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황인숙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시 읽기>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의 뒤표지를 읽는다. "거짓말, 엄살, 극단적 나태, 자기방기, 또 뭐가 있을까, 무능력, 이기심, 허세, 윤리적 우월감, 독선, 의지박약…… 그리고 이제 몰염치! (…중략…) 그런데 그보다 더 내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 아아, 내가 저버린 존재들! '저버리다'라는 말은 뇌는 것만으로도 가슴아리다. '저버림'은 원초적 감각이며 존재적 감각이다. 저버린다는 행위에서 주체와 대상이 꼭 상관있지는 않다. '저버림'의 주체가 되는 건 그 대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인데, 대상은 주체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차가운, 고적한 포기를 생각하면 울음이 차오른다. 저버린다는 건 '보고' 외면한다는 것이다. 어떤 한 생명의 존재의지를 거절하는 외면. 삶의 기반이 허술한 사람들, 아예 그 기반이 없는 동물들. 내가 외면한 순간, 내가 저버려서, 절벽에서 떨어진 그 몸뚱이들……"
황인숙은 시집 전반에 걸쳐 고양이를 이야기한다. 길거리에서 나뒹구는 고양이. 사람들이 고양이들이 보기 싫다며 몰래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시인을 질책하기도 한다. 시인은 사람들의 말대로 고양이들로부터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만, 저버리고 외면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고양이를 저버릴 때 어떤 아픔이 고양이에게 찾아오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저버릴 때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산산조각날지를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시인의 시편을 읽으며 세월호를 생각하게 된다. 바다에 가라앉은 사람들. 사람들은 이제 그들에 대해 그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도 시인처럼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을 저버릴 때 어떤 아픔이 그들을 찾아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저버릴 때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산산조각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는 그저 저버림의 순간에 대해 절망하기만 하는 시집일까. 아니다. 명랑의 시인이라는 그녀의 별명답게 그녀는 곳곳에서 명랑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절망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 희망의 근거는 당연히 저버리는 순간의 눈의 마주침이다. 우리는 그 원초적이면서 존재적인 감각 덕분에 저버리지 않으려고 외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인은 점점 명랑해진다. 그녀는 이제 절벽에서 떨어지는 존재들에게 언어로 손을 뻗기까지 한다.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는 그래서 짐짓 쉬워보이면서도 어려운 시집이다. 시인의 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언어로 정리해 말하기란 쉽지 않다.
황인숙의 시에서는 비유나 은유, 상징이 물러난 자리에, 현실에 리듬을 부여하는 명랑이나 현실에 조금 젖어들게 하는 우수의 생생한 발화들이 들어찬다. 우리는 그의 경제적인 언어, 절제된 표현, 일체의 허식을 지워버린 기술, 단문의 구성, 간투사와 의성어의 적절한 배합, 회화의 어법, 지문과도 같은 독백의 배치를 통해, 한결 가벼워지면서 그 의미가 중층으로 조용히 번져나가는 시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게 된다.
그 삶의 리듬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거리로, 그의 현실로, 그의 과거와 현재로, 그가 비워낸 저 공간으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골목에서 다시 골목으로, 계단, 층계, 물에 젖은 저 포도 위로 흐른다. 그의 시는 가슴도 정신도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여기, 삶이 뿜어내는, 삶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우수와 명랑의 타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