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후일/김소월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시 읽기> 먼 후일/김소월
잊는다는 것 그리고 잊혀진다는 것
<잊혀지는 것>이라는 제목의 김광석 노래가 있다(원래는 동물원 1집에 실린 노래였지만 김광석이 리메이크해 더 유명해졌다.)
우 그리움으로 잊혀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속에 사라져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가지
사실 ‘잊혀지는’은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이다. 이는 이중 피동 표현으로 ‘잊히는’으로 고쳐야 맞다. 그렇지만 ‘잊히는’보다 ‘잊혀지는’이 이 노래 전반에 흐르는 쓸쓸한 분위기와 더 맞는다. 그러기에 여기서도 ‘잊혀지는’을 고수하기로 한다.
보편적으로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도 나에겐 확연히 다르게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 웃는 것과 웃음을 짓는 것, 잊는 것과 잊혀지는 것 등등, 앞선 두 항목에 대해선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잊는 것과 잊혀지는 것에 대해서만,
둘 다 어떤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진다는 의미이지만, 잊는 건 뭐랄까. 처절한 느낌이 든다. 잊지 못하는 걸 잊어야 할 때의 고통이 연상된다. 반면 ‘잊혀지는’에는 그런 처절함이 없다. 저철함 대신 그것을 온통 채우는 건 어떤 쓸쓸함. 이 쓸쓸함의 바탕에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 대한, 여우언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그리고 시간의 무시무시한 힘에 대한 서글픈 인식이 깔려있다. 그러기에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면서도 매우 어른스러운 감정이 이 쓸쓸함이다. “그리움으로 잊혀지지 않던 모습”도 “이제는 기억속에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왜 김소월의 시를 두고 엉뚱하게 김광석의 노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까. 이 노래의 정반대편에 이 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네 번이나 힘주어 반복하는 “잊었노라”는 서글프고도 처절한 반어적 표현이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잊을 수 없다는 이렇게 해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결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시적 화자도 그러 노린 것이겠지, 사랑의 기억은 인간의 의지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그저 시간의 풍화작용에 의해 ‘잊혀지는’ 것이므로.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