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안의 음악/강정
눈비 섞여 눅눅한 방
보일러 꺼진 냉골에 앉아
창가에 번지는 당신의 얼굴을 더듬습니다
이 순간 나는
전 생애를 걸고 최대한 궁상맞습니다
누군가 내 몸에 정확시 칼을 던졌는데
그저 공기만을 싸늘히 가르고
피 한 방울 없이 내 몸을 통과한다고 해도
더는 놀랄 게 없습니다
우둑우둑 소리만 찬연한 늑골을 쓰다듬으며
이상하게도 성한 몸을
성하지 않은 생각들이 흠뻑 적실 뿐입니다
몸을 움직이면 관절들이 헛돌아
그들이 하는 말을 새삼 은은한 음악인 양 곱씹으며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빠져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때늦은 기별을 듣습니다
그들의 세상 속에도 여전히 나는 살아 있겠지만
내 몸을 떼어낸 내 마지막 눈물이라고 기억할 당신은
당최 살아는 계신 건가요?
가을이 지나고 나니 온통 푸잉 든 세상
짓밟힌 낙엽들 틈에서 바스락거리는 음악 소리에
핏방울 몇 점 낡은 전류처럼 찌릿찌릿 흐를 뿐입니다.
얼쑤얼쑤 병들었네 혼자 지분대로 까불면서
<시 읽기> 몸 안의 음악/강정
최선을 다했으나 괜찮다
어릴 적, 나는 자주 넘어져서 무릎이 늘 까져 있었다. 긁히고 피가 나면 상처를 소독한다. 딱지가 생긴다. 그냥 두면 딱지는 떨어지고 상처는 아물 것이다. 그런데도 절대 그때까지 가만히 있질 못했다. 딱지가 생기면 어떻게든 거기를 살살 벗겨서 기어이 딱지 밑의 생살을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게 상처를 더디 낫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딱지를 억지로 떼고 나서 큼큼, 상처의 냄새를 맡으면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결코 좋은 냄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피하고 싶지 않은, 오히려 찾아서 맡고 싶은 냄새, 아픈데 아프지만은 않은, 오히려 찾아서 맡고 싶은 냄새, 아픈데 아프지만은 느낌. 모종의 희열이 섞인 고통. 그때의 나는 사디스트였나 마조히스트였나. 아픔을 주며 쾌락을 느끼는 나와 아픔은 찾아 상처랑 노는 나는 분명한 몸이었다.
스무 살 무렵, 처음으로 실연이라는 것을 하고는 한동안 전 생애를 걸고 최대한 궁상맞은 상태가 되었다. 그런 말을 며칠 보내고 나니 문득 지금의 내 모습이 딱지를 억지로 떼고 상처의 냄새를 맡았던 어릴 적 모습과 비슷하다는 의심이 들었다. “보일러 꺼진 냉골에 앉아/창가에 번지는 당신의 얼굴을 더듬”는 행위는 그리움 못지않게 다분히 자기도취적이다. 심지어 온몸의 관절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은은한 음악인 양 곱씹”는 행위에는 예술 작품에 탐닉하는 느낌마저 있다.
이별은 분명 칼날이 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을 주는 사건이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데도 도대체 왜 몸은 성한 것이냐. 마땅히 성하지 않은 생각들로라도 적셔줘야 견딜 만하다. 그러니 “얼쑤얼쑤 병들었네”라는 외침이야말로 최대한 궁상을 떠는, 궁상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덕분에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이의 정확한 심리상태다.(이런 말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내가 해봐서 안다.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