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소식/박재삼
아, 그래,
건재약 냄새 유달리 구수하고 그윽하던
한냇가 대실 약방…… 알다 뿐인가
수염 곱게 기르고 풍채 좋던
그 노인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니, 그게 벌써 여러 해 됐다고?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팔포 웃동네 모퉁이
혼자 늙으며 술장사하던
사량섬 창권이 고모,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던
아, 그분 말이라, 바람같이 떴다고?
하기야 사람 소식이야 들어 무얼 하나,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을……
그러나 가령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군데 대밭이
아직도 그전처럼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고 있다든지
못물이 먼 데서 그렇다든지
혹은 섬들이 졸면서 떠 있다든지
요컨대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
<시 읽기> 고향 소식/박재삼
‘아, 그래,’라는 시구로 시작하는 박재삼의 「고향 소식」은 고향이 기억과 다르지 않은 말이라는 점을 새삼 알려주고 있다. ‘고향 소식’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바, 이 시는 외지에서 고향의 소식을 듣는 시적 화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지에서 오랜만에 듣는 고향 소식은 그러나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애달픈 소식들이 주류를 이룬다. 한냇가 대실 약방의 그 노인이 여러 해 전에 죽은 걸 시인은 이제야 비로소 듣는다. 고향 소식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어느 날 문득 누군가를 만나 정말 우연하게 듣는 소식이 고향 소식이니, 그것은 늘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소식들로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고향 소식에 목말라 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아프고, 또 누군가는 고향을 떠났다는 소식들이 대부분인데도 우리는 고향 소식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고향에는 여러 해 전에 죽은 풍채 좋던 노인이나, 머리에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던 창권이 고모만 있었을까? 시간이 흘렀으니 그들이 생을 마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사람 소식이야 들어 무얼 하나,”라는 시인의 말을 그리 서럽게 들을 필요는 없다. 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변한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은 것이 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이 시의 3연에 표현되는 대로,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군데 대밭이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는 장면이 보인다. 그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했겠지만) 자연의 모습이다. 먼 곳으로 보이는 못물도 여전히 있을 테고, 섬들 또한 졸면서 예전의 그 자리에 떠있을 것이다. 사람은 가도 자연은 남아 있다는 허무를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라는 이 시의 결구를 참조한다면, 시인은 그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살아남은 그것들이 고마운 것이다. 고마움의 정서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나이든 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고향이야 그 자리에 있는 그것만으로 웃음을 짓게 하는 대상이 아니던가.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그때의 대밭이, 그때의 섬들이 지키고 있다. 박재삼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이 기억들을, 돌려 말하면 ‘시적 현재’로 남아 있는 이 기억들을 통해 ‘고향’에 대한 감각을 유지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인에게 고향은 관념이 아니다. 고향은 한냇가 대실 약방의 그 노인이 살던 실제의 장소이고, 사량섬 창권이 고모가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며 살던 실제의 장소이다. 그리하여 고향에 대한 이 감각이 사라지면 고향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황석영의 소설인 「삼포 가는 길」에서 삼포가 고향인 정씨는 바로 이런 고향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고기잡이나 하고, 감자나 캐던 고향은 이제 포클레인이 땅을 파헤치는 개발의 장소로 변해버렸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정씨의 상실감에 비한다면, 박재삼 시인은 여전히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는 시구는 그런 점에서 시적 진실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고향에 대한 기억-감각이 곧바로 시가 되는 아주 드문 경우를 박재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