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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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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의문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형조에 고변서를 올렸는데 고변 내용을 보면 세자가
내시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 이었다. 형조참의는 영의정이자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상의한 뒤 영조에게 알렸고, 영조는 친국을 명하였다. 나경언이 친국받는 과정에서
세자의 비행이 십여 조목에 걸쳐 폭로되었다. 폭로 내용을 보면 잦은 미행, 왕손을 낳은 애
첩을 죽인 일, 기생과 승려를 도성안으로 불러들인 일, 낭비벽 등이었다. 영조는 고변한 나
경언을 사형에 처하고, 세자에 대한 문책만을 남겨두게되었는데, 결국 영조는 고심 끝에 세
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강등하고, 윤 5월의 폭염 속에서 손수 뒤주에 세자를 가두었다. 세자
는 뒤주에 갇혀 9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가 굶어 죽어갔
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이처럼 비참하게 죽었을까? 나경언이 고변한데로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몄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나경언의 고변은 믿기 어려운 것은 세자가 특정 정치세력이나
군영대장이 아니라, 한갓 내시들과 결탁하여 반역을 꾀하였기에 그것과는 다른 가려진 원인
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흔히 사람들은 사도세자가 정신병 증세를 일으켰기 때문에 부왕인 영조가 정치 안정을 위
해 어쩔 수 없이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
씨도 《한중록》에서 남편의 정신병 증세와 광폭한 행동을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조는 과연 정신병 때문에 사도세자를 죽였을까? 뒤에 왕이 될 사람이라면 세
자의 자리에서 �i아내거나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구태여
자기자식을 죽일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
사도세자는 사건이 이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게 된 이유는 대개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도세자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당시의 국왕인 영조였기 때문이다. 어는 누구도
감히 영조의 처사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세자 사건의 원인을 밝
히려는 논의가 대두돼지 못하고 의문의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둘째는 사도세자 사건의 원
인과 과정을 설명해주는 사료상의 문제점이다. 사도세자는 사건이 즉시 논의될 수 없었기에
그애 관한 기록은 지극히 개인적인 필요에서만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난 뒤
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사건을 달리 해석함으로써 억측이 난무하게 되었다.
♠사도세자 사건을 설명해주는 이야기들
우선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한중록》을 통해서 들어보면,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100
일이 지나자마자 저승궁으로 보내져 유모와 나인들 품에서 성장 하였다고한다. 그 과정에서
세자는 부왕인 영조에 대한 험담을 자주 들었고, 책보다는 창과 활 따위에 관심을 갖데되었
다. 나아가 친모인 영빈과의 접촉도 쉽지 않아 부모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성장과정에서 가끔씩 이루어진 영조와의 만남은 오히려 사도세자와 영
조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세자와 영조의 성격 판이하게 달랐는데, 영조는 성격이 활발하고
민첩한 반면, 세자는 말이 없는 데다가 행동도 더딘 편이었다. 당연히 영조는 세자의 그런
성격이나 행동을 못마땅해 했고, 세자와 영조의 만남은 항상 영조가 세자에게 화를 내는 것
으로 끝이 났다. 때문에 세자는 아버지인 영조를 몹시 두려워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
는 심해졌다.
사도세자가 15세 때부터 영조의 명령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면서 문제는 한층 심각해졌다.
왕을 대신해서 정사를 처리해야 하는 대리청정은 사도세자에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주었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영조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고, 결국은 '화증'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일
마다 영조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겁을 내고 영조 앞에서는 몹시 불안한 기세를 보이더니,
마침내는 발병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20세기를 전후해서는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불 때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어려운 관계, 즉 억눌린 감정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행동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 스스로 화증의 병이 있다고 했
을 뿐 아니라, 부왕의 사랑을 얻지 못한 때문에 이러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했기 때
문이다.
이처럼 사도세자의 '화증'을 유발했던 영조는 과연 어떤 아버지였을까? 영조는 생모인 최
씨가 비천한 신분이어서 성장과정이 보통 왕자에 비해 불우하였다. 그것만 이었다면 영조가
그렇게 비정한 아버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장과정 내내 자기의 의
도와는 관계없이 왕위계승과 관련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영조의 부친인 숙종에게는 본래 세 아들이 있었으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나이까지 장성
한 황자는 뒷날 경종이 된 세자와 영조, 이 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복형인 세자는 생모 장
희빈이 숙종에 의해 죽음에 처해졌고,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건강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 ㄸ문에 경종은 세자이면서도 왕위계승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종은 당시 정국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세
자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에 의해 공공연히 숙종의 뒤
를 이을 왕위계승자로 거론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정쟁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위치
를 지키지 위해 늘 소심하게 행동하며 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국가를 통
치하여야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 오래지 않아 일어난 '무신란'은 그러한 부담을 더욱 증
가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영조가 받은 정신적 압박은 그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
쳤다. 영조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 편협하고 조급하다고 시인할 정도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
은 생모에 대한 강한 집착과 자녀에 대한 편집적인 애증현상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화협옹
주와 화완옹주는 몹시 사랑하면서도 사도세자나 화협옹주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미워했던 것
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과 미워하는 자식이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못 견뎌했다.
극단적인 예로 날씨가 안 좋은 것마저 세자가 부덕한 까닭으로 돌렸기 때문에, 사도세자는
평소에도 날씨가 궂을까 걱정했을 정도였다.
이상은 사도세자 사건의 원인을 세자와 영조의 비정상적 성격과 정신이상 때문으로 보는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
임이 있거나, 간접적인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예를 들어 영조,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아내인 혜경궁 홍씨, 장인인 홍봉한 등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영
조는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하여 모든 책임을 세자에게 돌렸
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변명이나 왜곡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사도세자는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을까?
과연 사도세자는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감에 의해 광인이 되었을까? 아니
면 좀 더 미묘한 원인에 의해 정신병자로 몰렸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혜
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지을 당시 정치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 틀림없기 때문
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지을 때쯤,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커다란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세자의 장인이며 자신의 친정아버지인 홍봉한이 사도세자 사건이 연루되었다
는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남편이 죽음을 전적으로 정신병 때문이었
고, 정신병의 원인은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말
미암았다고 강조하였다. 사도세자가 죽은지 30년이 넘은 시점에서 새삼 남편이 죽게 된 까
닭이 정신병 때문이라고 누누히 강조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혹시 사건의 원인이 오히
려 매우 정치적인 데서 비롯된 ㄸ문은 아닐까?
실제로 앞서 살펴본 바와는 달리 사도세자사건을 정치세력과 관련된 영조와의 갈등에 의해
설명하는 몇몇 견해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세자가 평소에 노론을 미워하고 소론을 두
둔했기 때문에 노론의 모함을 받아 정치적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럼 사도세자는 무엇
ㄸ문에 노론의 모함을 받았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조와 노론 사이의 관
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숙종 후반에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노론측은 차츰 권력을 강화
하여 끝내는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사사시켰다. 이에 반하여 소론측은 세자인 경조의
보호를 주장하면서 장희빈을 구하려고 하였다. 경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노론의 내심 경
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경종은 노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즉위에
성공하였다.
경조의 즉위는 소론측의 승리를 의미했다. 경종은 30대가 되도록 보위를 이어갈 자식이 없
었다. 노록측은 이를 핑계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종은 자신의 병
약함과 노론의 주장에 밀려 그것을 수락하였다. 나아가 노론은 연잉군이 세제로서 대리청정
할 것을 주장하여 그것도 일시 관철시키기에 이르렀다.
경종을 뒷받침하고 있던 소론은 노론의 처사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경종은 1721년(경
종 1년)소론의 뜻을 받아들여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이이명,이
건명,조태채)을 처벌하였다.또한 소론은 이듬해 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정치일선에서 몰아냈
다. 이 두 사건을 일컬어 '신임사화'라 한다. 경종 연간에 일어난 신임사화에 대해 노론과 소
론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에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즉 노론은 경종 연간에 노론이 영조를
왕위 계승자로 확립시키려 했던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는 것이었고, 소론은 노론의 이런 행
위가 경종을 배반한 것이었고 이를 막으려 한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보았다. '신임의리'
는 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멀리는 원만히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할 목적으로, 가깝
게는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는 약점을 만회할 목적으로 탕평책을 펴 나갔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에서 탕평책 동조자를 등용하여 첨예한 대립을 조절하면서 정국을 이끌어 가는
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는 세자를 제거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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