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Modernity)의 지층들>그린비 출판사 5강. 자본주의와 계급이론. / 요약]
이글은 '자본주의와 계급이론'논문을 요약한 것이다.이 논문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계급이론과는 다른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여기에 소개한다.이 논문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힘과 계급을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시사점을 준다.나는 필자의 견해에 공감하는 면도 있지만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같은 노동자나 동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고용주와 다름없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박대한다.또한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있어야 할 심연의 강이 프롤레타리아 내부에 생긴 형국이다.상당수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다.대신 조금이라도 더 부르주아지와 가까운 위치에서 안정을 누리고 싶어한다.정규직의 눈에 비정규직은 내 밥그릇을 위협하는 경쟁자일 뿐이다.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동지로 바라볼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시선과 눈을 잃어버렸다.대신 부르주아적 삶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부르주아적 욕망을 품은 프롤레타리아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부유층이나 부르주아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르주아적 삶을 욕망하지 않는가.삶의 기품을 증명해 주는 명품 아파트에 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한다. ......
이때 욕망은 환상이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고 영향을 미친다.우리들은 그 욕망에 따라 같은 처지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해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같은 처지의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소득과 위치를 점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한다.
그 결과 계급적대가 약화되고 프롤레탈리아 내부 대립이 생긴다.부르주아지의 욕망을 한껏 품은 눈에 부르주아지가 밉게 보이겠는가.이제 부르주아지는 '적'이라기 보다는 '지향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조건을 과감히 무시하고,부르주아적 욕망을 품은 프롤레타리아트.그들은 제국주의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으로,나치를 지지하는 독일 빈민층의 모습으로,부자증세 반대,복지축소를 부르짖는,부자들을 위한 반동정당 미국 공화당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노동자와 빈민층의 모습으로,천황제와 군국주의,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보수세력을 지지하는 일본 노동자들의 모습으로,노동당에서 극좌파를 축출하고 타협안을 지지한 영국노동자들의 모습으로,부자들을 위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 박근혜를 지지하는 한국 노동자들과 빈민층의 모습으로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1.계급은 셋이다?
나는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단순한 편리나 구분을 위한 계급의 분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유의미한 성격을 위해 계급은 규정되고 분석된다. 때로 불편할지언정 누구도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론 등에서는 통상적으로 상층계급, 중간계급, 하층계급으로 나눈다. 상층계급은 상당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개인이나 가족을 뜻한다. 이들은 막대한 재산을 기초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통제하고 활용한다. 중간계급은 소규모 사업가나 자영업자, 혹은 화이트칼라 등을 가리킨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며 실제로 상향 이동하려 한다. 하층계급은 블루칼라나 노동자나 실업자 혹은 단기 취업자 등을 가리킨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며 사회에 불만을 가지기 쉽다. (135p)
중간 계급, 즉 중산층은 한 사회의 건강성의 척도라 한다. 계급 간 이동이 수월한가, 계급 간 차이가 차별로 역행하지는 않는가, 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중산층이라 하겠다. 몸에 비유하자면 허리, 불룩한 항아리 모양정도로 표현될 수 있겠다. 한 때의 일본은 중산층이 단단한 국가로 평가되었고 현재의 미국은 계급 간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극단적인 양극화를 겪어내고 있다. IMF이후의 한국은 불룩한 항아리가 아니라 홀쭉한 호리병이 되었다는 평가다. 이는 IMF를 온 몸으로 견뎌낸 것은 하층계급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민(계급)이었지만, 이후의 호황을 누린 것은 상층계급 ‘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겪고 있는 양극화에는 ‘중간계급의 부재’와 ‘계급 간 이동불가능’이 있다. 고용으로 살펴보자면 비정규직(하층계급)의 정규직(상층계급) 전환가능성 제로 정도겠다. (한국의 비정규직보호법은 비정규직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 기업이 비정규직을 안정되게 계속 고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껏 한국의 계급은 존재하지만 인정하기엔 어딘가 불편한, 세련되게 해석되긴 하지만 깊은 분석이나 성찰은 부족한 상태로 존재해왔다.
2. 계급은 둘이다?
1) 적대하는 계급
마르크스스주의자들은 계급을 둘로 규정지었다.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와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계급)가 그것이다. 이 둘의 관계의 핵심은 ‘적대’다.
“경향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라는 두 개의 현실적 계급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발리바르, <역사유물론연구, 140p>) 나머지는 결국 양 계급에 속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두 계급은 왜 적대하는가? 마르크스스주의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치생산 구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잉여를 추구하는 체제이다. 즉, 자본주의는 이전보다 더 많은 재화와 가치를 생산할 것을 요구하고 추구한다. (140, 141p)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되는 효율과 실용이 자본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회사의 존재이유는 이익을 내기 위함이고 따라서 회사는 더 많은 수익, 이익을 내기 위한 효율성을 고심한다. (사회적 기업 등은 논외로 하고) 인간성의 결여라고 할 수도 있겠고 효율성의 확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하튼 가진 자들 (부르주아지)는 더 많은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용, 이용한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를 수단으로 삼는다. 최근 70일 넘게 파업을 계속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조원은 “노동자는 쓰레기입니까.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물건입니까”라며 분노했다. 자본주의 안에서 수단으로 이용하는 상대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하는 방식에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부르주아지는 잉여를 생산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고용한다. 잉여의 생산을 위해서다.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쓸모없어진 물건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적대의 두 관계를 심화시키는데 가장 탁월한 배경이 된다.
2)깊어지는 심연
두 계급간 ‘적대’의 심화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긍정했다. 적대적인 계급의 완성과 성립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될 것으로(144p) 예상했기 때문이다. 프로레탈리아트가 단지 착취만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절단과 분화, 효율과 실용사이에서 프로레탈리아트의 장인 노동자의 노동과정은 쓸모없어졌다. 숙련노동 즉 단순노동의 요구가 확대되었고 고급노동은 부르주아지의 몫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고용주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이며 이때의 노동자는 부르주아지가 만들어 놓은 조직의 체계성, 시스템에 복종을 강요받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대했던 ‘혁명’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시스템에 융화될수록, 혁명이나 부르주아지로의 계급이동이 불가능해질수록,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은 증가되고 이 둘의 양극화는 심화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는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효율적으로 착취당한다.
3) 계급, 적대의 파노라마
마르크스스주의자들이 말하는 두 개의 계급론은 세 개의 계급론에 비해 크게 세 가지 차별 점을 가진다. 첫 번째로 두 개의 계급은 단절과 적대라는 관계를 기초로 형성된 집단이다. 단순히 소득수준에 따라 분류된 집단이 아니다. 둘은 한쪽이 한쪽을 착취함으로써 잉여를 생산하는 적대적 관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두 번째로 계급은 불연속적인 집단이다. 쉽게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수도,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가 될 수도 없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적대할 뿐만 아니라 더 격화된 방식으로 그 적대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계급은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설명한다. 여기서 계급은 단순히 집단을 식별하는 정태적 기준이 아니다. 그 충돌은 사회의 잉여를 생산하는 과정과 방식을 규정한다. 한 가지 덧붙일 점은 계급이 존재하고 계급투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적대와 투쟁이 생기고 그 적대를 중심으로 계급이 형성된다. (151, 152p)
마르크스스주의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별점 때문이다. 이들은 이 두 가지 차별점을 겪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머지않아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본주의의 억압을 견디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몰아내고 혁명을 일으킬 거라는 기대감이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은,자본주의사회는 적대를 함축하는 생산과정 때문에 스스로를 몰락시킬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폭탄을 점점 키운다고 보고 있다.그들은,계급은 자본주의 앞에 펼쳐질 계급투쟁의 파노라마를,계급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고 전망한다.그러나 현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혁명의 전망이 열리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자본주의 사회의 중간계급화된 안정적인 노동자계급의 상층,그리고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하층의 일부도 자본주의체제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그라쿠스)
몸뚱이 하나밖에 가진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부자가 되기 위해 건너야 할 심연의 강이 깊고 넓은 것처럼 부르주아지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연합하고 심연의 강을 더욱 깊게 굴착한다. (148p) 두 계급은 각자 부의 획득이라는 최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쪽은 장벽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한 쪽은 몸으로 그 장벽을 넘어보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3.계급은 하나다?
1)혁명의 위기
하지만 결정적으로 두 개의 계급론이 예언한 미래는 오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그래서 혁명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 선진 자본주의일수록 변혁은 일어나지 않았다.(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체제를 타파하는 혁명을 노동자계급에게 호소했지만,미국에서도,독일에서도,일본에서도,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노동자계급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답장을 아직까지 보내지 않고 있다.-그라쿠스) 심지어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마저 무너졌다. 두 개의 계급론이 바라본 미래와 다르게 자본주의는 그 형태를 달리하며 더욱 공고해져갔다. (153p)
가난한 사람이 왜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할까? 라는 질문에 계급배반의 해설이 붙기도 한다. 가난을 바라보고 가난한 자들의 연대가 아니라 자신의 계급이동을 꿈꾸며, 자신의 현재가 아니라 자신이 욕망하는 이후의 삶에 투표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자본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그라쿠스) 분열과 보수화를 가져왔다. 두 개의 계급론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동질화되고 단결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분열되고 분화되고 보수화되었다(153p)는 설명이다. (이 양극화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양극화 뿐만아니라,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과 양극화를 가져왔다.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개의 계급론(자본가계급-노동자계급이라는 두 개의 단순 중심계급론)은 이러한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동질적인 단일한 계급이 아니라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그라쿠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지의 삶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서로는 ‘동지’라기 보다는 ‘패배자’이다. (157p) 서로의 연대가 불가능해져버린 이유다.(필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의 풍경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다.-그라쿠스)
2)공리계와 계급
왜 우리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부르주아지의 삶과 가치를 욕망하는가?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마찬가지이다.다른 물질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두 쪽 모두 부르주아지처럼 살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나 하나만이라도'비정규직을 피하려 하고,'나 하나만이라도 정규직'이 되고자 한다.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그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거꾸로 비정규직은 부르주아지가 정규직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있는 근거가 된다.보장해줘야 할 것도 많고 시끄러운 정규직대신 비정규직을 고용하면 그만이다.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대신 부르주아적 삶을 지향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서서히 그 힘을 잃고 부르주아지의 공격에 시달린다.(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계급을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할하고,정규직에게는 당근을 주어 포섭하여 비정규직을 가혹하게 착취한다.-그라쿠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이란 주체가 마음대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까지 생산해내는 사회구조의 효과이며 생산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자본주의는 어떤 배치와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이런 자승자박의 욕망을 생산하는가? 자본주의의 배치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는 어떤 욕망을 가지는가?
우선 자본주의를 이전의 사회와 구분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이전 사회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돈, ‘화폐’에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는 화폐를 통해 측정된다. 화폐가 가진 고유한 숫자를 통해 추상적으로 측정되는 ‘부’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 어떤 것이 자신이 가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화폐로 환산될 수 있으며, 적지 않은 가격임을 보여야 한다. (159p,160p)
화폐로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는 화폐의 가치와 존재의 가치가 동일시된다. 양반과 백정을 나누는 신분은 사라졌지만, 화폐라는 새로운 수단이 등장해 각자의 신분을 더욱 혹독하게 나눈다. 화폐로 환산되지 못하는 존재라면? 화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없는 재화는 가치가 ‘없다’ (160p)
수학에서 당연히 참이라고 여겨지는 명제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공리’라는 용어로 지칭했다. 자본주의사회는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을 구성하는 몇 가지 공리로 구성된 ‘공리계’이다. (들뢰즈, 가타리 <천의고원> 2권, 237~250p) 자본주의 공리계는 그 보다 우선한 것이 없는, 선이자 최종의 단계, 원칙으로 존재한다.
봉건사회의 ‘신분’과 대비되는 ‘계급’은 바로 이런 보편타당하고 자명한 공리계에 종속된 자들을 말한다. 즉, 계급은 신분과 달리 사회의 보편적이고 자명한 법칙을 따르는 자들, 자본주의의 가치질서를 충실히 내면화한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소득이나 물질적 조건보다 자본주의 공리계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자본주의적 가치인 화폐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로 규정된다. 이렇게 보면 계급은 두 개가 아니다. 공리계를 받아들인 집단은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가치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계급을 우리는 부르주아지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상 유일한 계급이다.(163p)
계급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부르주아지를 욕망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할 수 없다. 부르주아지의 확대일 뿐이다. 공리계에 포섭된 부르주아라 할 수 있겠다.
3)비(非)-계급
계급 밖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비-계급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자본주의 공리계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공리계에 벗어난 사람들, 자본주의 가치증식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지칭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을 벗어나 있기에 전혀 다른 삶의 원리를 꿈꿀 수 있다. (164, 165p)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은 부르주아지의 기준, 자본주의의 공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기준을 창출할 능력이다. 그것은 공리 외부의 삶을 꿈꾸고 실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돈을 벌어서 자본주의적인 증식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 함께 꿈을 꾸는 동료들을 위해 쓰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구에게 선물하는 것, 법적으로 용인된 사랑이 아닌 (동물과 사물과 기계와의 사랑 등)을 꿈꾸는 것이 바로 그런 실험이다. (165,166p)
자본주의 공리계의 핵심인 ‘화폐로 인정받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행동’이 비-계급되기의 시작이자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설명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의 내부에서, 한정된 몫을 가지고 부르주아지와 투쟁하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몫’을 ‘가치 자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와 부를 창출하면서 자본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이들이다. 계급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과 비-계급의 투쟁인 것이다.(167, 168p)
4.비-계급 되기
모두들 각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행동한다. 비정규직과 연대하길 거부하는 정규직도, 한 때는 동지였지만 파업 후 적이 된 노동자들도 그들의 심성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욕망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누구도 완전한 부르주아지는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자본주의 공리계를 벗어나는 ‘실험’을 기꺼이 시도해야 한다.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함께 끊임없이 자본주의의 외부를 추구하고, 그를 위해 새로운 것에 활짝 열린 공동체를 시도하는 것이다. (169, 170p) 누군가 분류한 계급이나 주어진 상황 안에서 욕망을 강요당하거나 나의 욕망을 고민해본 적 없이 무작정 ‘더 많이 버는 것’외에도 삶은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 실험의 시도가 빈번할수록,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비-계급되기를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단단한 기틀은 허술해진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그라쿠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16 새로운 계급이론을 요약,소개해 봤습니다.참민님,스스로있는것님의 코멘트를 기대합니다.
나는 이 논문 필자의 계급분석에는 상당히 동의하지만,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비-계급되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대안이 너무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것 같습니다. -
작성자그라쿠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16 이글에 대한 한빈님의 논평을 기대합니다.지적 토론을 좋아하는 응급의사님의 독후감을 기대합니다.회원 여러분들의 이글에 대한 소감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글은 논문을 요약한 글이며,리뷰(평론)가 아닙니다.따라서 나는 이 논문의 필자와 견해가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
작성자달비츨 삼키고 작성시간 12.07.16 일단 제게는 어려운 용어들과 내용입니다.그렇지만 훌륭한 내용을 소개해준 그라쿠스님께 감사드립니다.쭉 읽어 보면서 와 닿는 것은 비계급 되기입니다. 최근 시도 되고있는 현상 중에 눈에 들어오는것이 생활공동체,생활협동조합 등입니다.자본주의=화폐 에서 벗어난 가치 중심,생태 중심을 실현하기위한 시도라고 느껴집니다.제대로 공부한번 해야 겠습니다.
-
작성자응급의사 작성시간 12.07.17 "화폐로 인정받는 가치" <---- 멋진(적절한) 표현이네요.
진단은 대부분 동의합니다만....어째 결론이.....
손에손잡고 산으로 가자는 목가주의적 발상?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같은 모습을 가진 조직이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바로 가족입니다.
그럼 고민해봅시다.
당신과 내가 가족이 될수 있나요?
이 대답에 예라고 하지 못한다면 사회주의는 존재할 수 없는 이데아일지도 모릅니다.