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의 괴로움
물가가 날마다 올라서 2024년 봄에는 사과 한 개가 5천 원이 넘었다. 사람들이 사과 한 쪽도 마음대로 못 먹게 되었다고 날마다 아우성이다. 정부는 물가 인상률을 숫자로 발표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쓰나미이다. 소비가 물가가 1%만 올라도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는데, 한 달에 6~7%씩 매달 오른다면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을 지경이다.
코로나19가 부수고 지나간 폐허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삶의 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미 부서진 삶의 자리를 물가고物價高가 다시 부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에너지 가격 상승, 고금리와 고환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곡물 수출 동결 등이 이 물가고의 원인이라고 정부는 설명했다.
정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 물가고는 가뭄이나 홍수, 지진 같은 자연현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구조와 국제무역의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세력에 의해 조정되고 통제되는 인위의 산물임을 알겠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상대로 직접 수렵채취하거나 자급자족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노동을 임금으로 바꾸어서 시장에서 살아야 하고, 금융자본과 거대기업이 장악한 유통망 속에서 한 명의 무력한 소비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물가고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두 압도한다. 물가고는 중생고의 종합판이고 완결판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는 허름한 식당 몇 개가 코로나19와 물가고의 재난을 견디면서 버티고 있다.
찌개를 파는 식당은 6천 5백 원짜리 제육볶음이 가장 비싼 메뉴이고, 돼지찌개,꽁치찌개, 참치찌개는 모두 6천 원이다. 라면은 4천원, 라면에 가래떡을 몇 조각 넣은 떡라면은 4천 5백 원이고, 라면을 넣지 않고 떡만 끓인 떡국은 5천 원인데 여기에 계란 한 개를 풀어 넣으면 5천 5백 원이다. 이걸 먹고 나서도 양이 차지 않는 사람은 5백 원짜리 계란 프라이 한 개를 더 시켜서 먹는다.
찌개식당 옆에는 중국식당이 있다. 이 식당의 최저가 메뉴는 4천 원짜리 짜장면과 5천 원짜리 짬뽕이다. ‘짬짜’는 한 접시를 둘로 나누어서 한쪽에는 짬뽕, 한쪽에는 짜장면을 내주는 메뉴이다. 짬뽕을 시키려면 짜장면이 먹고 싶고 짜장면을 시키려면 짬뽕이 먹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 마음이 분열되는 사람들은 짬짜를 먹는다. 짬짜는 6천 5백 원이다.
중국식당 옆집은 국수가게다. 물국수는 6천 원이고 국수에 여러 가지 야채와 양념을 넣은 비빔국수는 7천 원이고, 어묵을 넣은 국수는 7천 5백 원이고 골뱅이를 넣은 국수는 8천 원이다. 재료를 넣는 정도에 따라서 음식 값은 5백 단위로 올라간다.
식재료 값이 올라가도 이 식당들은 값을 올리지 않고 있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5백 원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손님들은 밥값이 5백 원 더 싼 집으로 간다. 식당 주인들은 5백 원을 올리자면 옆 식당의 가격 동향을 살펴야 하니까 서로가 무서워서 좀처럼 값을 올리지 못한다. 식당들은 서로가 서로의 족쇄가 되어 묶여 있다.
가격이 묶여 있는 지난 2년 동안에 음식의 내용은 부실해졌다. 찌개에는 돼지고기, 꽁치, 참치 건더기가 줄어들었고, 짬봉에는 조개가 줄어들었고, 국수에는 어묵과 골뱅이가 줄어들었다. 계란 값이 계속 올라서, 계란 프라이 한 개를 5백 원에 파는 메뉴는 곧 없앨지도 모른다고 식당 주인이 손님에게 말했다.
찌개를 파는 식당은 24시간 영업을 한다. 저녁에는 하루의 노동을 마친 사람들이 이 식당에서 혼밥을 먹는다. 날마다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혼밥을 먹는 사람도 있다. 50대의 남자인데,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고, 음식을 삼킬 때 목울대가 흔들린다. 늘 4천 원짜리 소주 한 병을 반주로 마신다. 이렇게 마시는 소주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느낌 속에 위안이 있다. 이 위안은 헛되지만 그래도 잠시 동안은 사는 것이 덜 힘들다.
새벽에는 야근으로 밤을 새운 사람들과 새벽일을 나가는 사람들이 이 식당에 와서 밥을 먹는다. 새벽배송을 하는 라이더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작업 지시를 받고 있다.
이 식당들의 가격은 생존의 한계선이다. 식당들은 이 가격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다. 식당 주인들도 음식을 사 먹는 사람들도 더 이상은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서, 노동을 팔아서 밥을 먹고 밥을 팔아서 밥을 먹는다.
사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값이 오르고, 돼지고기 값이 오르면 식당의 찌개백반 값이 오른다. 돼지고기 값이 올랐는데도 찌개백반 값을 올리지 않으려면 찌개 속의 건더기를 줄여야 한다.
밥값을 올리면 손님들은 싼 가게를 찾아가고, 건더기를 줄이면 건더기가 많은 가게로 간다. 5백 원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달걀 라면을 먹고, 5백 원을 아껴야 할 사람은 보통 라면을 먹는다.
물리적 강제력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에 맞는 식당과 메뉴를 선택한다. 밥을 먹는 사람이 이처럼 알아서 가는 원리를 어려운 말로는 ‘시장의 자유’라고 하고, 가격이 시장에 질서를 부여하는‘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도 한다. 이런 얘기들은 경제학원론에 쓰여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은 가격의 기능을 ‘신의 섭리’쯤으로 모시고 있다. 이 섭리의 작용으로 인간의 욕구는 조화롭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시장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질서와 자유 속에서 전개된다고, ‘보이지 않는 손’은 말한다.
경제학원론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거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되고 있지만, 그 작동의 결과는 자유와 조화가 아니고 억압과 구속이다. 이 억압과 구속은 밥을 사 먹는 사람과 밥을 팔아서 밥을 먹는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 자동차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자유와 조화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4천 원이나 5천 원짜리 밥을 먹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노동으로 먹고사는 그날그날 속에서 5천 원짜리 밥 세 끼와 아이들 먹는 분유와 군것질, 기저귀와 치약을 잘라 버릴 수는 없다. 더 이상의 퇴로가 없는 한계선에서 인간은 이 보이지 않는 몽둥이와 쇠사슬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시장에서 한 사람의 소비자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자력으로 쇠사슬을 끓을 수 없고, 시장에서 달아나서는 살 자리가 없다.
이 식당들은 내부가 좁아서 모르는 사람끼리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혼밥을 먹는다. 밥은 밥을 넘기는 사람들이 영혼과 육신에 깊이 각인된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인간은 사슬에 결박된 상태에서도 고귀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무엇이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먹는다’는 행위의 보편성과 절대성이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밥이 아무리 싸고 남루해도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에게 경건한 것이라고 이 동네 식당은 가르쳐 주고 있다. 밥은 생로병사의 기본 토대이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6장 26~30절
이 식당 골목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예수님의 말씀이 공밥을 먹여 주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이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내실 때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즉, 네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라고 말씀 하셨다. 공밥은 없다는 뜻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고귀함과 밥의 경건함을 말씀하신 것이리라. 이 골목식당 가격표 안에서도 인간의 영성은 살아 있다. 영성은 밥 속에도 있다.
―김훈, 『허송세월』, 나남, 2024. 159~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