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의 여자/김정란
오늘 저녁엔 한 번 찬찬히 살펴보시길
봄비 스스로 내리는 저녁 무렵
혹시 당신의 양복 뒷단을
희고 찬 낯선 손이 몰래 다가와
살며시 잡아당기지는 않는지
혹시 당신 아파트 문 위에
손톱자국이 나 있지는 않는지
자동응답기에 숨죽인 흐느낌이
녹음되어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
일간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그리곤
불 밝은 전동차 안으로 망설임이 없이 걸어 들어가는 동안,
혹시, 건너편, 시외로 빠져나가는 플랫폼
어두운 한구석에 숨어서 한 여자가 당신을
막막히 예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녀가 가슴을 불어가는 바람을 견디느라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문밖으로 쫓아버린 여자
당신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
그 여자, 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잇을지도 모르는
…….
<시 읽기> 건너편의 여자/김정란
스스로를 위로해줘
이별과 상실의 상대에 타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타인보다 더 자주 잊고, 잃고, 놓치고, 외면하는 사람은 나 자신일지 모른다. 잊고 싶은 과거의 나이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나, 기억 어디 저편에 억지로 꽁꽁 싸맨 후 방치해둔 나이거나 내면 깊숙하게 자리한 슬픔의 감옥에 유폐 시킨 나. 이런 나와 건강하게 이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위해 애도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책에서 애도가 불충분하거나 제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린다고 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책망하거나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자존감을 유지하며 슬퍼하라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 상대가 타인이든 자신이든(물론 프로이트는 어디까지나 상실의 상대를 타인으로 상정했지만)
진정한 애도의 과정 없이 마냥 쫓아버리고 잊어버린 ‘건너편 여자’는 언제든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일단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경란 시인은 춥고 가난하던 신혼 시절,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밥솥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노라 말한 적이 있다. 그 말 때문인지 나는 그녀의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미국의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떠오른다. 다행이 김정란 시인은 삶을 ‘선택’했다. 두 시인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애도의 완성에 있지 않았을까 멋대로 추정해본다. 김정란 시인은 ‘건너편 여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충분히 아파한 다음 놓아준 게 아닐까.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