다음으로는 페로 제도가 있었다.

오크니 제도에서는 북쪽으로 320킬로미터, 노르웨이에서는 서쪽으로 6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따라서 바이킹은 정착자들과 교역할 물건을 싣고 페로 제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초기의 원시적인 배로는 넘기 힘든 거리였다.

따라서 바이킹이 페로 제도에 처음 상륙했을 때 무인도에 불과했지만

몇몇 아일랜드 은둔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해줄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북극권에서 남쪽으로 480킬로미터 떨어지고,

노르웨이 서해안에 있는 두 대도시(베르겐과 토론헤임)의 중간선상에 위치한 페로 제도는 포근한 해양성 기후이다.

그러나 오크니 제도나 셰틀랜드 제도보다 지리적으로 북쪽에 있어, 농사를 짓고 방목할 수 있는 기간이 짧다

또한 작은 섬들이고,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바다의 염기가 온 섬들을 뒤덮기때문에 숲이 발달하지못했다.

또한 토종 나무들은 작은 버드나무, 자작나무, 사시나무, 노간주나무처럼 크지 않은 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런 나무들마저 정착자들이 베어냈고, 양들이 새싹을 뜯어 먹은 탓에 숲의 재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건조한 기후였다면 토양 침식까지 더해졌겠지만  다행히도 페로 제도는 안개가  많이 끼는 습한 기후였다.

게다가 연 평균 280일 비가 내리고, 하루에도 몇 번식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이 많다.

바이킹 정착자들도 건물에 테라스를 달고 담을 세워서 토양 침식을 방지하려 애썼다.

그린란드, 특히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토양 침식을 성공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그들이 페로 제도의 사람들보다 신중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이슬란드의 토양과 그린란드의 기후가 침식에 더 취약했기 때문이다.

 

바이킹들은 9세기에 페로 제도에 정착했다

그들은 보리를 어렵사리 재배할 수 있었지만  그밖에 재배할 수 있는 곡물은 거의 없었다.

요즘도 페로 제도에서는 땅의 6퍼센트에서만 감자를 비롯한 몇몇 작물이 재배되고 있을 뿐이다.

노르웨이에서 소중하게 생각한 젖소와 돼지, 심지어 비천한 가축이라 여겼던 염소의 사육마저

이곳에서는 정착한 지 200년이 지나지 않아 포기되었다.

지나친 방목으로 인한 토양 침식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대신 페로 제도의 경제는 양을 방목해서 양모를 수출하는 데 주력했고, 

나중에는 소금에 절인 대구를 수출품에 추가했다.

요즘에는 말린 대구와 넙치, 양식한 연어까지 수줄하고 있다.

양모와 생선을 수출한 대가로 페로 제도 사람들은

노르웨이와 영국에서 막대한 양의 목재, 연장을 만들기 위한 철,

그리고 도기를 대체할 만한 부엌 용품을 만들 활석이나 숫돌 등과 같은 돌과 광물을 수입했다.

모두가 페로 제도의 환경에는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페로제도에는

부목(浮木)으로 나 사용할 수 있을 뿐 건축용으로 사용할 만한 나무가 지역적으로 부족했다.

 

정착 이후 페로 제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섬사람들은 1000년경 즉 북대서양의 다른 식민지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 후 고딕 양식의 성당까지 세웠다.

페로 제도는 11세기에 노르웨이의 속국이 되었엇지만,

노르웨이가 덴마크에 정복당한 1380년에는 덴마크에 양도되었다.

그러나 1948년 덴마크령을 인정하는 조건에서 자치권을 획득했다.

현재 4만 7000,명의 주민이 페로어를 사용하면 살고 있다.

페로어는 고대 노르웨이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 아이슬란드어와 무척 유사하다.

따라서 페로 제도 사람들과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고대 노르웨이어로 쓴 책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페로 제도에는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서 겪은 문제가 없었다.

아이슬란드처럼 침식성 토양과 활화산이 없었고,

그린란드처럼 경작 가능 기간이 지나치게 짧지 않았고 기후가 건조하지도 않았다.

또한 항해 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멀었고 적대적인 원주민도 없었다

물론 옼니 제도나 셰틀랜드 제도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특히 오크니 제도에 비해서 천연자원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페로 제도의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수입하면서 큰 어러움 없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필요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수입하기에는 그린란드가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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