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서원(龜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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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분평동 251-5 ❏배향인물: 이준경(李浚慶) 서사원(徐思遠) 박지화(朴枝華) 이득윤(李得胤) 이 당(李 塘) ❏창건연도: 1647년(인조 25) ❏향 사 일: 음력 3월 17일 |
1647년(인조 25)에 지방유림이 괴산군 청안면 석곡리에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이준경(李浚慶)을 주벽(主壁)으로 서사원(徐思遠), 박지화(朴枝華), 이득윤(李得胤), 이당(李塘)의 위패를 모셨다. 선현의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 지방유림이 뜻을 모아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1982년에 중수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재산으로는 서원대지 6백여 평이 있다.
1)주벽(主壁)-이준경(李浚慶,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 鈞 :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서사원(徐思遠, 1550∼161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낙재(樂齋). 필(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전교 흡(洽)이며, 큰아버지 형(泂)에게 입양되었다. 달성 출신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 뒤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이 있다.
3)박지화(朴枝華, 1513∼159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庵). 아버지는 형원(亨元)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유·불·도 등에 통달하였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수암유고≫·≪사례집설 四禮集說≫ 등이 있다.
4)이득윤(李得胤, 1553∼1630)
조선 중기의 역학자(易學者)·악인(樂人).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고려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우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의성현령을 지냈다.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부(賦)·기(記)·시(詩)·서(書)·악보·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 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현금동문유기≫ 외에 저서로 ≪서계집 西溪集≫·≪서계가장결 西溪家藏訣≫이 있다. 특히, 정두원과 나눈 서한의 내용을 담은 ≪현금동문유기≫는 ≪안상금보 安常琴譜≫·≪조성금보 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5)이당(李塘,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지방(止方). 증조는 길배(吉培)이고, 할아버지는 질이며, 아버지는 승희(承禧)이다. 진사시를 거쳐 1528년(중종 23) 여주에서 실시한 문과별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뒤에 병조좌랑·정언·경기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 5칸의 재실(齋室),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기념비 등이 있다. 사우에는 중앙에 위치한 이준경의 위패를 중심으로 서사원, 박지화, 이득윤, 이당의 위패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은 춘추 제향 시 제관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청주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