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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시 감상

토막말/정양

작성자박수호|작성시간26.06.16|조회수16 목록 댓글 0

토막말/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싶어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 읽기>  토막말/정양

 

시간이라는 밀물

 

여름바다도 아니고 가을 바다에 혼자 온 남자, 아무도 없는 바닷가 모래밭에 한 남자가 정순아보고자퍼서죽겠다를 쓴다. 바위에 새기면 오래 가기나 하지(물론 썩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밀물이 오면 다 사라질 말을 굳이 쓴다.

 

보고 싶어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랑을 하는 중에는 달콤한 고백의 말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해보다 부담 없이 쓰이는 말 같기도 하다. 연인뿐 아니라 친구와 가족에게도 충분히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사람에게 보고 싶다만큼 처절한 말도 없다. 반면 무색한 말이기도 하다.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하자면 이 시에 등장하는 토막말은 가장 무용한 말을 가장 허무한 방식으로 한 것이다. 그것도 욕까지 섞어서.

 

그런데 이 무용함과 허무함이 대책도 없이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그런 글을 쓴 사람의 깨끗한 무능력때문이다. 이별을 겪은 사람은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페인이 된 그 사람은 뭇사람들의 동정과 걱정을 받는다. 그 사람은 유능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 달리 말하면 무소유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 사람에겐 희망이 있다. 다 비워냈으니 새로 채울 수 있다. 차마 떨치지 못한 절절한 그리움의 토막말은 시간이라는 밀물이 쓸어가 줄 것이다.

―김경민『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포르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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